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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0. 2019

가상의 커플 유리와 구슬의 경우

'자기 나 사랑해?'

가상의 인물 유리는 가상의 인물 구슬과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둘 다 데이팅앱을 가입하고 탈퇴하기를 반복해왔는데, 어느 우연한 시점쯤에 꽤 오랜만에 앱에 재접속을 하게 되었다. 유리는 원래 사용하던 아이디의 비밀번호를 잊어 새로운 SNS계정으로 로그인을 했다. 가장 먹힐만한 사진으로 프로필을 등록하고 적당히 말을 붙이기 좋고 유머러스하면서도 너무 속보이지 않은 멘트로 자기소개를 작성하고 나니, 처음 데이팅앱을 사용하는 사람처럼 설렌다. '동네에서 같이 강아지 산책 시키실 분!?' 혹은 '반찬 만들어 나눠 먹을 동네친구를 찾습니다!.' 따위의 멘트들이다.. 물론 유리는 개도 없고 요리도 할 줄 모른다.


카드를 몇 번 넘기지 않았을 때 꽤나 괜찮은 사람일 것 같은 상대가 등장하였다. 바로 구슬이다. 구슬의 프로필에서 가장 맘에 드는 점은 우선 셀카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사진이 자연스럽게 찍힌 듯한 휴가지 사진이나 졸업사진과 같은 기념적인 사진들이고, 마지막에는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 한 장 첨부되어 있다. 어딘가 순수하고 순진해보이는 구석이 있어 마음에 든다. 하지만 유리는 그런 사람이 데이팅 어플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이 사람의 프로필은 고도로 전략화된 선수의 프로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런면이 마이너스가 되기보다 오히려 플러스로 느껴진다. 연애나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을 가벼운 만남이라면, 이왕이면 만난 시간동안만큼은 즐겁고 텐션이 유지되는 적당히 눈치 있는 선수같은 사람이 낫다. 유리는 이미 데이팅 어플에 얼마나 등신같은 사람들이 많은 지 잘 알고 있다. 적당히 웃으며 대꾸를 했다가 3시간이 넘게 상대방의 10년치 인생계획을 들은 적도 있고, 운동선수 출신 전남친을 언급했다가 상대방의 특전사 시절 스토리를 낱낱이 들어야 했다. 상대는 눈치도 없이 만남이 아주 훌륭하게 성사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밤을 기대하지만 유리는 상대방이 계산하기가 무섭게 집에 통금이 있다며 도망친다. 상대방은 속으로 생각한다.


'이런 속물을 다 봤나. 나랑 같이 있을 생각도 없으면서 비싼 술을 홀라당 얻어먹다니..'


유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몇 시간동안 입가에 경련이 나도록 미소를 짓고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몰라 죽을뻔 했네.. 돈이라도 단 한 푼 안 쓰고 조용히 집으로 들어가야겠어.'


그런 식으로 프사만 바뀌어도 누군지 까먹어 한참을 생각해봐야 하는 인물들이 하나둘 유리의 카톡친구에 늘어날 때 쯤 유리는 현타와 함께 데이팅앱을 지워오곤 했다.


그렇다면 구슬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구슬은 아주 평범한 30대 초반의 회사원이다. 특출나게 무엇 하나 잘난 것은 없지만, 모든 것을 평균 혹은 평균 이상 정도 해왔다. 대체로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잘 팔리기 마련이다. 구슬은 데이팅앱 안에서 자신이 굉장히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는 자신이 연애시장에서 탈락한 루저가 아닌 정도로만 행동해도 많은 매칭을 받게 된다. 그렇게 여러 번 매칭을 받아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았지만 진지하게 연애를 할만한 사람은 단 한 번도 보질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구슬은 현타와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겼다.


'모든 문제는 내 안에 있어. 내가 뭐 그렇게 잘 낫다고 사람을 그렇게 재고 따진거지? 사실 어떤 사람이든 사이코패스만 아니라면 사랑할만한 구석이 있고 같이 오래 만나다보면 정이 쌓이고 사랑을 하게 되는 건데. 좀 더 마음을 열어보자.'


이런 근사한 생각을 하며 다시 데이팅 앱을 깐 구슬은 몇 번 넘기지 않아 자기가 선호하는 스타일의 유리를 보게된다. 구슬은 카드를 오른쪽으로 넘겼고 그들은 바로 매칭이 되었다.


