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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설픈 비건 Oct 14. 2019

[책] 사라는 즐겁다

한국사회의 금서, '즐거운 사라'


2017년도 가을쯤 마광수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그가 자살한 명확한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비극을 이끈 시작으로 1992년에 출판 된 '즐거운 사라'라는 책이 자주 거론된다. 이 책은 출판 후 판매금지 되었고 아직까지도 정식적으로 구입할 수 없다. 마광수 선생님은 이 책 때문에 음란문서 유포 혐의로 구속되어 형도 지내셨다. <즐거운 사라>는 외설스런 내용의 소설을 썼다는 이유로 저자를 구속한 세계 최초의 사례이기도 하다. 포르노사이트에 강간물 카테고리가 버젓이 있고, 대학이나 직장내에서 권력을 이용한 성폭행이 흔하디 흔한 나라, 간호사들에게 탱크탑과 핫팬츠를 입히고 환자들 앞에서 위문 공연을 강요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대체 얼마나 외설스런 내용을 썼길래 그는 자신이 쌓아온 모든 명예를 무너뜨리고 결국에는 죽음까지 초래한 이 비극을 짊어지게 된 것일까?





원래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싶은 법. 애초에 금기는 깨라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말만 안 하셨다면 우리는 이브와 함께 에덴 동산에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중고나라에서 10만 원 정도면 이 책을 살 수 있다. 다행히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 있었다. 내가 빌린 즐거운 사라 판은 표지에 마광수 선생님 사진이 크게 박혀 있다. 왠지 죽은 사람 얼굴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상하기만 했다. 박완서 선생님 얼굴을 볼 때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자살은 어딘가 비극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렵다. 




여성이 성적 주체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여성을 위한 성적 언어가 필요하다.

이 책을 보는 동안 주변사람들이 자꾸 내가 책을 보고 웃고 있다는 말을 자주했다. 나는 이 책이 너무 유쾌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야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포르노그래피적이다. 1인칭 시점의 주인공 사라는 야한 여자다. 사라는 야한 옷차림을 즐기고 성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심이 충만한 여자다. 사라에게는 섹스와 오르가즘 그 자체가 주제이며 그를 실현하는 다른 것들은 모두 객일 뿐이다.

"남자와 결부되지 않는 섹스, 아니 섹스라는 단어 자체와도 결부되지 않는 오르가즘, 그 오르가즘의 정체에 대한 관심이 요즘의 나를 온통 사로잡고 있다." (pg 12)

"어쭈, 이 사람이 되게 나를 무시하네. 내가 몸을 가꾸면서 제일 노력하는 게 바로 관음증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성 대상이 되려는 것인데...." (pg 222)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없다. 왜냐면 그녀 자신이 그 소비를 기획하고 연출하고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능동성은 그녀가 부유한 집안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급 살롱에서 일을하며 호스티스 여자로서의 프로 의식을 발휘할때, 야한 옷차림을 했다는 이유로 강간에 가까운 상황을 당할 때의 유유자적한 대처와 역으로 자신을 강간하려던 상대를 압도하는 주체성에서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페미니즘적이다. 다만, 나는 이 책을 사회정치적인 맥락이 아닌 문학적인 맥락에서 읽을 것을 권한다. 살인이나 범죄 같은 소재는 사회적인 맥락과 틀을 벗어 던지고 영화나 책에서 자유롭게 날개를 펼칠 수 있는 데에 반해 성에 대한 상상력은 너무나 제한되어 왔다. 혹은 남성 중심적인 포르노그래피 안에서만 향유되어 왔다. 이 책은 여성 중심의 포르노그래피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선구적이다. 

