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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Nov 10. 2020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부제: 쓸다리없는 고백 (YH에게)

떡볶이와 칼국수를 좋아하는 금마리는 스물한살에 대학에서 나를 처음 본 순간, 결정했단다. 나를 언니로 대해야겠다고. 언니,라고 부르면 저 사람에겐 떡볶이를 얻어먹겠구나, 싶었다고. 영특한 것. 그때 나는 친구들보다 1년 늦게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못내 자존심이 상했고, 자취에 대한 가족들 반대에 굴복하여 다소 먼 거리를 통학하고 있었기에 지각하지 않는 것과 막차 전에 서울에 오는 것에 대해 강박같은게 있었다. 마음을 열어 친구를 사귀고 싶은 마음도 캠퍼스 낭만따윌 누릴 생각도 없었다. 꼭 가야한다는 OT도 안갔다. 모든게 그냥 즐겁지않았다.

차라리 대전이나 전라도처럼 누가봐도 먼 지방으로 학교를 갔더라면 4년 동안 원없이 지방살이를 해볼 수 있었울텐데, 경기도 용인은 정말이지 그때 내 상황만큼이나 어정쩡했다.


먼저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은 OT 를 가지 않을 경우 생기는 힘든점에 대해 오버하며 겁을줬다. 동기들이 만든 인터넷까페라도 가입해서 친한척 해야 한다고, 이미 다들 그룹이 형성되어 너는 어디에도 끼기 쉽지 않을 거라고. 중고등학교 내내 그런걸로 예민한 사춘기를 보냈는데 대학까지 가서도 그래야한다고? 그냥 싫었다. 부러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학까지 친구사귀러 간건 아니잖은가.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그리고 동기라고해봤자 나보다 한살 어린 애들일텐데 굳이 다가가서 뭐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진정한 친구는 중고등학교에 만나는 것이며, 대학에선 그런 친구를 사귈 수 없다는 게 정설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그럴바에야 누구에게도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모순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가와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때 나타난 애가 대학시절 내내 베프로 지냈던 AB형 김**이다. 엉덩이 큰 여자가 이상형이라던 휘성을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남들보다 엉덩이가 큰. 집은 안양이었는데, 통학이 하기 싫다며 기숙사에 살았던 십수년전 그시절 베프. 거의 대부분의 날들 나를 위해 스쿨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주었고, 강의실 앞자리를 맡아주거나, 시험기간엔 만원인 도서관 자리를 찜해주는 고마운 친구였다. 각종행사에 참석할 기회를 알려줬고 (기쁘게 가본적이 단 한번도 없지만, 늘 혼자이고 싶지 않다는 그애 부탁에 못이기는척 가주곤했다) 다음학기 피해야할 교수를 알려줬고, 선후배를 소개해줬다. 4년내내 붙어다녔지만 가끔 내 뒷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애 입장에선 아니었을 수 있으니 내 입장에선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던 몇몇 에피소드가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것도 같다. 같다, 고 표현한건 애매한 까닭에서다. 어쨌거나 늘 배고파하는 그앨 위해 학교식당에서 1800원하던 밥을 사주었고. 시험범위 써머리를 제공했다. 팀 플젝을 리딩하기도 했다. 물론 구박하고 핀잔을 주는 일을 담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학시절 내내 내 옆을 떠나지 않았던 친구인데 20년이 지난 지금, 그게 왜 새삼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잘 지내지 친구야?)


4년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맨 앞자리에서 교수님 침튀기는 것 맞아가며 열심히 수업을 들었고, 대부분의 교수님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으며 (결국 그들중 한분의 추천으로 부동산 잡지사에서 기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책상에 키워드 적어놓고 컨닝도 했었고 성적에 이의신청도 몇번했던 부끄러운 기억도 많지만 나름 열심히 했다. 졸업할땐 성적우수상도 받았는데, 예의 그 사람들 많은 자리는 기피하고 보는 성격탓에 학교엘 가지 않았다. 졸업식에 참석한 동기들로부터 축하전화를 받는 것으로 만족했다.


캠퍼스의 낭만따윈 즐기고 싶지도 않고, 딱히 어울리고 싶은 그룹도 없었던  재미없는 나날들.

그 즈음에 나름의 사건이 벌어졌다. 79년생 YH 선배를 짝사랑하게 된 것.


