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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3. 2019

[책]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

두 번 다시 땅에 발을 대지 않기로 다짐한 남작의 이야기


한국에는 '나무 위의 남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된 칼비노의 소설을 파리의 한 서점에서 샀다. 매트한 무광지의 감촉과 표지의 신비로운 나무 일러스트가 마음에 쏙 들었다. 요새 민음사에서 출판 된 칼비노 전집을 한 권, 두 권 읽던 중에 파리에서 마주친 칼비노 책은 반가웠다. 직전에 읽은 칼비노의 '팔로마르'는 다 읽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이 책도 느린 호흡으로 읽을 준비를 하며 찬찬히 마음을 가다듬었는데 간만에 책을 손에서 놓치 못하고 앉은 자리에서 수십 페이지씩 읽어냈다.


Penguin Classic


나무 위의 남작은 시각적인 소설이다.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보듯이 서사는 풍경으로 펼쳐진다. 읽는 동시에 바로 시각적으로 인식되는 장면들 중 유난히 섬세하고 유쾌했던 풍경들이 있다.


- 누이가 달팽이 요리를 하려고 잡아 놓은 달팽이들을 구출시키기 위해 형제는 작전을 펼친다. 달팽이가 갇혀 있는 통에 작은 구멍을 낸 다음, 풀과 꿀을 섞어서 달팽이들이 따라올 수 있는 길을 만든다. 이 길을 따라서 달팽이들은 지하실 바닥으로, 창문 밖으로 기어 나간다. 느릿느릿 바닥과 벽을 타고 탈출하는 달팽이들을 보며 형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빨리 움직이라며 소리를 지른다.


- 달팽이 구조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고 식탁에 올라온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며 형은 나무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는 내려오지 않겠다고 말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을은 뺵빽하게 나무가 차있어 땅을 밟지 않고 나무만 타고 여기 저기로 이동할 수가 있다. 올리브 나뭇가지에서 무화과 나뭇가지로, 낮은 가지에서 높은 가지로, 뺵빽한 잎을 지나 엉성한 덩쿨들을 타고 다니는 남작의 시선이 그대로 내 눈에 투사되듯이 서사가 펼쳐진다. 


- 형이 나무 위에서 모든 생활을 하며 여러가지 물건들을 갖추며 산다. 가끔씩 글을 쓰는 그에게는 활자세트도 있었는데 알파벳 Q는 '둥글고 꽃자루가 달린 것처럼 보여 과일로 생각하고 다람쥐들이 자기 굴로 가져가' 그 뒤로는 Q가 쓸 자리에 C를 대신 써야 했다. 탐스럽게 입은 둥근 몸과 튼튼한 꽃자루처럼 삐쳐나온 Q는 어떤 폰트의 Q였을까? 


- 사랑에 실패한 형은 한동안 '모든 나무의 나뭇잎을 꼭대기부터 모두 따서 눈 깜짝할 사이에 마치 겨울철이 된 것처럼 나무의 옷을 벗겨놓아 버렸다.'


이런 장면들은 단어와 문장을 넘어서 장면과 풍경으로 내 머리속에 각인되었다.


나무 위의 남작은 한 인물의 일대기이기도 하다. 달팽이 요리를 거부하며 나무에 올라간 남작은 평생 땅을 밟지 않는다. 나무 위에서 청년이 되고, 사랑을 나누고, 성숙해지다가, 또 늙고 병들고 약해진다. 파리에 있는 동안 머물었던 친구집에서 밤마다 저녁을 먹을 때면 나는 내가 책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지금은 옆집 여자애한테 첫 눈에 반했어.', '요새는 매일 사냥을 해.', '지금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어.', '지금은 병들고 아파.', '지금은 할아버지가 다됐어.' 하는 식이였다. 관찰자의 시점으로 전해지는 서사는 한 인물의 일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파리의 공원만 가면 나무를 타고 싶었다. 어렸을 때 꽤 나무를 잘 탔던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나무를 탄게 아마 초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하늘 위라고 하기엔 너무 낮고 지상보다는 조금 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의 삶. 나무 위의 남작은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시야에서 그려지는 현실과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완전히 미치지도 정상적이지도 않은 인물의 일대기이다.




코지모 형은 나무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서 본 세상은 밑에서 보던 것과 완전히 달랐고 하나같이 재미있었다. 정원에 난 오솔길들은 모습이 영 딴판이었고, 꽃밭이며 수국과 동백꽃, 그리고 정원에서 커피를 마실 떄 쓰는 철제 식탁도 마찬가지였다. 더 멀리 갈수록 나뭇잎이 성글어졌고 텃밭은 돌을 쌓아 게단식으로 만든 조그마한 밭들과 합쳐졌다. 언덕 듬성이는 올리브 숲 때문에 어두컴컴했으며 그 뒤로는 옴브로사 집들의 색 바랜 벽돌 지붕들이 보였다. pg25(민음사)


어디로 갔을까? 그 때 형은 감탕나무에서 올리브나무로, 너도밤나무 위로 달리고 또 달리며 숲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숨을 헐떡거리며 멈춰 섰다. 그의 밑에는 풀밭이 펼쳐져 있었다. 낮은 바람 때문에 풀밭은 미묘하게 변해 가는 초록빛으로 물결쳤다. 

~

이제 형은 보다 섬세하게 그 영영 속으로 침투하고 싶고, 이파리와 나무껍질과 꽃술과 새들의 날갯짓과 직접 연결되어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을 사랑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총 끝을 겨누는 것 말고는 달리 그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사냥꾼의 사랑이었다. pg86(민음사)


사랑의 미덕 중 가장 새로운 것은 아주 단순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형은 그 때 자신이 평생 그렇게 단순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pg225 (민음사)


모두 멋진 일이었지만 난 그 시기에 우리 형이 완전히 미쳤을 뿐만 아니라 또 약간 멍청해지기 시작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는 아주 심각하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광기는 선이나 악으로 성격이 강하게 변하는 것인 반면 저능은 상대할 것이 없는 허약한 성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pg311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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