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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is Jul 08. 2020

부대찌개, 그래도 이야기 할 수 있는 소울푸드

소울푸드(Soul Food)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는 지금, 오히려 이 단어는 우리에게는 조금 맞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위키피디아가 언제나 정답은 아니지만,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미국남부 흑인(노예제도 하)들의 음식을 지칭한다는 것이 정설이며, 개념이 확대돼 이제는 미국 남부 음식을 지칭한다고 한다. 매일경제 신문은 아예, 주인들이 먹다 남은 부위를 요리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개념에서 주인이 먹다 남긴(?!) 재료로 요리해서 만들일은 없겠으나 그만큼 애잔함이 담긴 음식인지라, 따뜻하고 고향 생각나는 음식 정도의 개념에 소울푸드를 넣어 지칭하는 것이 맞는 말일지 나조차도 고민되는 지점인 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이 정도라면 소울푸드라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요리가 하나 있으니, 바로 부대찌개다. 


넓은 냄비에 햄을 넣는다. 짜고 건강해보이지 않는 햄으로. 스팸도 들어가고, 옆부위가 퀼팅된 김밥햄도 들어가고, 밀가루가 잔뜩 함유되어 말간 단면을 자랑하는 소시지랑 얇디 얇게 썬 적갈색의 페페로니를 닮은 짜디짠 소시지도 들어간다. 육수와 함께 장식에 가까운 쑥갓, 떡국떡에 듬석듬성 썰어진 얆은 어묵까지. 이후에는 시디 신 김치와 두부 약간, 당면 한 움큼과 알 수 없는 빨간 양념장에 별미로 라면사리 하나 넣고 팔팔 끓이면, 누가봐도 이국적이고 희안한 김치 소시지-햄 스튜가 되는 것이다. 

투입한지 이 분 정도 흘렀을 때 채 익지도 않은 라면부터 훌훌 불어 먹는다. 소시지는 나머지 건더기와 함께 적당히 넒은 그릇에 옮겨 밥과 함께 비벼 먹는다. 김치의 달면서도 신맛, 그리고 아마도 양념에서 나오는 미세하게 탄맛과 마늘맛이 혀를 아리게 만든다. 스팸은 퉁퉁불어 켜켜이 국물을 머금고 있으며 소시지는 적당히 불어 탱글하기까지 하다. 당면은 이로 끊었을 때 적당한 탄력이 느껴지는데 밥알과 엉켜 계속 씹고 싶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후후 불어가며 정신없이 먹다보면 사시사철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어떤 식당은 라면 사리 무제한 서비스를 내걸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 내가 폭주할 확률은 무한대: 라면 2~3개도 쉽게 먹게 된다.


이전 회사 동료들은 내가 긴장하거나 날카로워 보이면 회사 앞 부대찌개 집으로 데려갔다. 라면과 육수 무제한 제공 식당에 앉아 재빨리 끓는 라면을 밥위에 얹어주곤 했다. "자~자~ 일단 먹고 이야기 해요!"

단순한 건지, 아니면 그냥 풀리려 그랬던건지는 몰라도 식당을 나설 때가 되면 한 옥타프 높아진 목소리로 동료들에게 말하게 된다. "아이스크림 먹을까?" 그러니 다음번에도 데려가지. 


햄과 김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맥박이 뛰고 미소가 나는 것은, 아마도 부대찌개를 먹었을 때마다 기분 좋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동료들과 점심 때 땀 뻘뻘흘리며 라면을 흡입했던 경험. 회사 이야기하다 "야, 야, 좋은 시간에 쓸데 없는 이야기 하지마!"라고 말하며 웃어넘기던 기억. 한 숟가락에 소주 한 잔 마셔가며 불콰한 뺨을 부여잡던 기억. 친구들과 배터지게 먹고 단 거 땡긴다고 케이크 집 찾아나서던 기억. 


그러나 부대찌개가 위키피디아나 문화사적으로 소울푸드에 부합하는건, 내 추억보다는 아빠의 기억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난 절대 부대찌개 안먹어," 아빠가 말하신 적이 있다. "어려웠을 때 생각이 나. 들어간 게 소시지에 어묵에 김치라니. 거기다 라면은 왜? 몸에도 안좋고 안먹어." 엄마도 거드신다. "짜기만 하고 영양가가 있는지 좀 따져봐야 될 것 같아."


하긴, 49년 생인 아빠에게 부대찌개는 나처럼 재미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군대에서 라면만 주구장창 보급해 지금까지도 라면이라면 진절머리가 난다는 아빠에게는, 비록 본인이 개발하지도 않았고 자주 드셨을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햄과 소시지를 남아있는 김치와 같이 끓였다는 부대찌개가 절대 알고 싶지 않은 음식일 수도 있다. 햄과 소시지는 아마 할머니 세대에는 다소 생경한 재료였기 때문에 할머니가 해주셨을 것 같지도 않아, 딱히 엄마의 손맛이 남겨진 지점에 있는 그리운 음식도 아닐 것이다. 

요즘이야 서양사람들에게도 매우 이색적인 경험으로 남아있다고는 하지만, 김치와 소시지랑 햄을 끓여 대로는 치즈까지 얹어나오는 이 찌개가 조합적으로 맛있게 상상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너무나 창의적인 사업을 하셨던 할아버지의 사업빚 때문에 도망다니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했던 그 어려웠던 시절을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음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코로나19로 인해 현실적으로 부대찌개 식당을 찾아가기 어려운 기대가 되었다. 이마트를 지나가다 부대찌개 양념을 보고 집어들었다. 사골육수(HMR), 스팸과 후랑크소시지, 어묵과 당면, 라면과 두부, 그리고 미나리를 같이 장바구니에 넣었다. 


집에 와서 모두 한 데에 넣고 보글보글 끓여댔다. "이게 뭐야?" 저녁준비 시간이 돼 오늘도 메뉴에 고민하던 엄마가 말씀하셨다. 

"부대찌개." 

엄마는 가볍게 인상을 쓰신다. 그러나 금요일 저녁, 본인이 하지 않은 음식을 먹고 싶다는 욕구가 압승한듯 하다. "여보, 오늘 저녁은 딸이 끓여준 부대찌개에요."


세명이 둘러앉아 한 국자씩 찌개를 옮겨담는다. 양념에서 훈제향이 나고 너무 달지 않아 오히려 맛있다. 좋아하는 스팸과 떡을 듬뿍 넣었더니 국물이 자박하고 다소 끈끈한 것까지 내 취향이다. 엄마 아빠에게 얼마나 맛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땀 흘리며 일단 한 그릇을 비운다. 

"어때 어때?"

아빠의 눈끝이 살며시 물결친다. "우리 딸 먹는거 보니까 맛있네. 앞으로도 자주 해먹어야겠네." 


부모님이 정말 자주 해드실지는 모르겠다. 내가 하면 드시는 정도 일지도. 

그러나, 오늘 한국의 소울푸드가 식탁에 올라와 웃음짓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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