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집을 들고 다니지 그래...
1. 나는 내 친구들이 알아주는 맥시멀리스트다. 사는 건 더럽게 좋아하고 버리는 건 또 더럽게 못한다. 무엇보다 신발을 좋아한다. 좋은 신발이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가 준다고 믿어서는 아니고... 그냥 신발이 좋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맨날 네가 무슨 지네냐고 잔소리를 했고, 나는 그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신발을 사댔다.
그래서 장기여행을 가면서 신발 다섯 켤레를 들고 간 정신 나간 사람이 여기 있다! 슬리퍼, 샌들, 단화, 러닝화, 트래킹화! 나는 원래 지네라 신발을 좋아하는데, 파티 같은 데 가려면 tpo에 맞춰야 하니까 힐을 한 켤레 챙길까?라고 물었다가 친구들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고 뺐다.
나에게 세계일주는 외로움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닌, 짐과의 사투였다. 첫 도시 하노이에서 산티아고까지 나는 짐을 넣었다 뺐다 잃어버리고 사고 버렸다 다시 주워서 욱여넣었다.
너무 더운 하노이, 여행의 첫 도시에서 예약해 둔 제일 싼 호스텔을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낑낑거리며 찾다가 짐을 더 줄이지 못하고 끝까지 욱여넣은 나의 멍청함을 욕했다. 도착하자마자 울면서 청바지와 긴팔 셔츠 등 무거운데 별로 안 비싼 걸 버렸다. 얼마 뒤 에든버러에서는 추워서 청바지를 버린 스스로를 탓하면서 또 안 버렸으면 여행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배낭에 질식해서 죽었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그 걸 몇 번 반복하면서 아무리 무거워도 꼭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삶의 무게와 없어도 되는 것들에 대해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2. 멕시코시티에서 스쳤던, 해외여행이 처음인 어린애를 쿠바에서도 어쩌다 만났는데 걔는 가방이 35kg이 넘고 혹시 외국엔 없을까 봐 면봉을 500개 가져오고 참치캔을 10개 넘게 가져왔다고 했다. 쟤보단 내가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신발을 5켤레 들고 온 얘기는 하지 않았다.
3. 입고 다니던 옷이 질린다. h&m에 갔다. 예쁜 옷이 있다. 그럼 내 머릿속은 배낭 속 옷 파우치 내부를 점검한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를 사면 하나를 버린다.' 여행하면서 생긴 규칙이다.
원래 모으던 마그넷도 못 사고, 쇼핑도 거의 못해서 좀 우울했는데, 온갖 작고 예쁜 것들을 보면서 내가 예쁜 쓰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에 안심했다. 그것마저 좋아했으면 내 신세가 더 처량했을 거야.
4. 브래지어가 헐었다. 거의 찢어질 듯 말 듯한 상황. 자주 입기도 했고, (빨래방 비용이 아까워서) 손빨래를 하면서 자주 비트니까 결국 너덜너덜해졌다. 문득 속옷이 헐 때까지 입어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필요한 것보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았다. 더 많이 원하고, 다 쓰지도 못할 것들을 사면서 뭔가 채우려고 했다. 방법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5. 세비야에 있을 때 너무 더워서 근처 해변인 카디즈에 갔다. 몇 시간 갔다 올 거면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짐을 또 잔뜩 쌌다가 어깨만 아팠다. 들고 간 고프로는 당연히 꺼내지도 않았고.
마추픽추를 갈 때도 마찬가지다. 1박 2일 가는데 뭘 잔뜩 지고 가서 몇 시간 동안 걸었던 다리보다 어깨가 더 아팠다. 그러면서도 방한을 위한 건 별로 안 챙겨서 새벽에 엄청 추웠다. 무거운 가방 안에 도대체 뭐가 들어있던 걸까. 다 필요한 거였겠지?
6. 처음 시작은 25kg이었고, 가장 줄었을 때는 17kg이었는데 사실 배낭 무게는 10kg 언저리가 가장 좋은 것 같다. 기내에도 반입할 수 있고. 매고 걸으면서 길을 헤매도 짜증이 덜 나고. 여행은 무조건 배낭은 가볍게 지갑은 무겁게 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음에도 이것저것 쑤셔놓고 여행을 하겠지. 사람은 쉽게 안 변하니까.
맥시멀리스트의 여행은 힘들다. 이동할 때마다 뭘 많이 들고 다녀야 하니까. 당신의 맥시멀리즘이 싫다면 꼭 장기여행을 해라. 특효약이다. 나는 살기 위해 버렸고 살기 위해 안 샀다. (물론 마지막 여행지 뉴욕에서는 보상심리 때문에 뭘 많이 사긴 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지 벌써 1년이 지났지만 예전보다 훨씬 덜 사고 버리기도 꽤 잘한다.
그래도 쓸 데 없는 걸 가끔 산다. 필요한 것만 살 수 있는 삶은 빡빡하니까. 가끔 필요 없는데 예쁘고 예쁘고 예쁜 것들이 인생을 행복하게 해 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