"말이 호스티스지, 결국 벗어버릴 걸 가지고 꼭 스튜어디스 유니폼같이 생긴 멋대가리 없는 정장 차림의 옷을 곱게 차려입고 앉아 잔뜩 점잔을 빼면서, <나는 원래 이런 데 나올 여자가 아니에요>하고 위세를 부리는 듯한 표정으로 폼만 재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가.
~
도대체 우리나라의 호스티스들은 서비스 정신은 물론이고 프로의식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호스티스뿐만이 아니다. 웨이터들도 그렇고 웨이트리스들도 그렇다. 택시 운전사나 대학교수나, 기타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다. 해주는 건 없이 돈만 거저 먹으려고 든다. 그런 점에서 볼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지무지하게 착한 아이요 양심적인 호스티스임에 틀림없다. 
~
그래서 나는 손님이 나를 몹시 거칠게 다루거나, 혹시 팁이 적더라도 불평을 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내가 팁을 한 푼도 못받는다 해도 불평을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조차 든다. 공짜로 술 마시고, 공짜로 안주 먹고, 공짜로 남자를 주물럭거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어디냐 말이다." (pg 256)


사라는 여유로운 집안에서 자라 미대에 입학하고, 이제 막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 혼자 덩그러니 한국에 남게 된 여대생이다. 그녀는 이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어나는 걸 해방으로 여긴다. 그녀는 가부장제를 싫어하고, 특히 아빠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아예 오늘부터 성을 오가로 바꿔버릴까.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조상님들을 내가 하늘같이 공경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성이라는 것이 무조건 아버지 성만을 따르도록 되어 있다는 게 영 불쾌하게 느껴지던 터였다. 왜 어머니의 성을 따르지는 못한단 말인가. 아니, 조상이니 족보니 하는 게 대체 무엇이길래 그토록 성씨나 혈통을 소중히들 생각하는 걸까, 그냥 자기가 주체적으로 성을 만들어 낼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pg.14)

"그렇지만 내가 집안에 혼자 파묻혀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한 기분은 가정주부의 편안함과는 확실히 달랐다. 아무래도 거리가 있었다. 나는 완전히 혼자이고 싶었다. 가정주부는 낮에만 혼자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결혼을 통해 집안에 들어앉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나지 않았다."(pg 71)

혼자서 살게 된 사라는 신이 난다. 그녀는 지적 호기심이 많고, 성에 관해서도 그렇다. 이 남자, 저 남자와 자보고 싶고, 그들을 유혹하는 일이 재밌기만 하다. 그렇다고 꼭 잠자리가 가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사라는 잠자리에 가기 전까지의 유혹과 남자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반응들을 즐긴다. 혹은 두 성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이나 관계에 흥분한다. 그녀가 궁금한 성은 물리적인 섹스가 아니라, 전체의 과정에서 비롯되는 순전한 그 감각 자체이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여성에게는 성에 대한 언어가 너무 모자라다는 생각을 했다. '섹스'나 '잠자리'라는 단어에는 필연적으로 남자의 페니스가 삽입이 되는 단계가 포함되어 있다. 물고 빨고 할 짓을 다해도 '삽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잤어'라고 말할 수 있다. 혼전순결을 지킨다는 어떤 기독교자가 결혼 전에 애널 섹스를 즐긴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것도 섹스라는 개념에서 페니스와 삽입의 유무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게이 섹스라는 용어는 직관적으로 생각하고 레즈비언 섹스에 대해서는 '그래서 둘이 어떻게 하는데?'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던가. 이미 남성 중심적으로 형성 된 성적 언어에서 여성의 섹스는 어떻게 능동적으로 표현되고 획득될 수 있을까?