일사천리로 만남은 진행되었고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유리는 평소처럼 끄덕이며 적절한 반응을 해주었고, 구슬은 자신도 모르게 신이 나서 자신이 키우는 애완견에 대해 몇 시간동안 떠들었다. 유리는 귀 기울여 구슬의 애완견 얘기를 들으며 구슬이 애완견과 함께 보내는 일상을 상상하고 구슬이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느끼게 된다. 다른 때와 똑같은 일방적 대화의 레퍼토리였음에도 유리는 구슬에게 큰 호감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구슬의 외모 때문이다. 유리와 구슬은 서로의 외모가 꽤나 마음에 든다. 앱에 있던 사진을 토대로 정교하게 실물이 어떨지 상상하고 나온 베테랑들이지만, 둘 모두 기대한 것보다 서로의 외모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더불어 자신이 마음에 드는 수준의, 꽤나 괜찮은 외모의 상대가 자신의 외모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 자체 역시도 마음에 든다. 저 괜찮은 사람과 내가 외모적으로 어울린다는 관념 자체가 마음에 든다.


유리와 구슬은 술집을 나오며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조그만 다툼을 벌인다. 유리는 극구 사양을 하며 자신의 카드로 잽싸게 계산을 한다. 구슬은 마지못해 유리가 결제를 하도록 둔 뒤에 자신의 집에 괜찮은 사케가 있다며 한 잔 더 하는게 어떻냐고 유리를 꼬드긴다. 유리는 '저는 사케를 너무너무 좋아하는데요.' 하면서 사케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약간 늘여 놓는다. 며칠 전 일본문화에 대한 책을 읽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도 한다. 자신이 정말로 사케가 마시고 싶어서 가는 것임을 어필하고 싶은 하는 말이지만 유리와 구슬 모두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둘은 자연스럽게 구슬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둘은 또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잠자리로 시작하게 된 둘의 연애는 안정적인 형태를 띈다. 유리와 구슬이 만약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였다면, 이 모든 것이 너무 큰 불안감이였을지 모른다. 너무 빨리 자버린 것에 대한 걱정과 조바심, 몸이 닿음으로서 급격히 쏟아져 오는 정신적 애착, 매번 헤어질 때마다 겪는 분리불안증.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둘다 닳을만큼 닳은 사람들이다. 둘은 섹스가 숭고한 사랑의 나눔보다는 황홀한 육체적 쾌락에 더 가깝다는 것을 잘 이해하고 있고 후자야 말로 진정으로 숭고한 행위라는 점 역시 몸소 깨닫고 있다. 둘은 일주일에 네다섯 번 정도 퇴근 후 같이 저녁을 먹고 섹스를 하는 궤도에 올라섰다. 바쁜 아침이나 일을 하는 낮동안에는 잘 연락을 하지 않지만 그것이 둘 중 어느 누구도 신경쓰이게 하지 않는다. 생각이 날 때면 유리는 구슬에게 보고싶다는 말과 함께 오늘 먹은 점심 사진을 보내고 틈이 날 때면 구슬도 유리에게 전화를 건다. 둘 중 한 명이 답이 늦거나 전화를 받지 않아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다. 아직까지 둘은 완전한 개체로서 소통을 하고 있고, 상대에게 취하는 연락의 형태는 오로지 자신의 일방적인 의사를 전달함으로써 만족된다.


하지만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섹스를 하고 밤을 같이 보내는 일상은 양쪽에게 조금씩 버거워지기 시작한다. 초반에는 간만에 맛보게 된 육체적 쾌락과 뒤따라오는 따뜻한 애정이 좋아 무리해서 며칠이건 같이 보내곤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속해서 며칠씩 보지 않아도 둘 다 시간이 날 때 얼마든지 함께 보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자연스럽게 둘이 만나는 간격이 조금씩 늘어난다. 그래도 여전히 일주일에 두세 번은 같이 밤을 보낸다. 그렇지만 일주일에 네다섯 번과 비교했을 때는 상대적으로 둘의 만남은 급격히 줄어든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것은 일종의 합의된 조절인 셈이다. 둘 다 지금의 방식이 더 지속가능하고 안정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직감했듯이, 모든 관계에서 둘 중 한 명은 이러한 변화 때문에 사랑으로 차근차근 향하고 있던 방향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이번 경우에는 유리가 브레이크를 걸게 되었다.


