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해 대충 삽니다.

대충 살기의 첫 번째 프로젝트, 세계일주

by jenny


시작이 어려워졌다.


뭐만 시작하면 잘하고 싶어서, 이기고 싶어서 목숨을 걸었다. 사랑도, 공부도, 일도, 게임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탁월하고 싶지 않았던 분야라도, 일단 시작을 하면 무조건 잘 해내고 싶었다. 심지어 회사 워크샵을 가서 게임을 하다가 이기고 싶어서 승부욕에 불타 올라 상사한테 혼난 적도 있다. (게임에서 이기고 인사평가에서 지고 싶었냐) 폴댄스를 시작했다가 남들보다 못하는 거 같으니까 그만둔 적도 있고. 그냥, 뭐든 시작하면 잘해야 했다.


오만데다 승부욕을 부리며 살았다. 참 치열하게. 잘 됐을 땐 문제가 없었다. 그 목숨을 건 일 들이,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할 때 나는 자주 무너졌다. 시험을 말아먹었을 때, 정말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나는 자주 비관적이었고,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뭐든 잘하고 싶은 욕심은, 나를 시도 조차 하기 두려운 인간으로 만들었다. 짝사랑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시작도 안 했고 취미에도 엄격 해져서 잘하지 못하는 취미는 도중에 그만뒀다. 이기거나 잘하지 않는 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잘하는 것만 하면서 살았다. 관심이 생겨도 잘 못할 것 같으면 시작도 안 했다. 인생에서 못하는 것에 대한 도전을 빼니 몸과 정신은 편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내가 이렇게 시시하고 그저 그런 사람이었나. 이렇게 안전지향적인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 내가 되게 별로였다. 그냥, 스스로가 재미없어 보였다. 이런 나를 꽤 오래 내버려 두던 중에 문득 떠오른 단어.


'대충', 대강을 추리는 정도로.


망하면 뭐 어때. 대충 하지 뭐. 잘 안되면 뭐 어때.라는 마음을 가득 담아서,

대충 살 수 있기를,

재밌어 보여서 시작하는 일에 목숨을 걸지 않기를,

취미를 경쟁처럼 하지 않기를,

지는 것에 익숙해 지기를,

그까짓 거 대충, 이렇게 하면 되지. 그게 뭐이가 그리 어려워서 그러고 있나.라고 말하는 노인이 될 수 있기를,

너무 많은 것들에 너무 많은 기대를 담지 않기를.


애초에 다 잘할 수는 없는 거니까. 나는 항상 부족하고, 종종 실패하고, 실수도 잦으니까. 그런 내 모습 자체를 인정하고 대충이라도 시작하는 삶. 작심삼일이면 뭐 어때. 아니면 접지 뭐라고 도전을 밥 먹듯이 하는 삶. 지면 뭐 어때 재밌었으면 되지 뭐 하고 승패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자주 푼수 같고 때론 끈기 없고 멍청해 보여도. 그럼 인생이 다시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대충 하자고. 준비도 대충. 시작도 대충. 어쩌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여행에 온갖 공을 들이기보다 차라리 힘을 빼고 대충. 여행하다 좋으면 눌러앉고, 못하겠으면 때려치우고 돌아오자고.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나는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았다. 근데, 못해도 재밌었다. 잘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니 세상엔 재밌는 게 정말 많았다. 여행 중에도, 돌아오고 나서도 더럽게 못하는 많은 것들을 시도하게 됐다. 못하는 일들을 쌓아놓고 살다 보니 스스로가 한심해 보이긴 커녕 인생이 더 다채로워졌다. 재능이 없어도 즐길 수 있다. 다이빙도 하고, 자전거도 계속 도전해보고, 달리기도 하고, 요리도 하고. 폴댄스도 다시 시작했다. 여전히 잘 못하고 또 아픈 것도 엄청 싫어하는데 생각보다 꾸준히 하고 있다. 내가 해봤던 운동 중에 제일 재밌으니까. 선생님들이 전문가 반을 권할 때면, 선생님, 저는 폴댄스를 그냥 재밌는 취미로 삼고 싶어요. 너무 잘하려고 노력하고 싶지 않아요. 되게 잘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 정도로 시간을 쏟고 싶진 않아요.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됐다.


나 같이 뭐든 잘하고 싶은 사람이 대충 살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마음을 다해야 한다. 조금만 마음이 흐트러져도 너무 열심히 살고 싶어 지고, 너무 이기고 싶어 지고, 너무 잘하고 싶어 지니까.


그러니까, 나는 오늘 하루도, 마음을 다해 대충 산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