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은 어디쯤 있을까요?
요셉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성경 속 인물이 또 있을까?
야곱은 4명의 아내로부터 12남 1녀를 두었다. 12명의 아들들이 장차 이스라엘 12지파가 되는데 그중에서도 노년에 얻은 아들 (야곱이 사랑한 라헬이 낳은) 아들을 편애했다. (하기 가계도 참조)
야곱은 요셉에게만 귀한 채색옷을 입혔고 이에 나머지 형제들은 요셉을 질투했다.
한편으로 '꿈꾸는 요셉'으로도 유명한 요셉은 예지몽을 곧잘 꾸곤 하였는데, 어느날 형들이 모두 자기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형들에게 말했다. 이 말을 기분좋게 들었을 리 없었던 형들은 질투심에 눈이멀어 요셉을 미디안 사람(노예 무역상)에게 팔아 버린다. 아버지 야곱에게는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 미디안 사람은 애굽 바로의 신하이자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다(창 37:36)
보디발은 정직하고 똑똑한 요셉에게 자기 집과 모든 소유를 주관하게 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용모가 준수한 요셉을 마음에 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게 된다. 다만, 그가 유<아내의 유혹>을 거부하자 자존심이 상한 그녀는 오히려 요셉이 자기를 유혹했다고 남편에게 고하게 되고 결국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죄수 신분이지만 신임을 받은 요셉은 옥중 죄수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는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갔다가,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괘씸죄로 인해 감옥에 끌려가기도 하고, 마침내 총리가 되어 인생역전을 이뤄낸 인물. 그러나 우리가 요셉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언급하는 부분은
요셉은 노예의 신분에서나 감옥에서나 총리가 되어서나 한결같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지냈다는 것. 보통 사람이라면 엉엉 울고 한숨쉬고 자포자기 했을 수 있을 일들을 당했는데, 그는 의연했다. 아마도 요셉은 본인이 단련되어야 할 것(시간)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흔히 믿음이 좋다고 언급하는 성경 속인물들 중 (아브라함, 야곱, 모세) 그 누구를 막론하고 태어날때부터 '믿음의 사람'으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요셉 또한 어느날 갑자기 총리라는 지위에 덜커덕 앉혀놓은 것이 아니다. 어느 자리에나 앉게 할 때는 앉을 수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요셉의 나이 30세였다. 30세에 그가 총리자리에 앉았을때 그의 수준은 '임의로 백관을 제어하며 지혜로 장로를 교훈할 정도'로 사람을 보면 척 알게 됐다. 한두 마디의 대화에 이 일을 당신이 맡을 수 있다, 아니라는 걸 아는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뜻이다. 30살 나이에 장로들을 교훈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가 어디서 훈련받았을까? 태어날때부터 갖고 있었나? 아니다. 감옥살이에서, 처절한 그의 종살이에서 배웠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늘 형통함으로 일하시지는 않는다는것을 우리는 요셉의 인생을 통해 배워간다. 다시 말해 우리가 형통하지 않을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결국엔 평안에 이를거라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는 요셉을 그렇게 이해했다.
(이후 부터는) 하나님의 열심 중에서 <요셉>을 읽고 정리한 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선택을 대표하는 인물, 이삭은 선택된 하나님의 사람의 유업을 설명, 하나님 앞에 성화되는 것이 야곱, 요셉은 성화가 시행착오와 자잘못을 고쳐놓은 지점 이상의 성장의 자리, 영화의 자리까지 끌고 간다는 상징이다
야곱은 성화다. 성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뿌리뽑는 작업이란 뜻이다. 야곱은 그가 당한 환난가 응보가 그의 잘못으로 인한 꾸중이요 형벌이었다면 요셉은 자기 잘못없이 당한 환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다. 욥또한 마찬가지다. 욥도 까닭없이 환난을 당한다. 욥의 세 친구가 "너에게 잘못이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겠느냐 회개하라"고 하고 욥은 "나는 잘못한게 없다"고 항변한다. 이 대화의 끝은? 욥이 의롭다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사람의 잘잘못 수준 이상의 것을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때한, 깨달음이 바로 욥기으놀라운 교훈인데 이미 요셉을 통해서 이를 먼저 제시한 거다.
박영선 목사님 말씀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을 인간이 동의한 적이 없습니다. 인간을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인간의 3대 본성은 악하고 게으르고 변덕장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한숨도 없고 갈등도 없고 고민도 없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불신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까? 믿는데 더 확시니을 달라는 아우성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배고픔이 있고 살아 있기 때문에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배고픔도 느끼지 않고 갈증도 느끼지 않는 것은 죽었을 때입니다. 우리는 종종 살아있고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은 상태의 고민과 갈증, 갈등마저도 아니라고 밀어붙이는 이상하고 미련한 짓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훈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직 우리는 요셉이 앉은 총리 자리에 가 있지 않습니다. 그걸 위해 어디쯤 가고 있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서 낙타고리에 묶여 걸어가고 있는 형편인지. 아니면 보디발의 집에 가서 종노릇 하고 있는지, 아니면 세월이 좀 더 흘러서 편안하게 계시니지...그렇다면 조금 있다 감옥에 갈 것입니다. 너무들 좋아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은 요셉에다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 인생에서 축복받기보다 훨씬 고통스런 길을 걷는 사람들이 인생을 아는 법입니다. 가장 중요하게 인간을 압니다. 정말가치 있는 무언인가를 생각할 수 있는 때는 편안한 때가 아닙니다.
늘 이렇게 기도하도록 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제 맘대로 기도할 테니까 하나님 맘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길을 모릅니다. 아무도 가보지 못한 부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참으로 미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보고 무슨 기도든지 하라고 하십니다. 결재는 하나님 마음대로 하실 것이니까. 참 은혜요 축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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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믿음의 장 11장
고린도전서 사랑의 장 13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