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폭력이다
나 좋아해? 아니면 나 사랑해?
얼마 전에 그런 질문을 받았었다.
약간의 술의 힘과 달빛에 힘입어 세상 모든게 조금 더 낭만적으로 보이던 밤, 몇 달간 꾸준히 데이트를 하던 상대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꿀이 떨어지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던져진 질문:
'나 좋아..? (약간의 정적) 아니면 나 사랑해...?'
좋냐는 질문에 냉큼 '응 엄청 엄청 좋아해!!!!'라고 대답을 하려던 찰나 좋아하냐는 질문이 사랑하냐는 질문으로 바뀌니 나는 당혹스러워져 아무 말도 못하고 냉큼 옷이나 벗었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은 참으로 단순하다. 그것은 일종의 취향이기도 하며 감각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노란색 좋아해? 재즈 좋아해? 매운 음식 좋아해? 시끄러운 것 좋아해? 등등등.. 좋아하는 것이 옆에 있으면 유쾌하고 즐겁다. 좋아함은 밖을 향해 있다. '나는 이 연필을 좋아해'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 연필에서 내가 좋아할만한 이유를 논리적으로 몇 가지 찾아낼 수 있다. 써지는 감촉이 좋아서, 혹은 손에 잡히는 두께감이 좋아서, 연필이 주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좋아서 등등. 바깥으로부터 비롯되는 나의 유쾌한 감정이 무언가를 좋아하게 만든다.
사랑은 좋아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복잡하고 뒤틀린 감정에서 비롯된다. 일단 사랑은 시간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친구집에서 만지다 온 엄청난 미모의 페르시안 고양이보다 매일밤 우리집 문앞을 찾아와 간식만 물고 사라지는 귀가 뜯겨저 나간 도둑고양이를 나는 조금 더 사랑한다. 소개팅에서 처음 만난 상대방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따지게 되면서도 오래 만난 연인은 배가 좀 나와도, 피부에 여드름이 좀 나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시간이라는 것은 나의 존재를 보장한다. 누군가와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면 상대방에게는 나의 시간이 쌓인다. 사랑하는 상대를 바라보며 나는 동시에 나를 바라본다. 흘러온 시간이 나의 존재를 상대방에게 각인시키고, 상대방 안에는 내가 자리잡게 된다.
그러니까 사랑은, 어쩌면 좋아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이기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무언가에서 나를 찾을 수 있을 때에만 그것을 깊이 사랑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연발생적인 이유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사랑은 오랜 시간이 흐르며 더 단단해진다. 각자의 성격이나 취향은 무의미하다. 가족들 한 명, 한 명을 만약 사회에서 만났더라면 말이라도 섞고 지냈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서로를 채워나갔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은 때론(꽤 자주) 폭력이다.
반면 좋아한다는 감정은 외부를 향해 있다. 누군가 나에게 '너 이 티셔츠 좋아해?' 라고 물었을 때 '그 티셔츠'를 좋아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나는 '그 티셔츠'에 관해 이야기 한다. 응, 이 티셔츠는 너무 부드럽고, 색도 아무데나 입어도 잘 받고, 등등등.. 만약 누군가 나에게 '너 이 티셔츠 사랑해?' 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 티셔츠'가 나와 연결된 어떤 지점을 찾아내야 한다. 응, 나는 이 티셔츠를 사랑해. 이 티셔츠는 내가 애기때부터 입던건데.. 이 티셔츠에는 이 자국이 있는데, 이거는 내가 처음으로 뭘 했을 때 생긴 어쩌고 저쩌고 그날의 기억이 어쩌고 저쩌고.. 내가 티셔츠에 갖는 사랑은 더 이상 티셔츠에 대한 속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색이 바래고 구멍이 나서 더 이상은 입을 수 없게 되더라도 나는 그 티셔츠를 사랑할 수 있다. 그 티셔츠 안에서 나의 내부로 향하는 무언가를 찾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을 찾기 위해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과 사랑에 빠지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자신의 마음과 사랑에 빠진다. 사랑은 내부를 향해 있는 탓이다. 사랑은 또 절대적이고 맹목적이다. 일단 사랑하기 시작하면 쉽게 그 마음을 바꾸기가 어렵다.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은 무겁고 숭고하게, 좋아한다는 감정은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하지만 나는 그 둘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려고 자주 노력한다.