남자의 성적 쾌락은 사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 때문에 페니스 자체가 성적 쾌락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자는? 여자입장에서는 그 구멍에 당근이 들어오건 오이가 들어오건 페니스가 들어오건 사실상 물리적 차이가 없다. (클수록 좋다는 통념도 여자들은 잘 동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자의 성적 쾌락은 어디에 있는가? 이는 개개인마다 모두 다를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성적인 어필을 할 때 흔히들 '유혹한다' 혹은 '꼬리를 친다' 같은 어휘를 쓴다. '은밀하게', '은근슬쩍' 같은 형용사도 찰떡궁합처럼 잘 붙어 쓰인다. 그리고 그 단어에는 수동적이거나 부정적인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로 수동적인 것일까? 섹스에 있어서 넣는 성과 받아들이는 성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완벽한 양성평등이 쟁취되어도 여자로 태어났다면 페니스가 없다. 그러한 물리적 차이를 감안한다면 여자는 마치 태생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인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사라는 그 자체를 선택하고 즐기는 일종의 '능동적 수동성'을 택한다. 수동성이 강요되는 상황이 아닌 개인의 성적 취향으로서 발현되고 선택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사라의 '마조히스트'적인 성적 쾌락은 단순히 생각하면 그녀가 결국에는 수동적인 성적 주체가 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구조 안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성적 주체의 위치이기도 하다. 그녀의 '마조히즘'은 지극히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구상 된 '마조히즘'이지 누군가가 강압적으로 그녀를 대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팔을 꽉 쥔 것은 폭력이라고까진 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나는 힘으로 여자를 누르려 하는 남자는 무조건 싫었다. 내가 기철에게 오랜 기간에 걸쳐 비교적 푸근한 신뢰감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몸이 약한 편에 속하고 폭력 따위와는 아예 거리가 먼 남자였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pg 82)

"남녀평등을 주장하면서, 섹스에 있어 남녀간의 성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pg 70)

삽입이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여자는 받아들여야 하는 입장이 되지만, 그 전에 '꼬리를 치고', '은밀한 유혹'을 하는 과정에서 여자는 주도권을 쥘 수 있다. 섹시한 여자의 은근한 유혹에 남자가 안달복달 어쩔 줄 몰라 하고, '우리집 비었어' 라는 문자를 연인에게 보내면 하나같이 '지금 당장 갈게'라고 답이 오는, 이러한 과정도 여자에게는 성적 쾌락이 존재하는 섹스의 도입부라고도 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남자들끼리 속 된 말로 잠자리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실패했을 때, '줄 것처럼 굴더니 안 준다', '비싼 척을 한다'라는 말을 쓴다. 요새야 커플 사이에서도 강간이 성립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 되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텔까지 따라 왔으니까, 혹은 '부부', '연인' 사이니까 섹스가 허용된다고 생각하는 일이 흔했다. 

섹스에 있어서 여자의 주체성과 쾌락은 완전히 배제되어 왔다. '삽입'이 없고 전희만 있는 섹스란 남자에게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일지 모르지만, 여자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쳐다보는 것을 원할 수도 있고, 만지는 걸 원할 수도 있고, 특정한 언행을 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성적 행위는 삽입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가 아닌 그 자체로서의 오르가즘과 성적 쾌락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형태의 섹스를 원하는 지 당사자간의 의사소통은 필수적이다. 남자의 성적 쾌락이 페니스에 집중되어 있다는 전제하에 그들의 표현은 더 간편하다. '너랑 자고 싶다' 라는 말과 몸짓에는 '너에게 삽입하고 싶어'가 필히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설명할 언어조차 없으며, 그 시도조차도 때로는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된다. 그것을 요구하고 표현하면 야하고 헤픈 여자가 되어 버린다. 사라 역시도 대내외적으로 유명한 야햐고 헤픈 여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라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고 요구한다. 기꺼이 야한 여자가 되고 더 야한 여자가 되길 바란다.

"얼근한 취기와 함께, 남자의 페니스에 의해서 어루어지는 싱거운 오르가즘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지속적인 오르가즘이 찾아 왔다." (pg30)

그런 능동적인 사라와는 대조되는 인물이 책 속에 한 명 등장하는데, 그건 사라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우연히 사라가 일하던 나이트 클럽 업장에서 다시 마주 친 정아라는 친구다. 정아는 사라와는 다르게 어릴적부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산전수전을 다 겪은 인물로 그려지며, 사라는 그런 정아가 성적으로 빨리 성숙하게 되었음을 예전부터 부러워한다. 정아는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남자와 불륜의 관계를 유지하는 중인데, 사라는 이 둘의 관계에 호기심을 느낀다. 정아의 애인은 정아에게 안정적인 생활과 집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정아로부터 자신의 변태적인 성욕을 채운다. 정아는 애인의 변태적인 성욕에서 쾌락이나 즐거움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총체적으로 그녀가 얻게 되는 안정적인 생활에서 큰 만족을 느끼며 행복해 한다.

