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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Feb 03. 2022

설 명절 후의 회개


올해 들어 처음으로 오프라인 예배를 갔다. 오랜만에 제대로 드리는 예배라서인지 은혜가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고 회개에 관한 말씀을 해주셔서 그랬는지 몇가지 회개할 일들이 떠올랐다.


수많은 회개거리중 하나는 그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해결했다. 이전 교회 목사님을 찾아뵙는 미션이었다.


당시에 교회를 떠난 것은 내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다만 공교롭게도 그 시기에 목사님과 오랜 기간 함께했던 청년 서넛, 부목사님, 찬양전도사님, 권사님들이 한꺼번에 교회를 그만두게 되었던 터라 마음 한켠 죄송한 생각이 많았다. 다들 나름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 시기에 나까지 교회를 떠난 것에 대해서는 내내 죄송한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이 스스로 목회생활을 반추해볼때 이 일이 큰 상심이 될수도  있겠단 생각이 드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10년간 매주 주일을 함께 보내준 권사님, 집사님, 장로님들이 그립기도 해서 무작정 홍삼을 들고 찾아갔다. 주일 낮 열두시는 무조건 교회에 계실 시간이라 따로 연락을 드리지 않았는데,

역시나 권사님과 목사님이 계셨다.


'언제든지 미리 전화하고 놀러와'


기대했던대로 목사님은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아주셨다. 물론, 이렇게 한번 찾아뵌 것으로 내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나, 감사한 마음과 사죄하는 마음을 무겁게 들고 찾아간 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주신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가져봤다.


‘내가 잘못한 건 아니야’ 라고 생각했던 일들 중에서도 문득문득 상처받은 상대방의 마음이 전해질때가 있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이 예배 통해 주시는거라 생각하고 그때 그때 용기있게 사과를 건네고 용서를 구하는 편이다. 그런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이들도 간혹, 더러 있다. 그럴땐 어쩔수 없다, 고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고, 상대방의 반응은 상대방의 자유니까.

깨달음의 시간도 서로 다르기에, 재촉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회개의 복 <마태복음 3:1-3>
_ 양평 중앙교회, 성결교회_

회개는 잘못된 것을 뉘우치고/ 뜯어고치는 것.

눈물,콧물 쏟으며 회개하고 또 반복하는 이유는? 뉘우치기만하고 고치지 않아서다.
죄를 정당화해서는 안된다. 잘못된 것은 용서를 구하고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사건을 통해 빨리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을 구별할 수 있게 지혜를 주신다.

저차원의 회개는 깨닫기만 하는 것이다. 이미 죄를 짓고 피해를 주고 상처주고 나서 하는 회개다.
중차원의 회개는 더 잘할 수 있었는데 더더 잘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는 것.

믿는 사람들은 겉과 속이 한결같아야 한다. 이런 삶을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말씀 들려주신다.
죄인줄 모르고 살았던 것들 들추고 깨닫게 하신다.잘못된 것을 알고도 깨닫지 않으면 안된다.


설명절 전주 목사님 설교 중에

 <나 한사람으로 주님 영접하게 할 수 있는 명절 보내라>는 부분이었는데

예배당을 나오면서 설날에 내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단도리를 했었다.

그런데, 연휴의 마지막날.

예배당을 나오면서 했던 다짐을 무색하게 하는 일이 발생했다.


심부름 잘 하지 않는다고 조카들에게 화를 낸 것.

늘 심부름을 안하던 아이들이었으니 왜 오늘따라 이모가 저럴까 싶었을텐데

어른들끼리 아둥바둥 바쁜데 도와주지 않고 게임만 하는 애들에게 화가 났던 것 같다.

이글을 쓰며 다시 그 상황을 복기하는데 애들은 잘못이 없다.

애시당초 애들은 먹지도 않는 굴을 구워서 먹느라 바쁜것도 어른들이고

컵라면을 추가로 먹으려고 주방을 왔다갔다 한것도 어른들의 일이니!

애들은 자기들끼리 오랜만에 명절에 모여 게임을 했을 뿐이다.


근데 나는 그 게임을 방해하는 심부름을 시키면서

거기에 왜 또 화까지 버럭냈을까?


시윤이가 이모 미안해, 라는 문자를 보내줬다.

이모가 속좁게 화내서 더 미안해, 라고 답장을 보냈다.


속좁지 않고 화내지 않는 이모로 이번 추석에는, 내년 설날에는 포지셔닝을 잘해봐야겠다.

어차피 어려울수도 있지만, 그래도 도전은 해봐야하겠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조카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의 평안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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