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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 된 너에게

Letters to Juliet

by 책읽는 헤드헌터



마흔이다. 친구야. 우리가 벌써.

여전히 스무살 시절의 철없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흰머리 가득하고, 배 나오고, 이제 각자의 자리에서 어느정도 무게감이 느껴지는 자리에 있는 마흔.

근데, 우리 40년이나 살았는데 사실상, 기억에 남는 해가 별로 없다.

가만 보자. 특별한 해가 대여섯 손가락 안에 꼽히려나?



1990년,

니가 코스모스길 따라 오라는 나의 개떡 같은 설명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우리집까지 무사히 놀러와준 그해 여름 잔상이 오래도록 남더라.


2000년,

우리 큰조카 윤콩이 태어난 해. 밥주면 밥먹고, 자장가 불러주면 자고 하던 그 쪼꼬미가 이렇게 말 안듣는 스무살이 될줄, 어찌 알았겠니. 우리 엄마도 나를 키우며 이런 심정이었을까?
자식도 아닌데 얘때매 속 썩는 날들이 많다;;;


2003년,

울 아빠 돌아가신 해. 올해 아빠 17주기야. 벌써 17년이라니.
아빠 없는 나날이 그렇게 오래되었는지 몰랐어. 칭구야.


2007년,

사랑의 달콤함과 이별의 처절함을 처음 알았다고 해야하나. 풉!
그래도 이때 영국에 안갔음 어쩔뻔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에게 고백한 최초의 사건이었지.
다시 오지 않을 ㅋㅋㅋㅋㅋㅋ


2010년,

우리엄마 뇌경색으로 쓰러진 해.


2014년,

지금 회사 입사


너도 그렇겠지? 배우자를 만난 해. 아마도 2000년. 결혼하고 딸랑구를 낳은해 2014년.

너의 소중한 가족을 둘러싼 굵직한 일들이 있었던 때가 기억에 남을거야.

어찌보면, 기억나지 않고 지나간 평범한 해에 더 감사했어야 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드네. 특별한 네잎클로버를 찾으려다 세잎클로버의 소중함을 놓치는? ㅎㅎ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칭구야 기억나? 왜, <연애시대>에서 그랬잖아.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란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거다.


기억력 안 좋은데도 그 대사에서 연애가, 어른들의 장래희망(꿈), 같다고 한 게 오래도록 기억나.

나는 지난 10년간 당췌 가슴 설레게 하는 연애 같은게 하나도 없었어.

진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단 한 건의 썸도 없었어. 물론 소개팅도 했고 간혹 애프터도 있었지만....

내 마음이 움직이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어. 심장이 뛰고 혈액을 신체기관 곳곳에 날라주면서 제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내가 정말 살아있나, 싶을 정도로 아무일 없었던 지난 시간들.

그래서 그런가. 요즘 자주 ‘진짜 살아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

진짜 살아있는 게 뭘까?


작년 말에는 회사에 우리팀으로 인해 발생한 큰 일이 있어서, 아침마다 회사 가는 게 끔찍하게도 싫었어.

살아있다는 느낌 보다는 끌려가고, 하루를 버틴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러다 보니 도망치고 싶더라.

그러다 문득, 내가 이렇게 아침 출근이 끔찍하게 싫은데 우리 팀원들은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어. 매일 아침 의무감으로라도 즐겁게 가려고 노력하고 있어.

그렇게 생각하고 노력하다보니, 또, 다행히, 일에 몰입하게 되더라.

바빠지니까 딴 생각도 안하고, 일이 다시 또 즐거워지는 것도 같고.


친구야. 나는 요렇게 지내는데 너는 어때?

나이가 들었다는 건 아직 잘 실감이 안나는데

일주일에 서너번 혹은 거의 매일같이 보던 너를 이제는 1년에 몇번 (친구들 생일과 니 생일 혹은 우울한 어느날) 겨우 보게 되는 것으로 절실하게, 니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았구나, 정말 어른이 됐구나, 라는걸 깨닫곤 한다.

우리가 이렇게 자주 못볼줄은 몰랐는데.

어른이란 그런건가? 친구보다는 가정에서 가족을 돌봐야 하는 사람?

오랜만에 일기장을 꺼내 끄적이다보니 니 생각이 났다.


‘십년 후면 쉰이다’라고, 너에게 또 편지를 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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