그때나 지금이나 한자에 취약한 내가 물권법 시험을 앞두고 본문의 한자를 읽기가 어려워 애를 먹고 있는데,

그걸 알게된 그 선배가 시험범위 전체에 한자 음을 달아서 내게 준 것이다. 아니, 내게 왜 이런 호의를?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작은 호의를 최대한 크게 부풀려 오해하고 결국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인 내게,

그런 걸 전혀 알 리 없었을 그는 무심하게도 툭, 책을 건네주었던 거다. 

그렇게 나름 오랫동안 이어진 짝사랑의 서막이 열리게되었다.


그는 178 cm 정도의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는데

작은 얼굴에 안경을 쓴 모습이 영락없이 똘똘이 스머프를 연상케했다. 귀여웠다. 

폴로셔츠와 폴로모자가 잘 어울렸던.

해달라는 것 다 해주고 해달라고 안해도 챙겨주면서 다정하게 굴지는 않는 츤데레.


그해 물권법 시험은 ‘당연히’ A를 받았다.


가르쳐준 나는 겨우 B인데 너는 A라고?
X나 불공평해. 니가 밥사라.


미안하지만 나는 물권법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성실했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이 원하는 답을 알았다. 꽤 친해졌을때 선배는 말해줬다. 맨 앞자리에 앉아 성실하게 수업받고 성적에 연연하는 듯한 우리 무리 (동기보다 한두살 많은 여자들 7명으로 이루어진 자발적 아웃사이더 그룹) 가 그당시엔 꽤 재수없었다고 했다.


물권법 한자 하나하나에 음을 달아준 선배의 호의를 사랑으로 받았지만 차마 밥을 사줄 용기가 없던 나는 간신히 다음 과제 핑계를 대고 그에게 메신저 아이디를 물어봤다. 그리고? 그리고 뭐, 매일밤 MSN 메신저로 대화를 나눴다(그는 당시 나보다 한두살 많은 한** 선배를 좋아하고 있었다. 꽤 오래 그녀를 미워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좋아하는 남자가 따로 있었는데 그걸 몰랐다)


우리는 밤새 메신저로 세상 친한친구처럼 대화를 나눴지만 학교에서 보면  어색했다. 

그런 애매모호하고 어정쩡한 관계를 지금애들은 ‘썸’이라 불렀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그가 처음으로 데이트 같은 데이트 신청을 했다.

놀이공원엘 가자고.

(데이트 신청 아닌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에서부터

왜 하필 내게 놀이공원을 가자는 거지,

단둘이 가는 건가

의도가 뭐지

복잡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놀이공원이 싫으면 영화를 보러 갈래?

VIP 좌석이야.


이런저런 걱정에 또 대답을 못했더니


또 튕기는거냐?


그가 물었다.


또? 라니?

그때나 지금이나 TMl 인 나는 신비감따윈 없게도 구구절절 그 복잡다단한 심경을 토로했다. 튕긴다는 오해를 받기가 죽기보다 싫었다(오해 좀 받음어때서!)

단둘이 그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건데. 자신감은 더 없었고.


그는 시간은 많으니 더 생각해보라고했다.

그러나 끝내 우리는 함께 놀이공원에 가지 못했다. 영화관에도. 


어영부영 지내다 어정쩡하게 졸업시즌이 다가왔다.

졸업 즈음에는 그의 무리와 종종 술자리를 가졌다.

그의 친구들은 내가 나타나면 그를 찾았고

내그룹에 속해있는 언니들은 그가 나타나면 나를 그곳으로 밀어넣느라 바빴다. 어색하고 뻘쭘하게.

수업을 마치고 몇번, 노래방도 가고 술도 마셨다.


무리들은 조금씩 가까워졌지만 정작 우리사이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졸업시즌이 지나 정말 졸업식날이 됐다. 

다들 거나하게 취했을때, 나는 그에게 고백했다.


좋아했어. 지금은 아니지만..

말해주고 싶었어. 이제는 아니니까..


감정이 남아있지 않아 할수있는 고백, 이라고 그에게 말했지만 

감정이 남아있어서 한 고백이었다.

다만 지난 감정이라고 해야만 자존심이 지켜질 것 같았다.


못생긴데다 자존감이 낮은 여자가 늘 그렇듯이 다가올라치면 도망가느라 급급하고 튕긴다는 오해를 받곤했지만  그냥 모든게 어색해서 피하는 건데. 좋아하는 사람이랑 영화를 보러가면 긴장한 탓에 속에서 부글부글 우르르쾅쾅 소리가 나는게 도저히 창피해서 영화를 보러가지 못했던 건데.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그가 이모든걸 알리 없었다. 


