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이 누구니
금요일은 7살짜리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가는 날이다. 아직 앉아서 10분도 못 앉아 있는 애한테 한 시간 과외는 무리기 때문에 사실상 영어 몇 마디하다보면 시간은 뚝딱 간다. 이렇게 수업하고 돈을 받아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만큼 ‘가르침’이랄 것이 없지만 시장은 그저 수요와 공급일뿐. 아이 어머니는 미술을 전공한 영어 선생님의 ‘창의적 수업’을 동네에 이야기해 어느덧 그 단지의 오만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다 똑같이 예쁘고 착한 아이들인데도 수업을 연달아 하다보면 아이들을 비교하게 된다. 아무리 coin을 읽어줘도 백날 corner로 기억하는 아이는 한 번 말해 알아듣는 아이보다 덜 예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어떤 수업은 더 웃고 어떤 수업은 덜 웃게되는걸 보면서 매번 마음을 다잡자고 반성했다. 성격은 누적이다. 이쁜 애를 이뻐하면 그 아이는 더더 이뻐질거고 밉다고 미워하면 그 아이는 더더 비뚤어질테니, 아무리 사소한 수업이라도 선생님의 위치는 막강한 힘이 있다. 그 사실을 까먹어서는 안된다.
한 번은 내가 평상시 제일 이뻐라하는 집 수업은 모두 캔슬이 나고 제일 답답해 하는 어린이 수업만 남았다. 마음을 다잡고는 수업을 시작한 지 십분만에 동전이 그려진 단어카드를 또 corner라고 읽는 우리 어린이를 보니 짜증이 밀려온다. 아아 대체 나같은 건 선생님을 하면 안되는데. 더더구나 이 어린이는 아직 영어를 잘 못해서 가끔은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단어로만 말을 하기 때문에 dad me candy! 대충 이렇게 말하면 ‘아빠가 나한테 사탕을 줬다’ 아니면 ‘아빠가 나랑 사탕을 먹었다’ 정도로 때려맞춰야한다.
미취학아동의 하루는 꽤나 따분하기 때문에 나는 아이의 표현을 얼추 다 때려맞추며 대화를 이어왔다. 그런데 오늘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sucker!!’ (병신과 비슷한 비속어인데 suck = 빨다는 뜻이기 때문에 섹슈얼한 의미도 내포한다) 이라고 외치는게 아닌가.
‘Teacher!! Sucker! Sucker! I like balls! Me sucker king!!’
내 머릿속으로 유추되는 뜻을 절대 이 어린이가 의미할리는 없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하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7살짜리 아이가 불알에 대해 말하고 싶을 리가 없다. 언어는 이렇게나 앞뒤 맥락이 중요하다. 우리 어린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soccer’였다. 주말마다 축구 수업에 가기 시작했는데 자기가 거기서 킹왕짱이며 공이 너무너무 좋다는 뜻이였다. 나는 미세하게 발음을 교정해주며 지루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10분이라는 아주 애매한 시간이 남았군. 대화를 좀 더 유도하자.
‘에이미~ 넌 싸커가 왜 좋아?’
‘응 티쳐 싸커하면 나 동생을 만날 수 있어! 동생이랑 싸커하는게 좋아!’
동생? 집에서 한 번도 동생을 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외동인 줄 알았는데?
‘Younger sister? 너 동생도 있었어?’
‘Yes! I like she! My sister! So cute! She dad me mom!!’
헉. 이혼한 집이였나? 그래서 종종 오늘 아빠가 오시는 날이라고 수업을 캔슬했구나. 아니 애가 아직 7살인데 벌써 이혼을 했어? 그런데 동생은 또 아빠랑 살고?
‘에이미! 그러면 너 동생 얼마나 자주봐? 동생은 여기 근처에 사는거야? 아니면 지금 어린이집 갔어?’
내가 갑자기 긴 문장으로 질문을 하자 그녀는 알아듣지 못하기 시작했다. 나는 답답한 나머지 에이미와 똑같은 방식으로 소통을 시도했다.
‘Your sister! She here? She out? She kindergarten? Dad she mom you? Not together?’
에이미는 또 열심히 설명을 시작한다.
‘Birthday! She here! Soccer! We play! Me hamster! She dog!’
대체 이건 무슨 말일까.. 나도 한국인이고 너도 한국인인데, 우리 둘 다 한국말 엄청 잘하는데 대체 왜 이러고 있는거냐. (에이미는 어머니의 신신당부로 내가 한국말을 못하는 줄 안다) 빌어먹을 제국주의 같으니라고.