"하지만 정아와 여러 날에 걸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 보니 정아가 불감증 환자가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정아는 다만 섹스에 대해 지독하리만치 수동적인 자세로만 일관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을 뿐이었다. 말하자면 정아는 정말 보기 드물게 선천적으로 타고난 매저키스트였던 것이다.
아니, 단지 매저키스트라고 표현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여자 매저키스트라면 남자한테 육체적으로 학대를 받을 때나 남자에게 정신적으로 절대 복종을 할 때 일종의 독특한 <쾌감>을 경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렇지만 정아는 그러한 독특한 쾌감조차 별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여자 같아 보였다. 김승태와 육체관계를 할 때 그저 아픈 느낌을 가질 정도라면, 그녀는 오로지 남자의 쾌감을 위해서 봉사하는 불쌍한 노예일 뿐이다. 그렇지만 정아는 자기 자신이 불쌍한 노예라는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정아는 <불쌍한 노예>가 아니라 <행복한 노예>인 셈이다. "


사라는 성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남자에게 수동적으로 기대는 정아를 바라보며 의아해한다. 그녀는 사라처럼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남자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을 남자의 능력과 교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자존심을 상해 하지도 않는다. 이런 정아도 능동적인 주체로 바라볼 수 있을까? 어찌되었건 그녀는 <행복한 노예>이지 <불쌍한 노예>는 결코 아니다. 그녀는 사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나는 야하긴 야해도 천한 여자처럼 야하게 보이는 건 싫어.'

그렇게 성향이 상이한 사라와 정아의 관계는 우정에서 끝나지 않고 성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 관계는 곧 정아의 애인까지로 확대되고 사라는 셋과의 성적 관계를 즐긴다. 정아와 애인의 관계가 사라를 포함한 셋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정아와 그녀의 애인이 유지하고 있었던 갑을 관계가 역전되는 순간이 오는데, 셋이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의 장면이다. 정아의 애인은 방에서 식사를 할 때면 둘에게 자신의 페니스를 빨게 한다. 제주도 여행은 정아의 애인이 전적으로 비용을 대주고 떠난 럭셔리 여행이였고, 사라는 그의 변태적인 성욕을 흔쾌히 받아들여준다(사라는 그와 관계를 갖기 전에도 정아에게 그의 변태성욕을 들으며 부러워한다). 그러다가 사흘째 되는 날 사라는 생각이 조금 바뀐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아무래도 여자 쪽이 너무 밑지는 장사를 하는 것 같아, 정아와 나는 김승태를 식탁 밑으로 기어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는 조금 투덜대다가 결국 우리 두 사람의 명령에 따라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좀 늙은게 흠이긴 하지만, 어쨌든 남자 노예의 서비스를 받아가며 다정한 자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음식을 먹어주면서 한껏 유쾌하게 미각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pg 155)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 아가씨의 김태리와 김민희의 관계가 떠올랐다. 성적으로 갑이였던 남자들을 뿌리치고는 결국은 둘이서 오롯한 관계를 유지하고 남자들을 벌하는.

<즐거운 사라>는 여자여서 부여되는 모든 관습적 프레임은 벗어 던지고, 오로지 여성이기에 향유할 수 있는 유미적 집착, 성적 관계에서의 여성의 즐거움과 욕망, 수동적인 판타지들을 남자에 대한 종속 없이 이야기한다. 드라마 섹스앤더시티가 짜증나는 이유는 개방적인척 하면서 여자 넷이 섹스 얘기가 아니라 지들이 사귀고 있는 남자 얘기만 계속 한다는 것이다. 즐거운 사라에서 남자는 객이다. 자신의 성적 쾌락과 여성성을 위한 조연일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즐겁다.



