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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5. 2019

사랑은 딱지를 싣고

과태료와 사랑의 관계

우리집 근처는 불법주차의 메카이다. 


강변북로로 곧바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 직전으로 난 오르막길을 따라 뻗어지는 골목에는 주택들이 빽빽하게 심겨져 있다. 전부 다 좁은 골목이다 보니 주차할 데가 마땅치 않아 큰 도로 양 옆으로도 경찰서 바로 앞 갓길로도 아주 약간만 공간이 나면 금새 차가 가득 세워진다. 


특히 바로 옆 골목 막다른 길의 가파른 언덕 주차가 인상깊은데 오르막길을 따라 많을 때는 3열로 6행도 넘는 차가 세워져있다. 맨 앞에 세운 차는 대체 어떻게 나가란 거지? 싶었는데, 알고보니 거기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차들은 합의된 출근 순서대로 차곡차곡 떡케이크처럼 쌓여져 있었고 매일 아침이면 일렬종대로 정갈하게 출차의식을 거쳤다. 한 번은 친구가 아무데나 빈 자리에 차를 세웠다가 아침일찍 전화가 왔다.


'오전 7시 출근차 라인에 대신 분 맞죠? 빨리 빼주세요' 


나야 차도 없고 면허도 없으니 이런 일들이야 아무 상관 없지만, 가끔씩 차 있는 사람과 데이트를 할 때면 곤란해진다. 꽤나 마음에 드는 데이트가 이어지면 자연스럽게 차로 집 앞에 데려다 주는 일이 반복되고 다음 스텝으로 옮겨가느냐 못 가느냐에는 바로 이 주차가 얼마나 어렵느냐가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아직 스킨십이 어색한 풋풋한 관계에서 주차자리를 버벅대며 열심히 찾는 시간동안 서로의 속이 너무 훤히 보여 도저히 견디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집 바로 앞 길에 잠시 정차하면 나는 쏙 내려야 하고, 상대방도 쓱 갈 길을 떠나야 한다. 만약 몇 시간쯤은 세워도 되는 주차공간이 있다면 상대방은 문 앞까지 바래다 준다는 핑계로 차 밖으로 나오고 그러면 나는 차라도 한 잔 하러 가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여간 돈이 없는 사람은 주차 공간이 있는 거주 형태를 취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또 로맨틱한 밤을 보내는게 쉽지 않다는 결론 되겠다.


그리하여 수많은 밤들을 외롭게 보냈을 리는 없고 그리하여 집주변에 불법주차를 해도 꽤나 안전한 스팟을 꿰뚫게 되었다. 나의 데이트 상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 1순위는 횡단보도 옆 일명 '자연스러운 자리'이다. 횡단보도 옆으로 난 거주자 우선 주차 네모칸은 횡단보도와의 간격을 생각해서 마지막 쯤에 넉넉하게 자리가 비워져 있고, 이 틈에다가 세우면 아주 자연스럽게, 거주자 우선 주차 자리에 세운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꽤나 잘 알려진 스팟이라 주말이 되면 조금 치열해진다.


다음으로는 경찰서 옆 갓길 '위험을 감수하는 자만이 행운을 얻는다 자리'이다. 바로 옆에 경찰서가 위치해 있어 심장이 조금 쫄깃하지만 옆으로는 공사터가 있어 사람이나 차가 오가지 않아 몇 시간쯤은 대충 대놔도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사실 1순위 자리보다 이 자리가 딱지횟수로 따지면 조금 더 안전한 축에 속한다.


마지막으로는 '너의 대담함을 보여줘'자리이다. 이건 그냥 강변북로로 이어지는 도로 끝에 대는 것이다. 앞으로는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다보니 여기까지 와서 검사를 하는 일이 많지는 않다. 하지만 버젓한 대로 한복판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차는 신고당하기 딱 좋긴 하다.


대충 이렇게 세 가지 주차 초이스들을 보여주면 신기하게도 각자 선호하는 자리가 다르다. 어디다가 세우건 사실 처음 두 세 번 까지는 딱지를 떼는 일은 거의 없다. 초심자의 행운이다. 그리고 차를 세 번 정도 세울 때가 되면 앞으로 관계가 계속 유지가 될 지 끝이 날 지 결정이 되고, 보통 나의 관계는 그렇게 딱지 한 통 남기지 않고 끝나버리곤 한다.


나름대로 버틸만했던 여름이였어서인지, 날씨가 추워지는게 아쉽기만 하다. 반팔을 집어넣고 긴팔을 꺼내놓는 동안 주구장창 딱지를 떼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생겼다. 딱지를 뗄 때마다 그 사람은 나에게 벌금을 뿜빠이 해서 계좌로 보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딱지를 뗄 때마다 웃곤 했는데 한 번 차를 견인 당한 뒤로는 그렇게 마음 편하게 불법주차를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공영주차장에 전화해보니 월주차는 대기가 한참 길고, 일권 같은 건 없다. 5분에 150원이니 한 시간에는 1800인 셈이다. 비싼 가격은 아니다만, 황진이가 이불 아래 고이 넣어둔 밤을 펼치기엔 싸지도 않다. 금요일 저녁 10시쯤 차를 세워서, 다음날 아침 느지막히 일어나 점심을 먹고 뒹굴거리다 오후 5시에 차를 뺐다고 치면 30,600원이니, 딱지를 떼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렇게 딜레마가 시작된다. 