사실 유리는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구슬과 밤을 보내는게 꽤나 부담스러웠다. 구슬은 조금 멀리 살기 때문에 각자 다음날 편하게 출근을 하기 위해서 주로 유리의 집에서 데이트를 하고 잠을 자곤한다. 유리는 구슬이 좋지만, 아직 같은 공간을 매일같이 공유할만큼 구슬이 편하지는 않다. 유리는 구슬이 널부러 놓은 속옷이나 아무데나 올려놓은 화장품 샘플을 치우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하게 된다. 더구다나 유리는 완벽주의자적인 성격이 있어 모든 물건을 원래 있던 자리에 싹 정리하여 두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거기다 예민하기까지 해서 구슬과 같이 잠을 자는 날은 3~4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하고 설친다. 둘이 잠에 드는 시간도 너무나 다르다. 유리는 밤 10시만 되면 잠이 오는데, 구슬은 새벽 1~2시까지 유투브를 보다가 잔다. 유리는 새벽 5시면 일어나고, 구슬은 출근하기 10분 전까지 자다가 허겁지겁 8시 50분에 일어나 뛰쳐나간다. 유리와 구슬의 만남이 일주일에 두세 번으로 조정된 것은 구슬보다도 유리의 일상에 훨씬 바람직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런데 왜? 유리는 이 안정적인 관계에 브레이크를 걸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밀란쿤데라의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


; 모든 애정 관계는 암묵적인 관습에 토대를 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초기 몇 주 사이에 사랑에 빠졌다고 경솔하게 결론을 내리는 관습 말이다. 그들은 아직 꿈속에 있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까다로운 법률가처럼 그들 계약서의 세세한 조항들을 작성한다. 아! 연인들이여, 이 위험한 초기 나날들을 조심하라! 상대에게 아침 식사를 침대로 가져다주면 평생 그래야 한다. 사랑이 식었느니 배신했느니라는 식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웃음과 망각의 책


그렇다. 서로에게 푹 빠져 눈이 멀은 그들은, 일주일에 네다섯 번씩 함께 시간을 보내기라는 조항을 그들의 사랑의 계약에 주요 항목으로 서약한 것이다. 설령 그것이 둘 모두가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계약된 조항은 쉽사리 삭제하기가 어렵다. 물론 유리도 구슬과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게 되었다고 해서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일주일에 네 다섯번 만나는 것을 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주일에 몇 번 만나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일주일에 다섯 번을 보기로 계약되었던 사랑이 일주일에 두 번으로 줄어들게 된 것은 사랑이라는 계약서를 흔드는 초기 조항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모든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근본적인 질문이 유리의 머리속에 자리잡는다.


'일주일에 다섯 번 보기로 한 것이 두 번으로 줄었어. 이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제 더 이상 나를 그렇게까지 자주 보고싶지 않다는 걸까? 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줄어든 것일까?'


사실은 그 반대이다. 구슬은 유리를 덜 보게 되면서 조금은 무리해서 쓰고 있던 에너지가 비축되어 일을 더 집중해서 할 수 있게 되었고 유리를 만나면서 뜸해졌던 운동도 다시 규칙적으로 갈 수 있게 되었고 친구와 가족들과도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요새들어 제대로 준비를 못해갔던 아침 조회 미팅도 완벽하게 준비하게 되었고, 평상시 좋아하던 책도 다시 신나게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시 각자의 삶의 궤도를 찾으며 지속가능한 둘 사이의 습관과 새로운 사랑 조항들을 서약하며 앞으로는 더욱 돈독해질 애정과 안정적으로 정착할 일만이 남겨져 있었다. 서투르게 맹세해버린 첫 번째 조항의 변동에 둘 중 한 명이 의심을 품지만 않았더라면..


유리는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며 모든 것을 독촉하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구슬은 회사 업무가 바빠지고 유리는 몸살이 났다. 둘 다 연락을 자주하지 못하게 되었다. 유리는 평소처럼 문자를 보내곤 했다.


'몸이 너무 안 좋아. 점심에 병원에 가보려고.'


구슬은 평소처럼 업무 때문에 핸드폰을 잘 보지 못하다가 뒤늦게서야 답장을 했다.