성과 죽음의 아주 오래 된 은유

아무튼 사라는 이런 사람이다. 성적 호기심은 어떤 방향으로도 열려 있으며, 자기 중심적으로 그것을 쟁취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그렇지만 사라는 마음 한편으로는 남자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그런 지적호기심을 떨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정말로 사랑하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게 하는 그런 사람과의 완벽한 사랑과 섹스를 꿈꾼다. 그런 그녀에게 우연히 등장한 한지섭 교수는 수업 중에 야한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 구구절절 늘여 놓으며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녀는 서서히 한 교수에게 홀라당 빠져버린다.

"이 교실에 있는 수강생 중에는 문학을 하는 친구도 있고 미술을 하는 친구도 있는 것 같은데, 진짜 예술을 하려면 사랑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하긴... 누구나 사랑을 하긴 하지요. 하지만 내가 말하는 사랑은 그런 뜨뜻미지근한 사랑이 아니라 야한 사랑이에요. 겉과 속이 똑같은, 다시 말해서 본능적 욕구와 실제 행동이 똑같은 것이 바로 예술가적 정열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야한 사랑이란 말입니다." (pg 188)

그녀는 그와의 성적 관계를 상상하며 자신의 욕구를 폭발시킨다.

"아니, 피아노 전체를 도끼로 힘껏 까부숴도 돼요.
예술의 찌꺼기여 쾅,
하나님의 찌꺼기여 쾅,
역사의 찌꺼기여 쾅.
민중을 짓밟는 부르주아의 찌꺼기여 쾅.
자유 민주주의의 찌꺼기여 쾅.
<악의 꽃>의 찌꺼기여, 쾅.
백남준 사기극의 찌꺼기여, 쾅.
내 생명의 가쁜 호흡이여, 쾅.
사랑하는 사랑하는 나의 피아노여, 쾅.
정말 좆 같은, 씹 같은, 이제사 속시원히 까부숴진 피아노여, 쾅.
당신이 나를 피아노라고 생각하고 부숴뜨려 주신다면 나는 행복하게 죽을 수 있어요. 그러면 정아도 김승태도 기뻐하겠지요. 아니 기철이까지도 기뻐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동안 나는 너무 시건방진 계집애였으니까.
그러면 기철이나 정아나 김승태는, 그리고 가난하고 억압받고 착취받는 인간들, 아니 요즘 말로 <민중>들은 내 시체를 신나게 물어뜯을거에요. 우리 아버지도 나를 물어뜯을 거예요. 나의 사지는 온통 뜯어 발겨지겠지요. 내 온몸은 피로 얼룩 범벅이 되어 요염하고 섹시한 빛을 내겠지요." 
(pg.193)


사라가 교수를 상상하며 머릿속으로 배출해내는 문장들은 예술, 종교, 역사와 같은 문명에서 시작하여 결국에는 가장 원초적인 본능으로 이어진다. 성과 죽음이라는 두 가지 분열 된 본능이 아닌, 겹쳐져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투영하는 밀접한 은유로서의 성적 쾌락과 죽음과 폭력에 대한 욕구. 우리는 섹스를 할 때 내는 소리를 신음소리라고 말한다. 신음소리는 사실 고통스럽고 아플 때 내는 소리인데도 말이다. 죽음을 피하려는 욕구, 나는 죽더라도 나의 자손은 남기려는 어떤 본능적 의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갈망, 이 끝없는 삶의 고통을 끝내고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욕구. 이 근본적인 성과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욕구는 인간과 아주 오랫동안 함께해 왔다. 최초의 그림으로 알려진 라스코 벽화에도 내장을 쏟으며 죽어가는 들소 앞에서 발기 된 성기를 내밀고 있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는 서로 죽였다 예쁘게
박제된 백조같이
낭자하게 피 흘리는
복날 개같이
~
한껏 음란하게 
우리는 서로를 죽였다.

