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도망갔다.
소설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한다.
작가는 아버지의 자리는 희생양의 자리라고 표현했다. 즈음의 시대에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식들에게 늘 겨우 통장일 뿐이라고. 그러나 희생양의 자리를 자처한, 통장역할을 해주던 든든한 아버지가 변했다. '도망가지 않는 아버지'에서 '도망갈 수 있는 아버지'가 된 것이다. 오죽했으면,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도망쳤을까.
이하 시사인에서 발췌
박범신의 〈소금〉은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예찬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선명우가 그랬다. 회사와 가족밖에 모르는 그의 별명은 ‘통근 버스’였다. 그러던 그가 스무 살이 되는 막내딸의 생일날 종적을 감췄다. 그가 사라진 날, 퇴근길에는 눈바람이 불었다. 그는 가족이 파티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가던 중, 오르막길에 멈추어 서 있던 1톤짜리 봉고 더블캡 트럭이 도로 난간 밑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 소금 자루를 가득 실은 그 트럭은 뜨내기장수 김승민의 밥벌이 수단이자, 그의 동거녀 윤선미와 어린 딸 신애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뒷좌석을 뜯어내고 잠을 잘 수 있게 개조한 그 트럭은 ‘움직이는 집’이었다. 김승민은 멈추어 선 트럭을 살피다가 미끄러지는 트럭에 받히고,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 선명우는 자청해서 김승민의 보호자가 된다. 선명우는 트럭 뒤칸에 실린 소금 자루를 보고서 까맣게 잊었던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이다. 염부였던 아버지는 염전에서 몸을 혹사하다가 선명우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죽었다. 트럭 뒤칸에 실려 있는 소금 자루는 선명우에게 가족의 희생양이었던 아버지를 상기시키는 한편, 현재는 예전의 아버지가 있던 그 자리에 자신이 놓여 있다는 자각을 안겨준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의 자리는 희생양의 자리다. “그들에게 그는 늘 겨우 통장이었다” “가족은 차츰 그 자신을 다만 ‘통장’같이 취급했다”라는 격앙된 분노는 그 희생양이 자식들의 소비 욕망을 착실히 충족시켜주는 기계라고 말해준다. 〈소금〉에서는 아버지가 가족의 희생양이지만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어머니가 그 역할을 도맡았다. 아버지·어머니가 자식에게 희생하는 구조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엄마 아빠이기 때문에, 엄마 아빠의 사랑은 언제까지나 절대적일 것, 일방통행일 것이라고, 그들의 의견과 상관없이 오래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거역할 권리가 엄마 아빠에겐 없었다. 그들은 거역할 수 없는 천리(天理)로서의 사랑을 지녀야 했고, 자식들은 그 사랑을 일방적으로 누릴 천리로서의 권리가 있었다.” 작가는 아버지에게 천리로 부여된 부성이 오늘날에는 고작 통장을 의미할 뿐이라면서, 소비 자본주의에 의해 내파된 허울뿐인 가족이 아닌 새로운 가족의 가능성을 탐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