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 모기 대학살
어릴 적부터 동물을 과격하게 좋아해왔다. 초등학교 내내 장래희망은 조금은 특이한 동물보호가였고, 고학년이 되어서는 꿈은 좀 더 장대해져서 환경보호가가 되었다. 동물과 환경을 보호한답시고 집안에서 혼자 노샴푸, 린스아웃 시위를 하며 비누로 머리를 박박 감았다.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은 개, 고양이, 토끼같은 복실복실한 것들에 한정되지 않았었다. 나는 송충이, 거머리, 거미같은 것들도 사랑했다.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외모로 동물을 가려서 사랑하면 안 된다는 이상한 정치적 올바름이 내 안에 있었다. 아마도 그 애정은 죄책감에서 기인한 듯 싶다. 어릴 때부터 남자아이들이랑만 주로 어울렸던 나는 개미 죽이기 같은 짓궂은 장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곤 했다. 학년이 하나하나 올라갈수록 축구나 나무타기에 점점 껴주지 않는 남자친구들 때문에 나는 내가 얼마나 더 과격하게 개미를 죽일 수 있는지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초등학교 체육시간에 보이는 개미마다 족족 발로 꾹꾹 눌러 죽였던 적이 있다. 한참동안 대학살을 일으키고는 교실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는데, 아스팔트 위가 내가 죽인 개미 시체들 때문에 땡땡이 무늬처럼 보였었다. 그 장면은 내 안으로 아주 깊게 파고들고 새겨져서, 거의 평생을 벌레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며 살아왔다. 그 뒤로는 학교 교실에 벌레나 나방이 들어와서 친구들이 모두 소리지르며 도망갈 때에도 나는 차분한 척을 잔뜩 하고는 벌레들을 몰아서 밖으로 내보내주었다. (물론 속으로는 몹시 무서웠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 보니 무당벌레나 메뚜기는 귀여운 축에 속하게 되었고, 거미나 벌같은 것 정도는 양손으로 공간을 만들어 가두어서는 밖에 풀어줄 수 있게 되었다. 유일하게 내가 극복을 할 수 없던 벌레는 지네나 돈벌레 같은 다리가 열 개 이상 달린 종류의 것들이였다. 아무리 정치적 올바름을 발휘하려고 해도 이런 벌레들을 마주치면 나도 소름이 쫙 끼치면서 뒷걸음질을 치게 된다.
아무튼 이러한 조금 특이한 이유로 나는 혼자 살기 시작하고부터는 집 안에 들어온 벌레는 거의 죽여본 일이 없다. 대문과 창문을 활짝 열고 지내기를 좋아하다보니, 우리집에는 아주 추운 겨울을 제외하면 온갖 벌레가 들어온다. 벌이나 파리는 당연하고, 거미는 들어올 때마다 대문 앞 난간에 놔주었더니 아예 거기서 집을 짓고 살았다. 몇 개월 뒤에는 아기 거미들까지 잔뜩 낳았다.
모든 생명은 어릴 때 귀엽다. 믿기 어렵겠지만 아기 거미들은 정말, 정말 귀엽다. 일년이 넘게 매일 생사를 확인하며 지냈던 거미가족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난간 물청소로 사라졌고, 여느 때처럼 아기 거미가 잘 있나 확인하러 나온 나는 거미 일가족의 죽음을 마주하고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도했다. 슬견설의 이와 개가 똑같은 목숨이라는 것이 몸소 와닿았다. 모든 죽음은 슬프다. 또 모든 생명은 아름답다. 우리가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고자 한다면.
이러다 보니 여름에 친구들이 놀러와 자고 갈 때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모기를 죽이려는 친구와 모기를 일일히 잡아서 밖에다가 풀어주려는 나의 갈등이다. 모기를 죽이는 것은 쉽지만(퍽! 팍!), 모기를 잡는 것(조심조심)은 그렇게 쉽지가 않다. 나는 내 이상한 생명 중심주의를 친구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친구가 모기를 죽이는 걸 막지는 않는다. 그래도 이왕이면 살려서 내보내면 좋을텐데. 나는 열심히 모기를 잡아 밖에 놓아주지만 한 마리를 겨우 잡아서 풀어주려 창문을 열면 두 세마리가 도로 들어온다.
