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에서 천사를 만났다.

by jenny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까사에서 만난 친구들과 혁명광장을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하필 네가 우리 뒤에 서있었고, 우리가 하는 말을 듣다가 한국사람이에요? 대박. 부터 시작된 너의 한국어. 한국 드라마와 아이콘, BTS 등 한국 가수들의 노래를 좋아한다고. 그래서 한국어를 집에서 공부했다고.

버스에서 한참 한국어와 에스빠뇰과 영어로 말도 안 되는 수다를 떨다가, 함께 있던 다른 친구가 얼마 전에 쿠바노 전 남자 친구와 헤어졌고,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하니 똘똘한 눈망울과 정확한 딕션으로,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에요”라고 말해줬다. 그러니 슬퍼하지 말라고.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데도 괜스레 울컥해서 버스에서 울었다. 정말 어렸을 때 외에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뱉어본 적이 없는데. 그 말을 완전한 타지에서. 타지인에게. 어쩌면 나는 한국어를 잘하면서도 전혀 못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용적인 말들로 채워진 나의 언어 세계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돌아보기도 했고.

그렇게 나미나와의 짧은 인연을 아쉬워하면서 버스에서 내려서, 한참을 걔 얘기만 했다. 학교를 간다는데 어디 학교를 다닐까, 인스타그램이라도 주고받았어야 하는데, 마음이 정말 예쁘다. 뭐 그런 얘기들을 하면서 혁명광장을 대충 둘러보다가 이제 갈까? 했는데 저 멀리서 나미나가 뛰어왔다. 전 남친 얘기를 듣고 마음이 걸려서 뛰어왔다며. 괜찮냐며.

그렇게 쿠바에서 천사를 만났다. 아바나 대학교에 다닌다는 나미나의 학교까지 걸어가면서, 아이콘의 사랑을 했다 노래를 함께 부르며 깔깔거렸고 그러고도 뭐가 아쉬워서 학교 앞에서 계속 머뭇머뭇거리다가, 내일 집으로 놀러 오라고 초대를 받았고, 나는 트리니다드행을 하루 미뤘다.


만나기로 한 장소에 나미나가 나와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찾아갔는데 나마나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줬다. 그렇게 그녀의 집에 놀러 가 나미나의 친구 다나도 만났다. 나미나의 이모가 차려준 밥을 얻어먹고, 할머니와 함께 아바나 클럽을 마시고, 그녀의 앨범을 구경하다가 짐을 놓고 노래를 부르면서 바다로 수영을 갔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걷다가 발에 가시가 박혔고, 뽑으려다가 더 박혀서 나미나와 다나와 함께 응급실에 갔고.... 응급실에 가서 뽑기엔 너무 소박한 가시 두 개였고. 국소 마취 주사를 맞고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질렀고. 가시를 뽑는 낯선 동양인을 매우 여러 명의 병원 직원들이 구경했다. 좋다던 쿠바의 무료 의료시설까지 경험했던 완벽한 하루였고 쿠바가 백배쯤 더 좋아졌다.


근데 천사와 함께 웃으면서도 마음 한쪽 구석이 계속 불편했다.

나는 어제까지는 까사의 주인과 함께 잠을 자는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 현금 전부와 여권을 들고 다니다가, 나미나의 집에 놀러 갈 때는 나미나를 믿지 못해서 현금을 까사 사물함에 넣고 갔다. 그런데 밥을 대접해주고, 버스비를 내주고, 선물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그녀를 보면서 그 아이 같은 해맑은 호의를 의심한 내가 부끄러웠다. 물론 변명을 할 수는 있다. 언제 어디나 도둑은 많고 (심지어 당하기도 했고) 혼자 여행하는 나 같은 사람은 조심, 또 조심해야 하니까. 근데 내 불편함의 원인은 단지 조심스러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사람에 대한 믿음을 꽤 오래전부터 상실한 내가 문제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의심부터 하게 되고, 겉으론 웃지만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아무도 믿지 않고 마음도 주지 않아서 상처 받지 않는 삶은, 누군가를 믿고 사랑해서 상처 받고 슬퍼하고 무너지되 다시 일어나는 삶보다 나은 것인지 나에게 물었다.

아니, 적어도 나에게는 아니었다. 인류애를 상실했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면서도 항상 그것에 기대어 많은 것들을 얻었으니까. 그런데 왜 나는 여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경계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도 도망갈 여지를 남겨 놓으며 살고 있을까.


방어기제는 나이가 먹을수록 생기는 나를 지키기 위한 보호막이다. 그 보호막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온하다. 그러나 넘어서는 순간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천사에게 인생의 한 조각을 배웠다. 조건 없이 줄 때, 기쁨이 찾아올 확률이 높다는. 아주 단순하고도 명확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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