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애고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설픈 비건 Nov 09. 2019

사랑도 유전이 되나요?

대를 이어오는 이상한 되물림

참 이상하게도 내가 부모님을 지켜보며 닮지 말아야지 했던 것들이 나에게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제일 싫어했던 당신들의 표정과 몸짓, 말투를 내가 똑닮아있을 때를 목격할 때면 나는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느끼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잠시 정신을 놓으면 중력에 이끌듯이 나는 다시 엄마, 아빠와 꼭 닮아있다.


연인을 찾을 때도 예외가 아니였다. 우리집은 아빠와 할아버지 모두 욱하는 성향이 강했는데, 욱한다는 것은 논리적인 인과응보의 결과가 아니라 임의적으로 발현되는 개인의 기분이기 때문에 미리 갸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였다. 똑같은 게임을 해달라고 졸라도 어떤 날은 접시가 날라갔고, 어떤 날은 즐겁게 게임을 했다. 나는 그 두 가지 다른 결과의 차이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연구했다. 사실 그 둘의 차이는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상대의 감정이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상대방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애교를 부려보는것 정도였다.


커서도 나는 사람들의 기분에 대한 눈치, 특히 남자사람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내 또래 여자들은 어느정도 이런 성향을 공유하고 있었다. 가부장적이고 다혈질적인 아빠는 아마도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전형적인 아빠의 모습이였던 것 같다. 누구를 원망하리. 아빠들도 그들의 아빠를 닮았을 뿐, 나는 또 그렇게 그 안에서 그들을 닮아갈 뿐이였다. 다만 일반적으로는 자기와 같은 성별인 부모님을 스스로와 더 동일시하며 영향을 받다보니, 나는 그런 아빠의 눈치를 보는 엄마를 더 닮아가면서도, 언제부턴가는 욱하는 기질 역시도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론적으로 내 이상형은 언제나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차분하고 여유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매번 생각했지만 내가 만나온 연인들을 나열해보면 하나같이 아빠를 닮아 있었고, 그들끼리도 이상하리만치 성격이 닮아 있었다. 성격이라는 것은 결국 양면이 있는 동전과도 같다. 다혈질이였던 연인들은 보통 자신의 감정을 열렬히 표현하는 편이였다. 화를 주체하지 못하듯이, 자신의 사랑 역시도 주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아빠에게서 받은 사랑도 비슷한 류의 것이였다. 왠지 모를 이유로 나는 항상 사랑에 목이 말라 있었고 그렇게 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그 행위 자체만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어느샌가 나는 연인에게 저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어떤 이유로 언제 상대가 화를 낼 지 모르다 보니 상대의 기분에 온통 신경이 쏠린 일종의 감정 종속 상태가 자주 벌어졌다. 특히 상대가 운전하는 차에 타게 될 때 나는 겁을 많이 먹었었다. 서울에서 운전을 하다보면 쌍욕이 나올 상황이 너무 많았고 좁은 차안에 그 얕고 강렬한 화가 찰 때면 나는 안절부절 다리를 떨었다. 나의 감정은 완전히 종속되고, 내 기분은 오직 객일뿐이였다. 그렇게 이 눈치 저 눈치를 봐가며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지금까지 내가 취했던 저자세에 대한 보상심리로 상대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는 그런 상태가 자연스러웠고 그런 관계가 익숙했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은 사랑의 테두리 안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이기보다는 상대방이 '화를 내지 않을 만한',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사랑은 나의 품에 들어왔고 아빠가 아무리 욱하고 무서워도 우리 사이에 사랑이 있다는 건 항상 '사실'이였기 때문에 나한테 사랑은 그런 뒤틀린 감정이 필히 포함된 것이였다.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폭력일 수 없었다. 가족은 사랑이라는 단단한 울타리를 가진 집단이라는 것이 사회의 모두가 합의하고 있는 명제였다. 내가 받아본 사랑도 그런 것이니까; 약간은 무섭고, 약간은 부당하고, 약간은 상처받고, 때론 그런 것들이 쌓여 큰 비극의 자국을 남기는.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게 되는 또 다른 폭력적인 사랑의 감정 중 하나는 소유욕이다. 개인의 삶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훨씬 중요하게 여겨질수록, 개인은 가족을 위해 자신을 크게 희생한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하게 된다. 나는 이런 소유욕이 연인간의 사랑에서 발현되는 형태가 질투라고 생각한다.


질투를 주로 'Jealous'라는 영어 단어로 번역하지만, 영어에서 말하는 'Jealous'는 'envy'에 더 가까운 시기나 부러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특정한 선망을 표현할 때 더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자신의 연인을 'very jealousy'라고 표현한다면, 한국어로 '질투가 많아'라고 하는 표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시기가 많다'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질투가 많다'라는 말을 좀 더 정확히 영어로 표현하려면 'very possessive'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상대의 사랑과 애정을 독차지 하려는 성향을 의미한다. (posseissve; demanding someone's total attention and love)


우리는 누군가를 소유하려고 할 때 질투를 느낀다. 질투를 나게 하는 대상자 자체를 증오하고 미워해서가 아니라(사실 우리는 질투하는 대상자에 대해 전혀 알 지 못할 때가 많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 말고도 다른 관계들이 있다는 사실이 질투를 불러 일으킨다. 내가 없는 데서도 웃고 내가 없는데서도 즐겁게 있을 수 있다는 그 사실이.


질투는 상대방을 향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감정이 아닌 자신과 연결된 감정이다. 상대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정복적인 욕망이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가족과 마찬가지로 연인사이에서도 자신이 그 사랑을 위해 희생을 많이 했을수록 질투는 격렬하게 다가온다.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는데, 나는 너 없이는 이렇게 힘든데, 하는 기묘한 보상심리. 질투의 핵심은 바로 '너 나 없이 잘 살지마'가 아닐까?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서는 안된다. 희생에는 보상심리가 따른다. 세상에 온전한 희생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세상에 어떤 사랑도 자신에 대한 사랑을 희생할만큼 가치 있지 않다. 격렬한 감정은 어쩌면 사랑과는 가장 멀리 있을지도 모르겠다. 소용돌이 속에서는 스스로를 지켜내기 어렵다. 두 사람이 온전히 편안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거리와 공기가 사랑에는 필요하다. 그것이 비단 가족간의 사랑이든, 친구간의 사랑이든, 연인간의 사랑이든.


엄마, 아빠는 수없이 많은 희생으로 나를 키웠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모두가 불렀다. 그 희생도 그들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의 폭력이였을테다. 나에게 행해진 폭력 또한 ‘행복한 가정'에서 당연하게 벌어지는 평균 정도의 폭력이였고, 감히 그것을 폭력이라고 생각하거나 부를 수 없었기에 나는 그것을 사랑으로 기억했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내가 겪어 본 방식의 사랑밖에는 알 지 못하고 그런 사랑을 찾으며 살아간다. 나의 부모님은 또 그들의 부모님에게서, 또 그들은 다시 그들의 부모님에게서부터.. 그렇게 오랫동안 물려내려온 형태의 사랑.


위로부터 전해져 오는 가장 강력한 유산은 재산도 땅도 아닌 사랑의 형태이다.

이 이상한 되물림을 과연 끊어낼 수 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