'잘 다녀왔어? 병원에서는 뭐래?'


예전에는 답을 하지 않았어도 아무렇지 않았을 문자 대화가 이제는 어떤 대답이 와도 몹시 거슬리게 된다.


'내가 아프다는데 왜 이제야 답이 오는거지?

어떻게 전화 한 통이 안 올 수 있지? 내 걱정을 하기는 하는건가?'

 

구슬은 유리가 원하던 답을 결국 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어떤 답을 주어도 유리는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구슬이 문자를 받자마자 유리에게 전화를 했다 하더라도 유리는 구슬이 당장 달려오지 않았음에 다시 끝없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말로만 그러는 거 아니야? 진짜 내가 걱정되면 당장이라도 와봐야 하는거 아니야?'

그렇다면 구슬이 달려왔다면 사정이 달라졌을까?


장담컨대 상황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관계는 더 이상 실질적인 무언가를 두고 오고가지 않고, 형체 없는 관념들로 끝없이 흔들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슬은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아픈 유리를 달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유리가 아프기 때문에 연인에게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깨져버린 첫 조항에 대한 변명과 보상을 요구하는 밑도 끝도 없는 공방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구슬은 유리의 끝없는 질문에 고민에 빠진다.


'벌써 나한테 질린거야?', '이제 나한테 관심이 없어졌어?', '내가 아픈데 걱정이 되지 않는거야?'.


당황한 구슬은 찬찬히 유리의 질문을 떠올려본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실수이다. 이 질문들은 실질적인 대답을 고민하라고 만들어진 질문들이 아닌 일종의 항의이자 구슬이 죄책감을 느껴 조금이라도 항소할 여지를 없애려는 심리싸움일 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구슬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퇴근 후 구슬은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내가 유리에게 벌써 질렸나? 글쎄. 난 유리가 좋고 사랑스러운데. 물론 처음처럼 매일매일 보고 싶지는 않아. 그런건가? 내가 벌써 질린건가..?'


이 생각의 오류는 애초에 구슬은 유리가 매일매일 보고싶었던 적이 없다는 점이다. 유리와 구슬 둘 다 서로가 매일매일 보고 싶은 적은 없었다. 다만 하루 중 서로가 보고싶은 순간들은 분명히 있었고, 그런 순간에 그런 표현을 했으며, 아직은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일상을 조절하는 것에 서툴렀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그럼 만날까? 라는 대화로 이어져 둘 다 딱히 거절하지 못해 매일 만나게 된 것 뿐이였다.


구슬은 또 생각한다.


'유리가 아프다니까 당연히 걱정이 돼. 하지만 바쁜 미팅중이였어서 유리가 아픈 거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 유리는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겠지? 유리는 계속 목이 붓고 기침을 하고 열이 났을텐데, 나는 미팅 생각만 하다니.. 유리가 아픈데 나는 정말 걱정이 안 된건가?'


물론 이 생각 역시 옳지 않다. 애초에 유리가 원하는 걱정은 청렴결백하게 다른 어떤 생각도 섞이지 않은 순백의 걱정이고, 어떤 사람도 남에게 그런 걱정을 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질문은 유리가 던졌고, 구슬은 대답을 고민하고 있다. 그렇게 구슬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래, 나는 유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나봐.. 유리에게 정말 미안하다.'


그렇게 구슬은 유리와의 만남과 연락을 조금 더 주저하게 되고, 유리는 더욱더 불안감에 휩쌓인다.


유리와 구슬 사이의 관계가 위태로워지자 유리는 갑자기 구슬을 엄청나게 좋아한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사실 유리는 아플 때 누가 귀찮게 하는 것도 싫어하고, 하루종일 핸드폰을 붙잡고 연락을 하는 것도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데 구슬이 연락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얻지 못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유리는 원하지도 않는 표현과 애정을 갈구하게 된다. 그렇게 유리는 자신이 얼마나 구슬을 좋아하는지 구슬에게 표현하고 강요하며 그에 대한 똑같은 화답을 받지 못함에 구슬을 원망한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있지도 않는 감정을 상대방의 행동으로부터 비롯하여 이끌어낸 다음에 다시 그 감정을 이용하여 상대방에게 어떤 진정된 감정을 만들어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유리는 원하지 않는 것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고 구슬은 자신 안에 없는 것을 상대방에게 주려고 애를 쓴다.


