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정반대 남미로 향하는 보편적인 길은 비행시간이 짧은 북미를 경유하는 것과 값이 저렴한 유럽을 경유하는 것으로 나뉜다. 퇴직금을 받은 후 통장엔 천만원이 조금 넘는 돈이 쌓여 있었다. 부모님댁에서 삼시 세끼 해결하며 돈을 크게 아꼈음에도 끊임없이 이어진 여행 용품 쇼핑과, 영어와 다르게 서울 한복판에서도 학원 하나 찾기 어려웠던 (그래서 몹시 값비쌌던) 스페인어 학원비로 인해 출국 날 수중의 돈은 딱 800만원 남짓이었다.
선택의 여지없이 나에겐 하나의 방법만이 존재했다. 인천에서 유럽을 향한 뒤 유럽 안에서도 두 번이나 경유를 해야 페루에 도착할 수 있던 32시간짜리 그 달의 최저가 비행 편. 기내식을 총 7번이나 먹는 여정이었다.
사실 그럼에도 즐거웠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지난 이십여 년간 꿈꿔온 내 모습은 한 손엔 커피, 다른 한 손은 누군가와 바쁘게 통화 중인 손, 단정히 묶어 올린 포니테일과 또각대는 소리를 내는 신발을 신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꽤나 그럴싸하게 이룬 꿈꿔왔던 모습을 스스로 포기하고 지금은 이틀간 세수도 못한 채 발가락이 다 드러난 샌들을 끌고 서로 전혀 매치되지 않는, 추워 죽지 않기 위해 마구잡이로 껴입은 옷을 입고 차가운 공항 바닥에 앉아있다니! 내가 한 선택에 웃음이 났다. 오히려 그토록 바라던 첫 입사 날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더 대견스럽게 느껴졌다. 앞으로 이어질 여행길이 좀 더 무모하고 계획과는 다르게 틀어지는 일들이 많기를 바랐다. 그래서 내가 정해놓은 내 한계점들이 우연스럽게 무너지고 넓어지기를 바라며, 페루로 향하는 마지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버스 탑승 후 시내를 향해 이동하는 길.
남미 전체를 반시계 방향으로 일주하기 위해 리마에선 단 일박 후 바로 콜롬비아로 이동하게 되었다. 애초에 콜롬비아로 바로 향하지 않고 리마로 도착한 이유는 한국에서 남미 대륙으로 향하는 여정 중 가장 많은 비행 편을 보유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즉, 가장 저렴하다는 말이다. 800만원으로 해결해야 하는 1년짜리 여행 계획은 매사 가장 저렴한 선택지를 택해야 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남미에서의 첫 날밤인 오늘은 단 돈 15솔 짜리 (약 7천 원) 6인 혼성 도미토리로 결정했다. 어차피 숙소에 대해 크게 기대하거나 실망할 것이 없었다. 그저 비행기 의자 모양대로 굳어져 버린 듯한 몸을 펼 자리만 있으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호스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던 세계 각국의 청년들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민망함을 느낀 내가 나지막이 내뱉은 첫 마디는 ‘올라…!(Hola, 안녕)’.
남미는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거리가 먼 것뿐만 아닌 치안이 나쁘다고 악명도 높아 흔히들 찾는 여행지는 아니다. 그래서 그럴까, 그들은 아시안인 나를 보며 신기해했다. 지난 40시간 내내 그토록 바라던 침대에 드러눕기는 강제적으로 포기 당했다. 같이 시내를 구경하자는 그들의 말에 급히 모자만 눌러쓴 채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첫 도시이니 조금은 걱정되는 마음에 예습하겠다며 비행기에서 꽃보다 청춘 남미 편을 보며 왔는데 벌써 몇 년이 지난 예능 속 장면과 여전히 같은 모습인 리마의 시내에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어디를 걸어도 다 나만 바라보는 것 같은 눈동자들은 과연 내 착각일까 싶었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다가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중품이 들은 가방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러한 내 행동이 부끄럽게도 그가 건넨 말은 'No tiene frío? (춥지 않니?)' 였다.
당시는 9월, 남반구에 위치한 페루는 한겨울이었다. 그제서야 주변 사람들을 자세히 둘러보니 나만 빼고 다들 패딩 점퍼에 어그 부츠까지 신고 있었다. 사실 이곳은 겨울이래봤자 온도가 10도를 웃도는 정도이기에 나는 짧은 반바지에 샌들 차림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들 나를 쳐다봤구나, 이유를 알고 나자 배시시 웃음이 나며 긴장했던 마음이 빠르게 녹았다. 이후로도 비슷한 질문을 건네는 현지인들이 여럿 있었고 그렇게 말을 트며 저렴한 맛집과 숨겨진 예쁜 공원을 추천받았다. 다음에 다시 리마로 돌아올 때 꼭 들러야지 하며 노트를 꺼내 눈에 띄게 빨간색 펜으로 이름들을 적어두었다.
비가 내리던 리마
리마에서의 1박은 내가 남미에 도착했다는 것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상상했던 남미의 모습 그대로였다. 거친 바람, 정돈되지 않은 느낌, 그렇지만 그 환경 속에서도 따듯한 현지인들. 비를 정말 싫어하는 나지만 오늘만큼은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에도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나를 보며, 여행을 하며 조금씩 변해 갈 내 모습이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