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제자리 찾기
드라마나 영화의 주연은 꽤나 특별한 자리이다. 주연을 중심으로 스토리 전개가 시작되고, 주연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주연이 느끼는 감정과 모든 것들이 그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초점 때문에 다른 것들은 희미해져 감을 느끼기 쉽다. 오래된 영화를 떠올리면, 다른 것들은 기억나지 않아도 주인공의 얼굴과 감정선은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주연의 자리는 막강한 힘을 가진다.
그런데 난 어느 순간부터 조연들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주인공만이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들을 보고 나면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작품들에서 주연들은 엄청난 고난을 겪으면서도 결국에는 자기 꿈을 이루고 주변에는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게 웃음 짓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조연들은 어떠한가.
임의로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일지라도 그들도 자기 삶의 주연일 텐데, 그들의 삶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인 듯, 짧고 가볍기만 하다. 창작물인걸 알면서도 짧고 가벼운 그들의 순간을 회상할 때면 나에게 남는 것은 길고 무거운 착잡함이었다. 알수 없는 찝찝함이 몸을 감싸는 기분.
이와 관련해서 내가 자주 생각하고 곱씹는 이야기가 성경에 실려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기 전, 세상을 군림할 왕이 태어날 것을 인지한 동방박사들이 별을 길잡이 삼아 하나님의 탄생을 축복하러 길을 떠난다. 이를 알게 된 헤롯왕은 위협을 느끼고 근방의 모든 아기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그날 밤, 하나님의 아버지인 요셉의 꿈에 천사가 나타나 이들을 운명적으로 대피시킨다. 그렇게 하나님은 안전하게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끝이 난다. 그리고 사람들이 집중하는 것도 "예수님과 천사들의 보살핌을 받아 못된 왕을 피해 안전하게 세상에 나오신 하나님." 이 이야기의 주연은 하나님이기에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에 대한 찬양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조연들은 억울하게 살해된 갓난아기들이다. 그래서 기독교 신자인데도 불구하고 나는 찬양보다는 분노가 앞섰다. 잔인하게 희생된 아이의 수는 많게는 만 명, 적게는 몇십 명으로 추정된다. 수에 상관없이 나는 단 한 명의 아기여도 똑같은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성경에 아주 작은 한 부분만을 차지하고 죽어버린 조연들이 내 마음에 남았다.
왜 이렇게 난 주연이 아닌 조연들에게 눈이 가는 걸까 곱씹어보니, 답은 간단했다.
나에게는 조연의 위치가 더 익숙했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조금 더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내 삶에서도 주연이 되지 못했다. 하루 온종일을 똑같은 몸에 갇혀 몇십 년을 살면서 매일 거울을 통해 보는 나 자신이지만, 세월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면서, 나는 내 삶의 주연의 자리를 스스로 포기한 듯싶었다. 한참을 휘청거리고 나서야 돌아보니 나는 누군가의 스포트라이트 뒤의 그늘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내 이름 석자를 건 내 삶의 영화에서의 주연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주기 일수였다. 스쳐 지나가는 행인 1에게 온갖 스포트라이트를 주고, 그것도 모자라 끊임없이 재방송을 돌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나였다. 그렇게 나는 주연으로서 누릴 수 있었던 안정감, 무게감, 행복의 시간을 꽤 많이 스스로 낭비해버리고 나서야 알았다. 내 삶에서 나의 위치를.
내 삶의 주연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강력한 단서를 하나 꼽자면 그것은 "묵묵히 나만의 길을 걷지 못한다는 것" 일 것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의도치 않게 영화의 첫 슬레이트를 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마지막 장면을 보게 된다. 그렇게 내 삶에 출연했었던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검은 바탕의 잔잔한 음악을 배경 삼아 크레디트처럼 줄줄이 나열되고 영화는 끝난다. 허구의 세계인 영화에서도 주인공 한 명의 삶에 관여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실제 우리 삶에서 크레디트를 만든다 치면 책 한 권은 나올 정도로 상상 이상의 많은 이름들이 적혀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의 한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영화는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자잘한 장면들만 간직하게 될 것이다. 주인공만의 확고한 신념, 목표, 가치관을 바탕으로 느리더라도 묵직하게 길을 나아가야 기본적인 안정감이라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주연 이상의 집중을 받는 조연들로 영화의 방향성은 사라진다. 결국, 복잡하고 우울한 이 영화를 보는 관람객이 고작 나 하나뿐인 쓸쓸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고난을 겪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심장이 쫄깃쫄깃해지고 긴장되지만 이 사람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기에 어찌 됐든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은 굉장히 흔하게들 가지고 있다. 영화 초반부터 그 사람의 가치관, 목표를 분명히 했기에 이 사람을 흔들진 언정, 무너트릴 순 없을 것 같다는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삶의 조연을 자청하는 사람들은 이 안정감을 느끼지 못한다. 불어오는 바람마다 휘청거리며 일어서려 하니 불안하고 지친다. 앉아서 쉬고 싶은데도 쉬는 것도 불안해서 질질 끌려가는 기분으로 하루를 보낸다. 내 신념과 가치관이 확고하지 않으니, 내 삶에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은 행인 1을 데려다가 괜스레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춰보기도 한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니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과거에 머문다. 그러다가 이번엔 나를 아프게 했던 과거의 사람에게 주연 자리를 냅다 줘버린다. 무게감이란 존재하지 않는 삶을 그렇게 살아간다.
내 인생에서 고작 지나가는 이름 모를 사람 1에게 주연 자리를 내주지 말자. 조금 초라해도 좋으니 주인공의 자리는 꼭 잡고 있는 끈질긴 신념을 가지자. 진한 감동을 남기는 영화들의 주인공처럼 살아가자. 고난을 겪는 순간도 그 사람은 주인공이고, 슬퍼하고 힘들어하는 순간도 주인공은 변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잠시 아파했다고 해서 발길질을 한 불량배 1에게 초점을 돌리지 않는다. 날카로운 발길질에 아픈 순간이 온다면, 아파하는 자신에게 집중하자. 그 불량배는 이름도 없는 조연의 자리만 주고 끝내자.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하기 싫은 것,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 내가 놓치기 싫은 것, 내가 상상하는 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초점을 두는 연습을 하자. 초라하고 지질한 순간에도 주인공은 나다. 딱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초점을 두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진득하게 바라볼수록 내 삶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나에게 집중해야 나의 가치를 일궈낼 수 있고, 나의 가치를 알아야 내 삶의 주연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다. 덤덤하게 하루를 꾸려나가는 주인공의 삶을 살아보기위해서 오늘도 나는 내 찌질함에 강렬하게 초점을 맞춰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