영화같이" (pg 211)

"사랑이란 마치 전쟁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사랑이나 전쟁이나, 힘 또는 폭력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투입하는 행위라는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다. 자웅이 다른 두 개의 개체가 만나 서로 엉겨붙어 상대를 탐색하고 압살하는 행위가 바로 사랑이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고, 깨물어 뜯고 꼬집어 뜯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서로의 존재가 죽음에 의해 완전 소멸해 버리지 않을 정도까지만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인류가 발명해 낸 최상의 스포츠가 바로 전쟁인데, 그것은 사랑과 너무 많이 닮아 있다. 철저하게 동물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에서, 이데올로기나 정신적 결합을 핑계로 가자의 은밀한 욕정을 충족시키려 드는 행위가 바로 전쟁이요, 사랑인 것이다."  (pg 298)



오로지 원초적인, 
그 자체로서의 섹스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한, 사라와 비슷하지만 더 경험과 연륜이 있는 인물로 그려지는 한 교수는 사라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사라에게 미리 애기해 주는 게 낫겠지. 현재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래. 사랑은 본질적으로 어떤 대상을 추구하는 게 아니야. 사랑은 오직 <자기만족>을 추구할 뿐이야. 말하자면 내가 너에게 반한 것은, 나 혼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보다 사라가 나의 자위행위를 도와주는 게 훨씬 더 재미있을 것같이 생각됐기 때문이지. ... 대부분의 인간들이 이성을 사랑하고 이성에게서 성적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은 오로지 습관 때문인 것 같아. 아니,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사회적 억압이나 세뇌작용 때문이라고 보는 게 낫겠지. 왜냐하면 사회는 개인의 성욕을 번식에 이용하고자 하기 때문이야. 그래서 이 사회는 윤리나 도덕이나 관습 같은 것을 통해서, 성욕이 사회적 목표인 번식과 반대 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어. 그래서 어찌 보면 동성연애도 변태가 아니라고 볼 수 있어. 동성간이든, 이성간이든, 서로서로 자위행위를 도와주기만 하면 되니까 말야. 결국 모든 사랑은 자위행위의 연장인 셈이고, 이성과 함께 하는 자위행위가 좀더 재미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의 짝을 찾아 이리저리 게걸스럽게 헤매다닌다고 볼 수 있지." (pg 282)

한 교수는 오로지 성은 그 자체로서 가장 중요하고, 스스로 성에 대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관계와 사랑이 발현된다고 이야기한다. 이 사랑의 전제에서는 이성 간의 사랑이건 동성간의 사랑이건 둘 중 무엇이 더 진실되고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출산을 해야한다는 사회적 억압과 목표가 일종의 학습 된 성적 대상을 추구하게 만든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실제로 지구상의 동물 중 약 1500여종에서는 동성애가 발견된다. 동물들 조차도 종족번식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본능을 뛰어 넘는 성적 쾌락이 존재한다는 반증 아닐까? 동성애가 마치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성적 쾌락만을 위한 동성애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종족 번식을 위한 본능과 상충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종족 번식이라는 본능이 내재되어 있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행하기 위한 행동 사이에는 엄청난 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 개체가 한 세대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종족 보존이라는 기나긴 역사 속 시간의 밀도를 느끼지는 못한다. 어느 누가 섹스를 하면서 "내가 지금 대를 이을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어!" 라는 생각 때문에 쾌락을 느끼는가. 종족 번식의 본능이 내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성적 쾌락으로 발현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럽다는 이야기다. 종족번식을 체감할 수 있는 현실적인 시간이 수명에 비해 부족하기 때문에 결국 동물들은 번식에 대한 본능보다는 성적 쾌락에 대한 본능을 통해 관계를 진화시켜 왔을 수 있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동성애는 지극히 자연발생적이다.

