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며 사는 삶에도 적응은 필요하다.

작년의 나는 이딴 배부른 소리를 했다...

by jenny


여행이 시작됐다. 나는 갑자기 바뀐 환경에 나사 하나(아니 열 개쯤) 빠진 사람처럼 적응하지 못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총천연색 세상이 펼쳐지고 온세계가 나를 두 팔 벌려 환영할 줄 알았는데 그건 완전히 빌어먹을 망상이었다. 스탑오버로 들린 하노이에서는 더워서 토할 뻔했고, 짐을 줄인다고 줄였는데 무거운 배낭에 질식할 뻔했다. 이쯤 되면 내가 배낭을 메는 건지 배낭에 매달려 끌려가는 건지 구분이 안됐다. 값싼 버스를 타고 도착한 하노이의 더러운 호스텔에서 울면서 셔츠랑 청바지를 버리고 벌레 때문에 몸을 박박 긁으면서 잠을 잤다. 가성비를 생각하고 잡은 숙소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고, 여름을 좇아왔는데 또 영국은 너무 추웠다. 그래서 자주 우울했고 떠나자마자 집에 가고 싶었다. 행복하려고 떠난 여행이 더 이상 행복하지 않으면 스스로 약속한 기간도 일정도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야겠다. 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세계일주를 시작하자마자 때려치울 뻔했다.

혼자 여행하는 것을 즐기고, 혼자 먹는 밥도 서슴지 않으며, 혼자서 하는 일에 익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불행한데 외롭기까지 했다.


그렇다. 나는 그 좋다는 곳에 가서, 투덜 병 중증 환자처럼 굴었다.


나를 우울하게 했던 주범 중 하나, 25kg의 배낭.


사실 떠나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거지 같은 이 곳이 아닌 어딘가라면, 마냥 고생을 해도, 아무런 계획이 없어도, 어이없는 실수를 해도, 배가 고파도, 혼자서 가만히 시간을 때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도, 때로는 사기를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해도 웃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명백한 착각이었다.


장래희망이 집시이며 방랑자라며 우스갯소리로 떠들곤 했는데, 그건 정말 내가 떠돌이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 하는 말이었다. 나는 적당히 깨끗한 숙소에서, 적당히 편안하게, 적당히 여행과 일상의 비율을 정하고, 적당히 돈을 써야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리저리 헤매며 머저리처럼 여행에 적응을 못하고 있을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가 좋아하는 카피라이터 겸 작가 김민철의 신간, 하루의 취향. 할 것도 없고 바쁘지도 않은 여행자인 나는, 이 책을 이북으로 사서 바로 읽었다. 겨우 술 한잔, 이라는 소제목을 본 순간 마음이 간질간질하더니 이거다 싶었다.


점심시간에 먹었던 와인 한 잔이 정말 행복하다던 그녀의 동료처럼,

1일 1 맥주를 실천하면서 우울했던 런던 생활을 벗어난 그녀의 친구처럼.



여행이 우울할 때 나를 우울에서 건져준 건 맥주였다. 와인이었고, 보드카였고, 또 어떤 이름 모를 알코올이었다. 나는 그 술 한잔들 속에서 여행을 계속할 힘을 얻었다. 살아갈 힘을 얻었다. 술도 잘 못 먹는 내가, 맥주도 20대 중반이 돼서야 마셨던 내가 술 한 잔에 행복을 얻었다고 얘기하면 친구들이 다 코웃음 칠 테지만 어쨌든 그랬다. 아주 성실하게 나의 행복을 빌며 매일 술 한 잔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여행에서도 행복해지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지속적이고 꾸준한 노력이. (그놈의 노력. 내가 그 노오력이 싫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도 정해주지 않는 다음 행선지를 스스로 정하는 일, 저렴하면서 나쁘지 않은 시설을 가지고 있고 또 위치마저 좋은 숙소를 찾는 일, 마음이 맞는 여행자와 며칠 혹은 몇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 혼자서도 씩씩하게 맛있는 음식을 찾아서 먹으러 가는 일, 그 지역의 맛있는 맥주나 와인을 찾는 일. 결국 다 노력이 수반된 일들.


그 노력들 속에 하나씩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게 됐고, 그것들을 하나 둘 여행에 채워 넣었다.

나의 여행이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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