언제부턴가 친구들이 여름철에 우리집에 놀러오지 않게 되었다. 나도 그냥 포기한 마음으로 창문이고 대문이고 활짝열고 모기한테 잔뜩 물리던, 윙윙 거리던 그냥 잠을 자곤 했다. 모기에게도 이상한 질량보존의 법칙이 있어서인지, 아무리 대문을 활짝 열고 지내도 한 번에 다섯마리 이상이 집 안에 있지는 않는다. 10평 정도의 집에는 5마리 정도의 모기가 적절한 양이랄까.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적도 있다. 삶에 애착을 많이 잃었을 때, 이렇게 마지못해 사는 나 따위가 저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모기같은걸 죽일 자격이 없다고. 삶을 더 사랑하는 모기에게 기꺼이 내 피 몇 방울 내주면 뭐 어떠냐. 그것 좀 뺏긴다고 내 삶이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닌데, 니네들이라도 행복해라~ 하고.
나와 동거하게된 행복한 다섯 마리의 모기들은 목숨을 건 위험천만한 삶 대신 안락하고 배부른 한 철을 보내게 되었다. 매일밤 제공되는 피와 점점 추워지는 계절에도 따뜻한 실내생활. 그런데 요새 들어 내 생명사랑이 한계치에 도달했다. 내 피를 먹는 것은 별로 상관 없다. 날씨가 추워지다보니 모기들도 힘이 빠져서는 아무리 물어도 별로 가렵지도 않다.
참기 힘든 것은 잠이 드려고 하는 순간 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이다. 7월부터 11월까지 무려 4개월 가까이 내 피를 잘도 먹었으면서, 내가 잠에 드려는 그 찰나에 굳이 귀주변을 날아다니는게 아주 괘씸하게 여겨졌다. 오랫동안 나를 지켜봤으니, 내가 불면증 때문에 아주 쌩고생을 한다는 것도 알텐데 배은망덕한 새끼들. 오늘은 한 마리 걸리기만 해봐라 내가 가만 안 둘테니.
당연히 모기들이 이런 사실을 알 리 없고 잠이 솔솔 들기 시작하는 기분 좋은 순간 내 귀에서 앵앵되는 소리가 또 들렸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한 마리 정도는 죽여도 괜찮겠지. 불을 키고 독한 마음을 먹었지만 모기는 눈에 띄지를 않았다. 다시 불을 끄고 누우면 또 윙윙, 불을 키면 어디로 갔는지 감쪽같이 사라지고, 불을 끄면 또 윙윙.. 이렇게 몇 번을 반복하다보니 내 안에 살기가 가득 찼다. 모기 이 새끼.. 넌 오늘 내가 죽인다.
불을 키고 가만히 누워 있어보니 숨어 있던 모기가 바로 등장했다. 모기를 잡아보는게 너무 오랜만이라 얼마나 세게 쳐야되는지 감을 잃은 나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있는 힘껏 벽을 때렸고 모기는 벽지에 깊이 박혀버렸다. 미안하다. 그래도 너는 편하게 살다 가는거야. 다시 달콤한 잠에 빠지려고 누운 순간 또 시작대는 윙윙 소리... 그렇게 한참을 모기를 잡다보니 새벽 3시가 다 되었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지. 모기도 소중하고 거미도 소중해. 그치만 나한테는 내 생명이 제일 소중해. 개의 목숨과 이의 목숨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개가 더 크고 개가 더 귀엽기 때문이 아니다. 개가 나(사람)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우리와 더 가까운 것을 더 소중히 여긴다. 그것은 모순되거나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본능이다. 그것은 애착이다. 인간이 가진 독보적이고도 가장 소중한 재능인 공감은 관계를 맺고 애착을 형성함으로서 발휘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와 맺는 관계 즉, 스스로에게 느끼는 애착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은 '나'이다. 내가 슬프고 기쁠 때, 가장 크게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 역시 '나'이고, 나를 가장 아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역시 '나'이다. 슬견설을 쓴 사람한테 가서 '너가 죽을래 옆집 개가 죽을래?'라고 묻는다면 '아아 고를수가 없습니다! 생명은 모두 똑같이 소중하단 말입니다!' 라고 하려나?
어젯밤 나는 다섯마리의 피를 나눈 동거인들을 모두 학살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통쾌함만이 남아있었다. 모기가 없어서인지, 모기에게 갖고 있던 죄책감을 벗어나서인지 잠은 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