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내가 나를 토닥토닥>을 읽다가 느낀 것들
그 사람의 글을 다 읽기도 전에 좋아요, 를 누르게 되고
그 사람이 소개하는 건 #어머이건사야해 하면서 사게되는 그런 사람이 다들 한두사람쯤은 있을거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인플루언서라고 부르는데, 내게도 내게 영향을 주는 인플루언서가 몇 있다.
이를테면 '그'같은 사람.
내게 그는 인플루언서다. 팔로워가 고작 261 명이지만 그의 글이, 생각이, 나에게 충분한 영향을 주고 있으니, 인플루언서라 불러도 좋겠다. 2주 전엔가, 3주 전엔가 어느날 그의 SNS에 시집 한권이 올라왔다.
<내가 나를 토닥토닥> 이라는 시집.
무릇 시라는 건, 찬찬히 시인의 마음과 시를 쓰게 된 배경을 떠올리며 한구절 한구절 음미하듯 읽어야하는데 성질급한 나는 번갯불에 콩볶듯이 서문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빠르게, 엄청 빠르게 읽어내려갔다.
일단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다음에야 다시 처음부터 찬찬히 음미할 수 있는 그런 타입이랄까.
시집은, 과연...
서너편의 시는 기어코 나를 울렸다.
시도 시지만, 시인의 서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저런 마음으로 시를 쓴다면, 그 시가 좋지 않을 수가 없겠다 싶었는데 시가 역시 시인의 다짐대로 쓰여져있었다.
저런 마음이란, 쉬운시를 쓰고 싶었다는 시인의 마음이다.
비유나 상징이 너무 멀리가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대체가 난해한 시를 쓰지는 않겠다는 마음.
짧되, (남들과는 혹은 종전의 것들과는) 다른 시를 쓰고 싶었다는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렇게 쓴 시를 인스타그램에 올리며 사람들과 함께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그래도 책을 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어서 시집을 엮었다는 시인의 서문이 그 사람의 성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 좋았다.
그리고 결국, 그녀 때문에 산 시집 한권이 오늘 내 마음을 이렇게나 어루만져 줄줄은, 이 책을 주문했던 그 시점엔 미처 몰랐다는 거다.
편애하는 구절
꽃은 제 속을
다 채우지 않고
피어난다
나비와 벌이
앉을자리
넉넉히 비워두고
피어난다
누군가 다가오면
넉넉히 내어 줄 자리
있을까, 내 마음엔
코끼리는
헤엄을 잘 치는 물고기를 바라보면서도
강물에 뛰어들지 않는다
하루살이는
거북이가 오래 산다는 소문을 들어도
거북이를 찾지 않는다
나무는
걷지 못해도 뿌리를 깎아서
다리를 만들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은
나도 너처럼 누군가에게
몹시 시끄러운 사람이겠지만
나도 너처럼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일거야
나도 너처럼 아주 짧은 삶을 살아가고 있을거야
나도 너처럼 지금이 한때일꺼야
똑_똑_똑
깊은 산속 바위틈 물소리
한방울 또 한방울
저소리를 내기 위해
얼마나 깊고 어두운 길을 헤쳐왔을까
그래야 맑아지나보다
수많은 만남과 수많은 이별 속에서
웃고 사랑하며
울고 슬퍼해야만
비로소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나보다
에필로그
갑작스럽게 서울에 올라온 중2 조카를 만나 오랜만에 서점에 갔다가 시집 한권을 '더' 샀다.
사긴 샀는데 읽지는 못했다. 이 시집을 사자마자,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작은 메모하나를 곁들여, 다시 빈 사무실로 돌아가 그 사람 자리에 두고 나왔다.
내 마음이 사그러들기전에 오늘. 지금, 당장.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만 오늘 밤은 어떡하나요>라는 시집이었는데, 책 안을 훑어봤을 때 맘에 드는 구절들이 많았는데, 맘에 들어했으면 좋겠다. 다 읽은 책을 선물해야 탈이 없는데 좀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피드백을 기다려봐야겠다.
그나저나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데
나는 왜 때아닌 시를 읽고 있는거지?
하기사, 시를 읽어야 하는 때라는게 정해진 건 아니니까.
참 이상한 일이다.
나이가 들면 꽃이 좋아진다는데
해마다 소동파가 그러했다고 하듯이, 나이가 들면 봄이 지나는 것이 서러워지는데
이제 심지어
나이가 드니 시를 읽어도 눈물이 난다.
좋은 시라 그러겠지.
좋은 시라 그런걸꺼야.
<연애시대> 리히치로처럼, 나라는 인간도 체액이 남아 도는 모양이다.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