마음 편하게 공영주차장에 대고 30,600원을 지불할 것이냐, 아니면 불안함을 감수하며 요행을 바랄 것이냐. 겁이 많은 정모씨는 주로 공영주차장을 택한다. 그렇지만 공영 주차장에 세우며 따박따박 주차비를 지불하고 있다고 해서 어쩌다 한 번 세운 불법주차가 운이 좋으라는 법은 없다. 이상하게 공영주차장에 세우기 시작하고부터 잠깐 밥 먹으려고 세운 불법주차마다 딱지를 떼는 것이다. 어떤 날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하루에 두 번도 뗐다. 어차피 두 번이나 뗀 거 열받는다고 그 자리에 그대로 뒀다고 다음날 아침 차가 견인되었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나란히 견인된 차를 찾으러 갔다. 지금까지 내야하는 과태료가 벌써 십 만원이 넘었고 그 날은 견인비도 내야 했다. 그래도 나와 보내는 밤이 십 몇만원 보다는 더 받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급기야는 정모씨의 어머니께서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길래 한 달 동안 딱지 8개를 뗐냐는 추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행이도 나는 그 뒤로 몇 주간 유럽에 있었고 그렇게 딱지는 잠잠해졌다.


여행이 설레는 건 돌아올 곳이 있어서다. 공항에 마중오겠다는 약속을 받고나니까 비행기를 탈 때부터 신이 났다. 이 때까지 나한테 공항에 마중오겠다고 약속했던 사람들이 참 많았지만 저가항공만 타고 다니는 나의 새벽 도착시간에 맞춰 실제로 나오는 사람은 한 번도 없었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전화를 걸었는데도 받지 않아 이번에도 공항 버스나 타고 가야겠군 하며 밖을 나왔는데 정모씨가 서있었다.


인천은 꽤나 멀다. 이렇게 오랫동안 둘이 차를 탄 건 처음이였다. 피곤하기도 하고 간만에 보게 되니 어색하기도 하고 날씨는 한껏 좋고 도로는 뻥뻥 뚫려 있었다. 나는 계속 더 밟으라고 재촉했다.


'빨리 가자 빨리, 더 밟아봐 더 빨리!!'

'지금 좀 더 밟는다고 더 빨리 도착 안해.'

'그래도 기분이 좋잖아!'

'이제 곧 단속 구간이야.'

'시속 10km 정도는 어겨도 안 찍히지 않아? 한 70km까지는 밟아도 될걸? 한 번 해봐! 재밌잖아.'


나는 아슬아슬한 걸 좋아하고 정모씨는 안전한 걸 좋아한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서울에 왔다.


그리고 또 시간은 몇 주가 흘렀고 내가 유럽에서 기대했던만큼 우리는 서로를 격하게 반가워하지는 않았다. 매사에 성격도 급하고 조바심이 많은 나는 혼자 머리속으로 또 여러 경우의 수를 펼치며 왜 나를 예전처럼 좋아하지 않는지 분석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떤 날은 먼저 연락을 안 하면 하루종일 연락이 안 와서 나도 또 연락을 안하다보니 며칠간 서로의 생사도 모르고 지냈다. 또 어떤 날은 만나서 밥만 먹고 헤어지고 또 어떤 날은 커피만 먹고 헤어졌다. 주차는 잘 하지 않았다.


오늘은 자기 전에 짧은 통화를 하고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데 사진 한 통이 왔다.



'과태료 부과 사전 통지서.

위반일시 몇월 몇시 몇분.

위반장소 북인천IC4 > 장도3.

위반내용 속도(제한: 60 주행: 72 초과:12)'


이번에는 주차위반이 아닌 속도위반 딱지였다. 분명 70km 정도로 달렸으면 안 걸렸을텐데 2km를 더 넘겨서 카메라에 찍힌게 틀림없다. 주차도 안 하고 뜨거운 밤도 없었는데 또 딱지라니. 주차딱지의 값어치에 관해서는 자신이 있었지만, 내가 속도위반 딱지만한 값어치를 하는 지는 확신이 안 섰다. 돌이켜보니 공항에서 집에 돌아오는 1시간 내내 내가 안 보고 싶었냐고 들들 볶았다. 다행히 뿜빠이 하라는 소리는 이번에는 없었다.


모든 관계는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긴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겠다만 그 날들을 쌓아 가야지만 관계는 유지된다. 나쁜 날이 오면 쉽게 관계를 끊어내는 버릇이 있었다. 혹은 나쁜 날이 올 것 같다는 어설픈 어림짐작으로 뒤를 돌아서곤 했다. 그렇게 누군가를 보내고 나면 그 날은 선명한 지표가 되어 관계가 조각난 계기로 머리속에 새겨졌다.


주차 딱지를 뗀 어떤 날은 당장이라도 결혼 할 것 처럼 서로를 바라봤고 또 어떤 날은 어딘가 잔뜩 심통이 나서는 등을 돌리고 잤다. 하지만 주로 딱지를 뗀 날들은 무슨 기분으로 뭘 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지나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은 순간들에 매번 깃발을 꽂지만 않는다면 관계를 유지하는 법은 상당히 쉽다.


매월 20일이면 가스 고지서가 날라온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는 10월부터 점차 온수 사용량이 늘어 이용료가 훌쩍 뛴다. 한 여름에도 화장실에 증기가 꽉 찰 정도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는 정모씨 덕분에 이용료는 평소에 비해 몇 배는 더 뛰었다. 겨울이 오면 몇 시간이고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다 나오시겠지. 공영주차장의 대기줄도 조금은 줄어들겠지. 이참에 주차가 보장된 안락한 보금자리를 찾아볼까. 아니면 욕조가 있는 집을 구해볼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동안 집옆 가로등이 켜졌다. 어쨌든 시간은 천천히 흔적을 남기며 또 몇 장의 딱지를 보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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