좋아하는 감정이야말로 숭고하다. 좋아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나를 기분 좋게 해준다. 상대방과 같이 하는 대화가 즐거운지, 상대방의 말투가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지, 상대방과 공유했을 때 즐거운 무언가가 있는지. 이런 것들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상대방의 어떤 요소(외모, 기질, 기호, 취향 등)들이 나를 기분 좋게 해주기 때문에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즐겁다. 내가 냉면을 좋아하고,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상대방을 좋아한다. 나는 냉면에게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다. 초록색에게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은 이미 완결된 감정이다. 냉면을 평생 먹지 못하면 아쉽기야 하겠지만 죽을만큼 괴롭지는 않을테지. 내가 냉면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냉면이 냉면으로 있는 것 뿐이다.
나를 좋아해주기 때문에 상대방을 좋아하고 있다면, 혹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자신을 좋아하게 된거라면 조금은 위험한 시작이다. 그런 사랑은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먹이로 삼는다. 나를 좋아하는듯한 말투가 좋았고, 나를 좋아하는듯한 표정이 좋았고, 나를 좋아하는듯한 행동이 좋았다면, 상대방이 그 주관적이고도 모호한 기준을 벗어나는 순간 모든것이 흔들린다. 게다가 사랑이라는 굴레는 한 번 씌워지고 나면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덫에 가깝다. 사랑은 좋아함을 뛰어넘는다. 내가 싫어하는 행동과 말투마저도 사랑하게 된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연애를 종종 사랑이라는 이유로 맹목적으로 지켜나간다. 아픈 사랑 운운하면서. 아프면 청춘이 아니라 환자라고 했던가. 사랑도 마찬가지다, 아픈게 사랑이라면 안 하는게 낫다.
가족은 내가 결정할 수 없는 사랑이였다면, 친구는 환경과 시간에 힘을 빌어 자연스럽게 베어나오는 사랑이다. 더 이상은 공통사가 없는 학창시절 친구를 만나도 우리는 몇 시간동안 추억팔이를 하며 웃고 떠들 수 있다. 연인은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유일한 사랑이다. 우리는 누구와 연애를 하고 사랑을 할 지만은 선택할 수 있다. 일단 누군가와 사랑을 하기로 정했다면, 시간은 필연적으로 흘러가고 견고한 울타리를 짓게 된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사실 아무와도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사실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가 아닌,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구체적인 대답이 나올 수 있는 그런 질문 말이다.
여자는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행복하다는 말은 진리와도 같았다. 나를 봐주고, 나를 좋아해주고, 나한테 목 메달면 그거야말로 나도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나의 행복은 상대방이 나에게 갖는 감정에 달려 있었다. 그렇게 끊임없이 상대방에게서 나에 대한 사랑을 찾다보니 상대방은 그저 대체가능한 불특정 다수나 다름 없었고 어른들 말마따나 그 NOM이 그 NOM이였다. 어쩜 하는 짓이 하나같이 똑같은지. 하지만 사실 그 'NOM'은 사람이 아니라 감정에 대한 묘사였다. 누군가를 좋아하기 시작하는 감정의 곡선은 같은 패턴을 따르기 마련이고, 그 곡선에 나의 행복을 거는 짓은 그래프만 보고 투자하는 주식이나 다름없다.
벌써부터 슬금슬금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는 가게들이 눈에 띈다.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하고 있는 예수님의 생일에 맞춰 너도 나도 사랑을 시작한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긴 했겠지. 근데 나를 좋아하긴 했을까? 장담컨데 아닐 것 같다. 아무리 예수님이라도 모두를 좋아할 수는 없다. 사랑은 쉽다. 하고자 하면 하는 것이다. 맹목적이고 절대적이다. 좋아하는 것은 어렵다.
돌아오는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사랑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많이 늘려놓는 편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