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옮김
오랜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미국에서 마음을 열게 된 유일한 친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우연히 만나게 된 아이인데, 우린 참 많이 다르면서도 같았다. 다름이 주는 흥미로움과 같음이 주는 안정감속에서 우린 많은 시간을 함께 했다. 가끔 답답할 땐 맥주 6캔을 사들고, 그 아이의 자취방으로 이어지는 나무 계단에 앉아서 떠들곤 했다. 차갑고 톡 쏘는 것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마다, 잡생각을 밀어내고 그 시원함만을 온전히 느끼게 해주는 친구의 존재가 참 고맙고 든든했다.
그 아이는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남들이라면 투정 부릴법한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해야 할 일들을 척척 해나가는 단단한 아이다. 다리를 절으면서도 아르바이트 한 번을 빠지지 않았고, 학비와 생활비를 그 어린 시절부터 혼자 감당해온 성실한 아이였다. 자기에게 주어진 몫이라면 군말않고 실행에 나서는 말이 없는 아이였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쪽잠을 자도, 오전 6시만 되면 병원 문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던 신기한 내 친구. 완벽하진 않아도 해야 할 모든 것들을 불평 없이 해내는 멋있는 내 친구.
그런 그가 보낸 문자는,
"이상한 질문인데, 내 최대 단점은 뭐야?"였다.
곰곰이 생각했다.
이렇게 멋있는 내 친구의 최대 단점, 허점, 없애야 할 점은 무엇일까. 오랜 고민 끝에 답장을 보냈다.
"글쎄. 너무 현실적인 거? 근데 사실 이것도 딱히 단점은 아니야."
주파수가 딱 들어맞을 때,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토론을 즐겼다. 외계인이 정말 있을까, 미국이 그 옛날 정말 달에 착륙했나부터 시작해서 종교의 신빙성과 낙태의 합법화까지 다양한 소재의 대화를 나눴다. 그러니, 그의 이상한 질문이 '현실적인 삶'에 대한 탐구의 촉매제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우린 간만에 오랜 대화를 나눴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내 친구는 현실적인 편에 속했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자신을 볼 수 있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불평을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의 의미를 피부로 느꼈기에 그 아이는 입을 굳게 닫았다. 자신의 현실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지 현실적으로 직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무사히 졸업을 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을 하고, 꿈에 그리던 검은색 아우디를 끄는 꽤나 성공적인 성인이 되었다.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그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듯했다.
그런 그를 볼 때면 대단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가끔 장을 볼 때면 그의 것도 사서 가져다주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젠 이 아이의 아우디를 타고 이 아이가 사주는 밥을 먹고 있었다. 아직 제자리인 것만 같은 내가 부끄러워서 침울해지기도 했지만, 그의 성공만큼은 나의 시각이 아닌, 그의 시각으로 바라봐야 했다. 그동안의 노력을 옆에서 봐왔으므로, 그 고된 시간들을 고작 나의 작은 질투로 얼버무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했다. 진심 어린 축하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그는 내 어리석은 질투조차 눌러버릴 정도의 멋있는 아이였다.
"현실적인 게 어떻게 단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거야?" 그가 물었다.
현실적으로 자신과 상황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강력한 힘을 지닌다. 열망하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현재의 내 위치를 현실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만큼 완벽한 출발점은 없기 때문이다. 내 주위 환경을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삶에 대한 방어가 가능하고 안정적인 삶이 보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인 게 대부분의 경우 좋게 작용할 순 있어도, 너무 현실적인 성향은 사람의 내면을 척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을 과도하게 현실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현실'이라 인지되는 외의 것들을 배척할 수도 있고, 선을 긋기 시작하고, 현실에 맞춰서 내 삶의 기준을 낮출 수도 있다. 현실은 주로 무겁고 차갑기 때문에, 꿈을 찾기도 전에 현실에 억눌려 보수적인 선택을 고수할 수 있다고 했다. 안정적인 삶도 좋지만, 자칫하면 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물론, 삶의 기준을 낮춘다는 것은 상대적인 의미이다. 모든 사람이 항상 위대한 무언의 꿈을 좇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면서 매일의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삶이다. 그러나 내 친구는 그런 부류가 되지못했고, 그의 내면은 조금씩 척박해지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확하다며 그가 공감을 표했다. 해야 할 것,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전부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고 했다. 오랫동안 현실만을 바라본 그에게 이상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네 내면의 아이를 죽이지 마. 현실을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해서 그 현실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가 말했다. "안 그래도 너 덕분에 그 아이를 조금씩 내놓으려 하고 있었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나는 이상적인 편에 속한다고 그가 말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현재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주변 상황을 예민하게 인지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아이와는 달랐다. 현실을 직시하면 할수록, 마음속엔 거품처럼 이상을 향한 욕심이 들끓었다. 내 머릿속에서만 떠도는 이상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 건지, 내 입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상을 떠들어댔다. 그러나 세상에 나온 이상은 현실을 마주칠 때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증발해버렸다. 입을 통해 태어난 이상은 현실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그때마다 형체 없는 괴리감을 느끼곤 했다. 행동으로 옮겨져야 했기에 느리지만 주춤주춤 나아갔다. 어쨌든 현실에서 날 움직이게 한 것은 이상이었다. 나를 삐끗하게 하는 것도, 일으키는 것도 이상이었다.