번식만을 위한 섹스를 떠올릴 때면 나는 조지 오웰이 쓴 디스토피아 소설 1984가 떠오른다. 소설 속에서 당원들은 섹스를 하며 쾌락을 가지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 그들은 오로지 기계적으로 섹스를 해야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 물론 누군가와 썸을 탄다거나 로맨틱한 관계가 유지되는 것도 완벽한 금기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입술을 대면 본능적으로 뻣뻣하게 굳어버리면서도 섹스를 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아내를 끔찍하게 여긴다. 

섹스와 성, 더 나아가서 사랑은, 과연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대를 잇고, 인구를 늘리는 생산성을 위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오로지 죽음에 대한 은유,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깊은 욕구, 그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랑은 곧 섹스라는 책 속 한 교수의 극단적인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국 사회에서 성은 너무 오랫동안 금기시 되어 왔고, 성의 중요성이 사랑 혹은 관계에서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긍정하면 순수하지 못한 사랑으로 여겨져 온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1992년도, 20년도 더 전인 그 때 이 소설이 쓰였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무엇이 이 책을 금지하게 되었는지 금방 납득이 간다. 그리고 오늘을 떠올려보았을 때, 과연 우리 사회의 성은 이제는 건강한가? 오히려 음지에서 더 뒤틀리고 그릇되게 발현되고 있지는 않은가? 마광수 선생님이 즐거운 사라를 통해 시도하려고 했던 문학적인 카타르시스는 강렬하고 건강하다.


우리 사회는 사라 같은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성에 대해 툭 까놓고 이야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사라가 자신의 성적 쾌락을 탐구해가는 수많은 상황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나는 한 개인으로서 나 스스로의 성적 쾌락을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한 것이지만, 누구나 하고, 누구나 가지고 있고, 누구나 배출해야만 하는 그런 욕구와 상상력에 대해서 말이다. 그나마도 남성들은 남성 중심적인 포르노그래피를 통해 배출할 구멍이라도 있지만 여성 중심적인 포르노그래피는 전무후무하다. 



즐거운 사라는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사라의 즐거움은 성에 대한 주체성에서 온다. 하지만 현실에서 여성은 그렇게 쉽게 '사라'처럼 사고할 수는 없다. '사라'라는 개인은 이미 남성중심적으로 빚어진 구조 안에서 성장했고 생활하지만, 그런 구조를 성과 완전히 분리해서 사고하고 행동하는 유니콘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즐길 수 있는 최선의 섹스는 '능동적 대상화'였다. 


한 개인이 혼자만의 수행성으로 구조에서 비롯되는 권력관계를 막고 대상화를 벗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양성평등이라는 이름 안에서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구조적으로 쟁취될 수 없는 주체성을 스스로 쟁취해내라고 강요받고 불평등한 성역할의 원인이 그들에게 있다고 평가받는가? (군대를 다녀와라, 경력단절은 단순히 능력차이에서 비롯된다 등) 여성은 여전히 구조 안에 있다. 권력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조차 을에게 책임을 묻는다. (왜 그런 옷차림을 했는가? '맞을 짓'을 했는가? 등) 그런 현실에서, 사라라는 인물이 구조 자체를 뒤집는 것이 아니라 구조의 일부로써 '알파'의 위치를 우회적으로 얻어내는 것이 일종의 판타지이자 여성이라는 '피기득권층'이 성적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포르노그래피로 읽혀진다.  




나는 자살을 슬프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을 향해서 끝없이 돌진해 가야만 하는 인간이 주체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능동적인 행동이 바로 죽음에 대한 선택 아닌가. 그렇지만 마광수 선생님의 자살이 자꾸만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즐거운 사라에서 읽은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일 것이다. 

"자살이란 결국 최후의 데먼스트레이션이 아니더냐. 그럴 듯한 명분을 내걸고 하는 분신자살이든, 연애 또는 세상살이에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뒤에 죽어버리는 비관자살이든, 모든 자살은 다 일종의 시위행위이다." (pg 347)



문학이 준엄하고 결벽한 교사나 사제의 역할, 또는 혁명가의 역할까지 짊어져야만 한다면, 문학적 상상력과 표현의 자율성은 질식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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