졸업 이후 잡지사 기자 막내생활을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쪼기고 울고불고 마감을 쳐내느라 

그를 까마득히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를 찾아냈다. 아마도 대학시절 베프가 알려준 모양이다.


좀 도와줄 수 있겠냐?

(나를 돕던 건 늘 그의 몫이었다)


내가? 

어떻게??


기사 좀 실어줘


그건 가능했다. 회사가 허락하는 범위내에서 그의 건설사 분양계획에 대해 지면에 글을 실어주었다  

그는 고맙다며 술을 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또 그를 피했다. 대학시절 내내 어색했던 그가 사회초년생이 되었다고 해서 어색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대체 나는 뭐하는 사람인가.....누굴 만나 연애할 생각이 있긴 한건가....)


그리고 또 훅 건너뛴 우리사이의 몇 년.

잡지가 기자 생활이 지겹고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다며 온갖 핑계를 찾아 영국 유학길에 오르게됐다.


거기서 또다시 짝사랑을 시작하게 됐는데, 

이미 나의 찌찔한 패턴을 경험해본 그는 자진해서 연애코치로 나서주었다.

매일밤 그의 코칭을 받은 덕분인지 아니면 생애 첫 보톡스 효과인지 영국에서 만난 짝사랑 상대와는 마침내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선배에게 자주 남자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며 연애 애상담을 했다. 선배는 선배에 대한 미련이 1도 안남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연애상담을 받는거라고 말했지만, 아직 미련이 있어서 그에게 시시콜콜 내 연애사를 털어놓았다는 걸 그는 끝내 몰랐다.


누구보다 좋은 코치였던 그의 덕에 나의 연애는 무사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한국에 오자마자 그부터 만났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정작 그가 숱한 된장녀들로 인해 속을 끓고 있어서 내 속을 뒤집어지게 했다.

스승이라는 인간이 고작 명품백 밝히는 여자때매 고민을 하는 꼴이라니. 


한심했고 화가났다.

대학시절 내내

나를 설레게했던 사람이 그러고 있다는 게 싫었다. 


왤케 찌질해졌어?

제발 돈쓰는 연애 때려쳐

사랑하는데 왜 돈이 그렇게나 많이 필요한건데?

다 맞추지말고 그여자와 평등하게 

동등한 선상에서 연애하면 안되는거야?


세월은 관계도 재정립시키는 모양이다.

연애를 1도 모르던 내가 그에게 연애를 코칭하고 있다니.


요즘 통 잠을 못자.

난 거의 매일밤 울어.

(당시 영국에서 만난 첫사랑과 이별하면서 울고불고했다)


불면의 밤이 괴롭다고 나를 찾아온 그는 밤새 머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지 못하고 결국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새벽에 지랄맞게도 굳이 그를 내쫒아서 집에 보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로 인해서 어설프고 어정쩡한 관계의 서막이 시작될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렇게 가버린 후에도 그와 몇번의 데이트 기회가 더 있었지만  그때마다 성실하게도 그 기회를 날려버렸다.

찌질함은 인연도 앗아간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뒤 그의 결혼소식을 들었다.

몇년뒤 그가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다 평소에도 안맞던 정치적 코드때매 심하게 논쟁하다가 아예 연락처를 없애버렸다.

내남자도 아니면서 하나하나 시비를 거는게 꼴보기싫어서 페북이며 카톡이며 전화번호까지 삭제해버렸던 것 같다.


그의 결혼이 못내 충격이었을까? 내 속내지만 나도 잘 모를때가 많다.

그렇게 흐른 십여년의 세월. 스타트업 한지평 츤데레 말투나 웃는모습 얄쌍한 뒤태를 보면서 그의 생각이 자주 난다.


잘 살고 있나?

한지평을 보니 딱 그대로 내가 좋아했던 그때 선배 모습이던데.

따뜻한 온기 감도는 포장마차에서 오돌뼈하나 올려놓고 소주한잔 하고 싶은데 그건 좀 오버겠지?



라라진처럼 내 지난 짝사랑상대에게 내가 쓴 편지가 전달된다고해도 노아같은 남친을 만날수는 없다. 대부분의 그들 모두는 결혼해서 애아빠가 되버렸으니까. 딱 한사람 다람쥐녀석 JW 만 빼고. 라라진이 부러워지는 겨울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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