열정적인 대화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10분이 지났고 행여나 어머니가 문밖으로 우리 대화를 듣고 계실까봐 나는 다시 말을 돌렸다.
‘그래~ 아무튼 너 축구 좋아하는구나?!’
‘Yes! Because I love my sister!!’
지금까지 답답하기만 하던 애가 왜 갑자기 이리도 짠해보이는지. 이 집은 유일하게 과외비를 조금만 낮춰달라고 부탁했던 집이기도 했다. 문자로 시도때도 없이 아이교육에 대해 물어보고, 다음부터는 들어오실 때 손을 꼭꼭 씻어달라고 부탁하고 여러모로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는데..
세상은 정말로 불공평하다. 에이미 수업이 마치자마자 가는 집은 동갑내기 여자아이인데 말도 너무 잘 듣고 영특해서 한 번 배운 단어는 거진 다 외운다. 얼굴도 예쁘다. 워낙 잘 따라오고 밝으니 나도 이 집에 갈 때는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 저번주도 편한 마음으로 수업에 갔었다. 그 날은 가족의 주말을 그려보자며 미션을 하나 던져줬고 우리 어린이는 열심히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에서 아빠는 쿨쿨 자고 있고 엄마는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티쳐~ 이거봐봐! 아빠는 맨날 자! 왜냐면 항상 피곤하거든. 엄마는 설거지를 좋아해!’
나는 이 불평등한 성역할에 어떤 반응을 하는 것이 선생으로서 적절할지 고민하다 물었다.
‘아빠는 뭐 하는데 맨날 피곤하셔~?’
‘응 티쳐! 아빠는 닥터야! 스킨 닥터야!’
아.. 그럼 피곤하셔도돼.. ㅎㅎ; 그렇구나 왠지 이 집에는 항상 어려워보이는 의학 서적들이 가득했다. 이 집 아빠는 의사구나. 이 집은 어머니도 한 미모 하신다. 그러니 아이들도 예쁠 수 밖에. 그리고 똑똑할 수 밖에.... 대체 사람이 태어나서 스스로 선택지을 수 있는 자신의 형질이 몇 가지나 될까?
갑자기 에이미 생각이 났다. 내가 영어라도 죽어라 잘 가르켜놓을게. 너가 동전이 coin인걸 외울 수 있는 그 날까지 선생님이 책임질거야. 에이미! 나중에 커서 너가 힘이 생기면 동생은 얼마든지 자주 볼 수 있어. 엄마, 아빠도 원하는만큼 볼 수 있고 보기 싫으면 안 볼 수도 있어!
그러던 어느 날, 에이미 어머니와 통화를 하다가 어머니께서 우리 에이미가 외동이라서~ 어쩌고 저쩌고 하고 말씀을 하셨다.
‘에이미 여동생 있지 않나요?’
‘에이미 여동생이 없는데~’
‘3살이고 리사라고 에이미가 그러던데 아닌가요?’
‘아아~ 그거는 사촌인데. 둘이 친해요.’
뭐지? 나는 다소 억울한 마음이 들어 다음 수업 때 에이미에게 물었다.
'에이미~ 너 리사 말이야! 너 younger sister 맞아?'
'응 맞아! 왜?'
'She dad / you mom. 쎄퍼레이트. 맞아?'
'응 맞아! 걔는 걔 아빠랑 나는 내 엄마랑!'
'그럼 너 아빠는?'
'우리 아빠는 일하러 갔지!'
그러니까 에이미가 하고 싶었던 말은 리사네 아빠랑 에이미 엄마가 남매이며 자기는 씨스터가 없지만 엄마가 영거 씨스터다라는 거다. 즉 리사네 아빠가 자신의 외삼촌이며 리사와는 사촌인 것이다. 에이미에게는 아직 한국의 복잡한 씨족 사회를 표현할 단어가 부족했나보다.
‘에이미! 리사 아빠는 엉클이야! 알겠지? 리사는 커즌이고!!’
‘알았어 티쳐! 엉클 앤 커즌!’
‘자 그러면 다시, 이거 동전카드 이거 뭐라고?’
‘응 그거! Corner!!!’
‘후 에이미. 너네 아버지는 혹시 직업이 뭐니?’
‘웅 우리 아빠는 lawyer!!’
그렇다. 에이미의 아버지는 변호사였다. 내 상상력이 너무 풍부했나보다. 과외비는 깎아주지 말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