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언제나 정성을 다하는 유럽팀 양혜진 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관광경영학을 전공후 가장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진로는 바로 여행사. 휴학 후 다녀온 두 달여간의 유럽 배낭여행 경험이 컸던 걸까, 큰 고민 없이 지원한 곳에서 졸업 전 조기 취업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손님들이 원하는 정보는 언제나 비슷했고, 직접 다녀온 장소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쉬웠다. 감사하게도 여행을 멋지게 완성시킨 것은 본인 스스로였을 텐데 내 덕분이었다고 해주는 손님들의 연락을 받는 일들이 생겼고 그러한 맛에 심취된 채 일 년이란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지금 가시면 피오르드 지형을 제대로 즐길 수 있어요, 꼭 이번에 가셔야 해요!’
‘역시 전통 크리스마스 마켓은 독일이죠. 올해는 더 크게 열린다는데 놓치지 마세요!’
‘지금 파리행 항공표가 반값이네요. 다음 주 날씨도 훌륭해 보이고요. 지금이 기회네요!’
하나라도 더 팔고자 하는 단순 마케팅성 말들이었지만 점차 나 스스로가 내 말에 현혹되어갔다. 그러게 지금 가면 꽃이 만발했을 텐데, 그러게 지금 가면 수영하기 딱 좋은 날씨일 텐데, 그러게 지금 가면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일 텐데……. 그러게, 안되겠다. 이젠 내가 가야겠다.
퇴사를 결정한 것은 이토록 단순한 생각들로 비롯되었다. 속을 긁는 상사가 있던 것도, 일이 싫증 나거나 적성에 맞지 않아서도 아닌, 정말이지 여행사 직원 다운 퇴사 사유. 그저 제가 여행하고 싶어져서 말입니다. :)
우습게도 퇴사 후 나의 목적지는 유럽이 아니었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매일 유럽 얘기만 주구장창 했던 탓일까 그곳과는 정 반대의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거친 바람, 정돈되지 않은 느낌, 그렇지만 그 환경 속에서도 따듯한 현지인들. 그렇게 나는 남미를 택했고 페루행 편도 비행기 표를 삼과 동시에 스페인어 학원까지 등록해버렸다.
혼자 무섭지 않겠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내 대답은 언제나 하나였다. ‘죽을 운명이면 횡단보도 건너다가도 죽는데, 차라리 마추픽추 보다가 죽는 게 낫겠지 뭐!’ 이렇게나 당찬 말에 부모님도 네 뜻대로 해보라며 말릴 생각도 하지 못하셨다.
출국까지 남은 시간은 8개월. 남미 여행 준비는 핑크색 캐리어에 꽃무늬 원피스와 귀여운 샌들만 잔뜩 넣어 떠나는 유럽 여행과는 달랐다. 퇴사 후 쓸 일이 있을까 싶었던 엑셀 파일을 다시 켜서 사야 할 목록을 만들었고 매일이 쇼핑의 연속이었다. 1년을 걸어도 멀쩡할 튼튼한 방수 트레킹화와 손빨래로 금방 마르는 재질의 무채색 티셔츠들,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메이드 인 코리아 양말 넉넉히, 경량 패딩과 침낭, 마구잡이로 쓸 챙이 넓은 모자까지 모든 것들이 디자인이 아닌 실용성만을 따진 채 내 배낭에 담겼다.
정말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넣었는데도 20kg가 넘는 배낭. 또 뭘 더 빼야 하려나. 팬티 맨날 빨면 괜찮겠지 하며 두 개를 빼고 샴푸야 부족하면 가서 사보지 하며 비상용으로 챙기려던 100ml짜리 하나를 또 빼도… 야속한 배낭은 여전히 18kg다. 수건을 하나 더 빼보고 혹시나 해서 챙기려던 스페인어 회화책마저도 빼버리자 드디어 17kg가 되었다. 아무리 허리 벨트를 졸라매도 여전히 꽤 무거웠지만 약 1년을 예상한 여행이기에 이것보다 더 뺐다간 벗고 다녀야 할 판이었기에 이 정도로 견뎌보기로 결심했다.
몇 번의 쇼핑과 짐 싸고 빼기가 반복되며 출국 날은 빠르게 다가왔다. 편도 40만 원도 안 되는 값에 구매한 비행기는 총 32시간 동안 3번을 경유하며 페루의 수도 리마에 도착한다. 출국 날짜마저도 평일인지라 부모님이 공항에 바래다주려면 휴가를 써야 하셨다. 비행기가 정확히 몇 시 출발이냐며 반차를 쓸지 휴가를 쓸지 결정해야 한다는 아빠의 말에, 배시시 웃으며 비밀이야라고 답했다. 어차피 공항 가는 길은 고작 한국에서 한국인데 뭐가 어렵겠냐며 출발부터 강한 마음으로 해야 남은 여행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거절했다.
뒤로 60L, 앞으로 30L짜리 배낭 두 개를 겹쳐 맨 채 나 홀로 당당히 공항에 도착했고 모든 수속을 마친 뒤 탑승 전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보이스 톡을 걸었다. 통화를 하며 들은 사실은 늦은 오후 시간 비행기인지라 아침에 곤히 자고 있는 나를 꼭 안아주고 가셨다는 아빠와, 배낭 앞주머니에 몰래 편지를 넣어놨다는 엄마. 정말 그 딸에 그 가족이다. 나는 눈물이 많아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까 싶어 일부러 페이스 톡이 아닌 보이스 톡을 걸었는데 부모님도 잘 다녀오라는 말, 얼굴 보고는 못하고 몰래 편지를 적어놓으셨다.
'늘 건강만 생각해라, 돈 떨어지면 궁상떨지 말고 언제든 연락해라, 그리고 힘들면 억지로 버티지 말고 언제든 그냥 돌아와라.'
사실 말리고 싶었을 테다. 위험한 나라에 혼자 보내는 딸. 자존심은 무지 세서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봐야 하며, 또 무슨 일이 생겨도 알리지 않고 늘 혼자 해결하려는 거까지. 나를 너무 잘 아는 부모님은 내 정곡을 콕 찌르는 말만 잔뜩 써놓으셨다.
편지를 서너 번 더 읽고 다시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이미 비행기는 떠올랐고, 오늘 밤 머물 숙소는 정해져 있으니 오늘은 이거면 되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가진건 편도 티켓 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가진건 편도 티켓 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