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들은 이 글을 읽기 전 심호흡이 필요합니다.
정확히 출발 59일 전에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다.
그리고 고프로를 샀고 첫 도시의 숙소를 예약했고, 1년을 안 쓸 거면 어차피 안 쓰는 거라고 생각하며 명품 가방 두 개와 신발, 향수와 미개봉 화장품들을 팔았다. 남들이 올려놓은 세계일주 루트를 구경하면서 내 루트는 어떻게 해야 하지를 맨날 천날 고민하다가 야근에 치이고 놀고먹는 것에 밀려서 여행 루트 따위는 손도 대지 못했다.
그렇게 여행 13일을 남겨놓고 휴직을 했다.
거의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컨셉은 준비했다.
"여름을 좇는 여행"
나는 겨울보다 여름을 선호하고, 겨울옷보다 여름옷이 가볍고 예쁘니까. 대충 마음이 가는 데나 교통비가 싼 곳으로 이동하면서 여름이나 따라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름이면 수영도 하고 수영도 하고 수영도 하고 수영도 할 수 있으니까.
뭐 어디 달나라 여행 가는 것도 아니고 그래 봤자 지구 안을 도는 건데, 13일 동안 바쁘게 움직이면 뭐라도 되겠지 라고 생각'만'하면서 여행 준비는 안 하고 누워서 월드컵이나 봤다.
그리고 정말 최소한의 준비와 신변 정리를 시작했다.
1년짜리 여행자 보험을 들고, 병원 투어를 했고, 황열병, 장티푸스, A형 간염, 파상풍 주사를 맞았고, 미처 사지 못했던 세면백, 자물쇠, 파우치 같은 준비물을 샀다. 환전을 조금 했고,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를 만들고 해지했다.
버스값과 비행기 값을 따져 보면서 어디로 가야 싸려나~를 고민하다가 런던(버스) -> 에든버러(비행기) -> 더블린의 교통편을 예매했다.
핸드폰을 중고로 사면서 사기를 당할 뻔하다 따져서 환불받고 다시 핸드폰을 사고, 핸드폰을 정지시키지 않고 살려 놓기 위해 가장 싼 요금제를 팔고 있는 통신사의 유심을 샀다.
뿌리 염색을 하면서 미용실 원장님에게도 나의 부재를 알리고, 1년 결제해 놓은 요가원을 양도해서 여행자금에 보탰다.
친구들을 만나서 밥을 먹고 송별회를 했고, 그러면서 무려 3박 4일간의 제주도 여행도 다녀왔다!
떠나기 직전에는 회사 상사 및 동료들과 마지막 식사도 했다.
(여러분. 13일이 세계일주를 준비하고 신변 정리하면서 제주도까지 다녀오기에 이렇게 넉넉한 시간입니다.)
이쯤에서 세계일주 혹은 장기여행, 아니면 해외로의 도피를 준비 중인 당신을 위한 최소한의 TO DO LIST를 정리해 주겠다.
1) 여행자 보험과 실비보험
장기 여행은 파손/분실 보장이 안돼서 큰 의미는 없지만 해외에서 다치면 돈이 꽤 많이 드는 경우도 봤다. 그러니 무조건 들어 놓으면 좋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쓰는 돈이다. 특히 삼성화재는 내가 계약한 기간보다 빨리 돌아오면 일정 금액 환불도 해줬다.
실비보험은 돌아오고 나서 알아도 되는데, 3개월 이상 해외 체류를 한 사람이 출입국 증명서 내면 기납입한 보험료에서 특약을 제외한 금액을 돌려준다. (얼마 안 된다.)
2) 예방접종
무조건 미리 할 것, 특히 나는 황열병 주사 맞고 거의 바로 출국해서 여행 중에 부작용이 조금 왔다. 그리고 A형 간염은 두 번 맞아야 완벽하게 예방이 되는데 급하게 맞느라 한 번 밖에 못 맞았다. 황열병, A형 간염, 파상풍은 건대 병원에서 한 번에 세대를 (빠밤) 맞았고 장티푸스는 저렴한 보건소에서 맞았다. 이것도 위험에 노출될지 안 될지 잘 모르겠지만 심신의 안정을 위해 쓰는 돈이다.
3) 핸드폰, 정지할 것인가?
통신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핸드폰을 정지하는 데 한 달 4000원 정도의 금액이 든다. 정지를 하면 말 그대로 오는 문자 / 전화를 못 받는다. 그런데 약정이나 가족 할인 같은 게 묶여 있지 않다면 이왕이면 살려 두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가끔 향수병에 젖어서 한국 유심을 끼면 한국에서 오는 문자도 확인할 수 있고! 카드 결제 문자도 볼 수 있고!
그래서 알뜰 통신사 중에 가장 저렴한 요금제를 제공하는 회사를 열심히 서치 했고, 하필 출국 3일 전에 찾아봤기 때문에 편의점 같은 데서 유심을 살 수 있는 통신사를 고르니 kt m 모바일이 있었다. 4300원 정도의 요금이 가장 저렴한 요금제였고, 이걸로 가입하면 핸드폰을 살려둘 수 있었다.
4) 라운지 카드
필수다 필수. 특히 장기 여행자는 늘 배가 고프니 라운지에서 밥도 먹을 수 있고 대기가 길어지면 잠도 잘 수 있다. 나는 현재는 단종된 다이너스카드 막차를 타고 아주 쏠쏠하게 썼으나 다른 pp카드가 있다면 대체 가능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마음과 돈과 대한민국 파워 여권만 있으면 내일 떠나도 되는 게 세계일주라고 생각한다. 나는 '비자? 그게 왜 필요해?' 정도의 수준이었으니까.
완벽주의자들에게는 부족하지만 나 같은 대충러들에게는 이 정도면 과하다. 헤헤.
그리고 출발하는 날까지 짐을 쌌다 풀었다 했고 (뭘 싸고 뭘 빼야 하는지도 모르는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안 한 것 같은데 어떡하지?'와 '죽기야 하겠냐'를 오가며 공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