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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Oct 18. 2021

다시보는 사도행전 4

 도망간 자리에서도 일하신다

다음은, 박영선 목사님의 <다시보는 사도행전> 챕터 11장을 읽고 요약한 글입니다.




빌립은 예루살렘 교회에 일어난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간 사람 중 하나입니다. (스데반은 멋지게 설교하고 순교했는데) 그러나 이 도망간 자리에서 두려워하고 비겁한 빌립과도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장의 놀라운 증언입니다. 스데반같아야만 하나님이 쓰시는 것이 아니라 빌립 같아도 쓰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해방되고 광야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사사시대를 보냅니다. 그기로 사울 왕을 시작으로 왕국이 됩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까지만 통일왕국이었고 이후에 남북 왕조로 분열됩니다. 북왕국은 이스라엘 열두지파중에 열개 지파가 연합해서 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가져갔고 남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 남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큰 유다 지파 이름을 따서 유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포로에서 돌아와 회복된 다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 유다라는 이름이 더 우세해졌고 우리도 오늘날까지 그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는 야곱의 나중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나중에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었다는 이름이 무슨뜻인지는 야곱이라는 이름과 야곱의 인생을 이해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의 아버지 이삭은 쌍둥이를 낳게 되었는데 쌍둥이가 태에서 서로 싸웁니다. 먼저 나와 장자가 되려고. 결국 에서가 먼저 나오고 야곱이 나중에 나옵니다. 야곱이 진겁니다. 그 싸움에서 얼마나 치열했는지 야곱이 나올때 형의 발뛰꿈치를 붙잡고 나와서 처음에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뜻으로 야곱이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그 뜻은 이스라엘 사람들, 히브리인들에게는 '속이는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이름대로 기만적이고 배신하고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인생을 대표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이 야곱이 천사와 겨루어 울며 간구합니다. 창세기 32장에 나타난 얍복나루 사건인데 이 사건은 야곱이 장자가 가지는 축복권을 얻기 위해 형을 속여 팥죽 한그릇에 장자권을 빼앗은 사건과 아버지를 속여 형대신 축복을 받은 것으로 인해 형의 미움을 받아 고향집을 떠나 하란에 있는 외삼촌 집으로 가는 일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방법대로, 자신의 생각대로, 세상의 조건대로 확보하려던 인생, 그것이 야곱입니다. 


외삼촌 집에 가서 거부가 되지만 그 일로 서로 반목하게 되어 더이상 거기서 살수없게되어 돌아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십년이 지났어도 형이 여전히 칼을 기다리고 있다는걸 알게 됩니다. 그래서 고향근처 얍복 나루터에서 모든 소유물을 앞서 보내고 전전긍긍하며 밤을 새우는데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와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항복을 야곱이 거절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게 해서 동이 트자 하나님의 그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꺾으시고 <나는 그만 가겠다, 나는 이제 너를 버리겠다> 하는 의미로 떠나겠다고 하자 비로소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수 없습니다>하면서 울며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뭐냐" "나는 야곱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의 의도는 진짜이름을 몰라서가 아니라 니 이름의 의미는 뭐냐. 너는 약탈자다. 네가 필요한 것을 언제나 네 손으로 얻었던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왜 나에게 축복을 달라 하느냐. 힐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답 <저는 야곱입니다> 하는 고백 속에는 "저는 두손 들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제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겠습니다"하는 고백이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주시는 겁니다. 

창세기 28장에 하나님은 얍복 나루터 이전에 벧엘에서 이미 야곱을 만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하고 야곱에고 복을 주기로 약속한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자기 길을 스스로 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심, 긍휼, 사랑으로 야곱과 의논하지 않고 약속을 축복을 그에게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야곱이 이것을 받아들이는데 이십년이 걸립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바로 이것을 근거로 하여 성립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때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엘리야 이런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훌륭해져야 복음이 가능한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책이 많습니다. 늘 자책합니다. 아버지와 자녀 관계는 유능함과 무능함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관계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우리는 스데반이 아닙니다. 우리는 빌립입니다. 우리는 야곱같이 우리의 연약함과 비겁함에 늘 휘둘리는 자이지만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못난 선택, 못난 현실, 실패같은 것들이 우리를 흔들 수 없는 자라고 사도행전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시대 모든 기독교 신앙인이 사는 자기 시대의 자기라는 자리는 다 사도행전의 연속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스데반으로도 부르실 것이요 빌립으로도 부르실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을 벧엘에서 주셨습니다. 얍복에서 준것이아닙니다. 울며 간구해서 준것이 아니라 도망가고 생각없는 야곱에게 주셨습니다. 


Q. 여러분의 실제 현실이 겁나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겁나게 합니까? 어떤 명분 어떤 자랑이 여러분을 겁먹게 해서 스스로 입을 닫고 자기 생을 살지 못하고 그저 남을 기웃거리고 큰소리치는 사람 앞에서 꼼짝 못하게 합니까? 





야곱의 눈물, 간구는 뭐였겠습니까? 자신을 돌아보고 실체를 안 탄식이요 회개였을 것입니다. 야곱이 망친 모든 실패와 배신과 좌절과 그 기만과 절망 눈물과 탄식의 자리를 따라 들어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만나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하란으로 가고 있을까요, 얍복나루에 있을까요? 벧엘에서 먼저 나타나셨고 약속하신 것 같이 하나님은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우리를 만나고 약속하신 분입니다. 


여호와란 이름은 스스로 있는자의 히브리식 발음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란 하나님이시기를 잠시도 멈추지 않는분, 우리에게 의존하거나 우리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분입니다. 


빌립을 존경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귀한 줄 아십시오. 유명해지고 능력이 많은 것은 신앙세계에서 사람을 채점하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에 만족하는 것,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은 언제나 모든 일에 믿음을 가지고 자신할 수 있는 자로 살게 되었음을 기뻐하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놓치지 않는 여러분들 되십시오. 

*스데반: 하나님 역사를 전하다, 돌로 쳐죽임을 당함 최초의 순교자




질문에 대한 답변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Jennifer's tip 

[북왕조]

에브라임은 북왕조 열지파 중 우두머리 역할을 했던 지파. 


[지역에 대한 이해]

사마리아는 북 이스라엘의 수도, 북왕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왕조 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함(하나님께 불순종). 나중에 남왕조 유다는 바벨론에서 귀환하는데 북왕조 이스라엘은 회복이 안되고 유다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된다. 그때 회복된 이스라엘이 사마리아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동족으로 취급하기를 거부함. 혼혈이라고해서 이방인과 똑같이 외면하고 차별. 사마이라를 지나서 북쪽으로 갈일이 있으면 사마리아를 밟지 않으려고 옆지방으로 돌아다닐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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