관계는 점점 형이상학적으로 변해가고 더 이상 유리의 몸이 아픈지, 둘이 함께하는 일상이 안정적인지, 둘의 대화가 잘 통하는지, 섹스가 좋은지 등의 실질적인 요소들은 힘을 잃게 된다. 오로지 '나 사랑해?'로 귀결되는 답도 의미도 형태도 없는 관념에 갇힌 관계는 점점 멸망을 향해 간다. 요구하는 사람도 원하는 것을 모른다. 대답해야하는 사람은 질문이 뭐였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결국 구슬은 이렇게 판단한다.


'안 좋아하나봐.'


틀렸다! 구슬은 여전히 유리가 사랑스럽고 유리를 보면 웃음이 난다. 유리도 여전히 구슬과 같이 있고 싶고 구슬을 보면 꼭 껴안아주고 싶다. 그렇지만 둘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게 며칠간 관념싸움을 이어가던 이 안타까운 커플은 주말이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만나자 마자 서로에게 끌리고 또 섹스를 하게 되었다. 유리와 구슬은 서로 꼭 껴안고 눈을 맞추고 체온이 닿는 그 순간이 너무나 황홀하고 행복하다. 한 번 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데 이 기회를 유리가 또 발로 뻥 차버린다.


'날 안 좋아한다면서. 나랑 섹스하는 건 좋은가봐. 이럴려고 나를 만나는 거구나..'


구슬은 유리의 일침에 KO되었다. 사실 먼저 발을 뺀 쪽은 유리였다. 구슬이 자신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음에도 유리는 죄책감을 부여하여 도덕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고수하기 위해 화룡점정으로 마지막 일침을 가한 것이다. 유리는 불쌍한 쪽을 택한다. 구슬은 유리의 압박에 무릎을 꿇고 스스로를 세뇌한다.


'그래, 나는 몸 때문에 유리를 만나 온 쓰레기야.'

 

하지만 구슬 역시도 이와 같은 위치가 그리 불쾌하지만은 않다. 어딘가 승자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은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위치를 찾은 채 헤어짐을 합의한다. 이렇게 유리구슬은 시시하게 깨져버린다.


나는 때로는 유리가 되기도 하고 구슬이 되기도 한다. 이 두 역할의 설정은 결국은 타이밍일 뿐이다. 아주 약간 더 한가하고 생각할 겨를이 많은 사람이 먼저 첫 번째 조항의 변동을 감지한다. 내가 지금까지 겪어 본 첫 번째 조항의 내역은 끝도 없이 다양했다; 매일 밤 자기 전 장문 메시지 보내기, 다른 이성과는 절대 만나지 않기, 아침차려주기, 자기 전에 사랑한다 말하기 어쩌고 저쩌고...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사랑의 증명과는 거리가 멀며, 없어진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 무의미한 것들이 사랑을 박살내는 위력을 갖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들은 너무나 무의미한 나머지 오로지 의미와 상징으로만 가득 차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상징적으로 연애하지 말 것.

상대방과의 관계로부터 비롯하여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설정하지 말 것.


현명한 연애를 하기 위해 내가 세운 철칙 중 하나이다. 타자와 자신의 위치로부터 설정된 감정과 욕망은 형체 없는 상징일 뿐이다. 상대방이 주체가 되어버린 욕망은 아무리 먹어 치워도 허기를 느끼는 에리식톤처럼 결국에는 자신의 몸까지 먹어뜨리고 입만을 덜렁 남긴다.


집에 데려다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사랑이 흔들렸다면, 그것은 실제로 집에 데려다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상징때문이다. 집에 데려다주는 행위 자체가 실질적인 의미를 가질만큼 사랑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요소라면 떳떳하게 요구하면 된다. 아무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떠오르는 상징의 모든 부분을 낱낱히 파헤쳐 해석하려 한다면 모든 알맹이를 까고 났을 때에는 마트료시카의 마지막 인형처럼 아주 손톱만한 진실만이 남을 뿐이다. 모든 연애적 사랑은 어쩌면 상징뿐인 착각일지도 모르겠다. 관념이야 말로 연애적 사랑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념적 사랑을 뛰어넘을 때야 말로 단단한 사랑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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