20대 초반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친구이기에 그는, 잠시 세상에 나오고 사라진 내 이상을 가장 많이 경험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가 말하기를, 나는 꿈이 거대하다. 많은 정성과 노력을 오랜 시간 들여야 하는 이상을 꿈꾼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하루아침에 이루고 싶어 해서 조급해하고 괴로워한다. 그의 말을 부인할 수 없었다. 꿈을 이루는 과정조차 이상적이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했는지, 나는 매 순간 초조하고 조급했다. 이상을 현실로 가져오는 과정의 단계는 아직 현실에 속해있어서 그에 맞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내 눈과 마음은 이상에 머물렀다. 그래서 그 과정이 무척이나 고단했다. 아직 이상의 십 분의 일도 채 이루지 못했는데 힘이 부쳤다.
그럴 때마다 그가 큰 힘이 되어주곤 했었다. 그의 우직한 행동과 꾸밈없는 성실한 태도는 자주 나를 잡아주었다. 현실에서의 노력은 저렇게 하는 거라며 고개를 끄덕일 때 나의 초조함도 사라졌었다. 당시에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보고 배운 것이 많았다.
그가 같은 이야기를 해왔다. 그가 불안정하게 붕 떠있는 나를 잡아주었을 때, 나는 앞만 바라보던 그에게 하늘을 보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현실적인 그에게는 이상이 필요했고 이상적인 나에게는 현실이 필요했다. 나는 그를 통해 현실을 보았고 그는 나를 통해 이상을 보았다. 이렇게 전혀 다른 성질의 것들은 물과 기름처럼 나뉘거나 자석의 양극처럼 딱 붙는, 둘 중 하나의 운명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이상과 현실이 완벽히 나뉘거나, 이상이 현실이 되어버리거나, 현실이 이상을 압도하거나. 현실과 이상을 떠올릴 때 내 머릿속은 흑과 백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성향의 그와 나는 완벽하게 공존했다.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나의 이상은 그의 현실을, 그의 현실은 나의 이상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그런 그와 나를 보고 현실과 이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 사이의 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의 미학에 대해 생각했다.
<적당한 거리의 미학>
닿지 않는 먼 우주에 있기에
따스한 빛을 낼 수 있는 태양처럼
콧망울에 닿을 듯 말 듯
손에 들려진 꽃이 그제서야
화려한 향을 내뿜는 것처럼
어떤 것들은 멀리 있을 때
어떤 것들은 가까울 때
그것만의 온전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그러니 거리를 두는 것에
두려운 마음은 접어두어도 괜찮다.
마음이 따뜻할 정도의 거리
은은한 향에 닿을 수 있는 정도의 거리
딱 그 정도면 충분하다.
해는 멀어서
꽃은 가까워서
따스한 햇살과
바람에 밀려온 꽃 향이 완벽한
오늘은 날이 참 좋다.
인간관계를 주제로 쓴 오래된 시이지만, 어쩌면 현실과 이상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한 거리의 이상은 그에게 고개를 들어 해를 보게 했고, 적당한 거리의 현실은 나에게 땅의 꽃을 보게 했다. 고작 시선 하나 옮긴 것뿐인데 우리는 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딘가에 놓여졌다. 현실도 아니고 이상도 아닌, 불투명한 시공간이었다. 어쩌면 이게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과 이상의 온전한 아름다움은, 어쩌면 그 사이에 있어야만 만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어느 것에도 머물지 않고, 그 사이를 맴도는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스스로 선택할 때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 말이다.
사실 나는 아직 그 아름다움의 형체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현실과 이상의 사이를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상과 가까운 곳에서, 그는 현실과 가까운 곳에서. 우리는 조금씩 시선을 옮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