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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는 여행 중 Aug 18. 2021

계획이 없는 게 계획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누군가는 세계 일주도 할 기간인 240일 동안 남미만을 여행했다. 사실 나 역시도 처음엔 그저 흔히들 가는 유명 관광지 위주로 빠르게 돌아본 뒤 유럽으로 이동하려고 했었다. 그러한 내 마음을 완전히 바꿔 놓은 곳이 바로 이곳, 콜롬비아다.



저가항공으로 약 세 시간 만에 도착한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페루와는 화폐, 날씨, 사람들의 생김새와 도시의 분위기까지 모든 것들이 확연히 달랐다. 모든 입국 수속을 마치자 시간은 밤 열한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남미 내에서도 악명 높은 콜롬비아이기에 날이 밝을 때까지 공항에서 시간을 때울까 싶었으나 공항의 규모는 매우 작아 몇 곳 되지 않는 식당은 문을 닫을 채비 중이었고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거의 없어 겁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비행기에서 같이 내린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기 전 빨리 따라 나가자 싶었다.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공항 앞 ‘공식’택시 정류장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그 바로 옆을 경찰이 지키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호스텔로 향해보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례로 택시에 오르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내 순서가 찾아왔다. 미리 검색해보고 온 시내까지의 평균 택시비는 3만 페소. 기사는 3만 5천 페소를 불렀다. 큰 차이가 없는 듯하여 굳이 흥정하지 않고 흔쾌히 올라탔다.

혹시 몰라 탑승과 동시에 지도 앱을 켜서 맞게 가고 있는지 계속 확인했고 내가 스페인어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인사치레의 말을 여러 번 걸었다. 다행히 그 어떤 미심쩍은 행동도 없이 숙소 앞까지 빠르게 도착했고 트렁크에서 가방을 내리는 것까지 도와주셨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새로운 나라에 막 도착한 뒤 공항에서 급하게 인출을 한지라 내가 가진 것은 고액권뿐. 5만 페소짜리 두 장뿐이었다. 5만 페소를 내밀자, 아저씨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고 출발하려고 하셨다.


돈 앞에선 겁도 없어지는지 새벽 한시에 길 한복판에서 아저씨와 말다툼을 하게 됐다. 내가 계속 따지고 들자 1만 페소 한 장을 던지듯 건네며 더 이상은 절대 줄 수 없다고 하셨다. 고작 몇 천 원이지만 사람을 속이는 심보가 고약해 꼭 나머지 오천 페소도 받아내야겠단 마음에 계속 소리를 질렀다.

몇 분이 지났을까, 호스텔 정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다행히 문을 열고 나온 직원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었고 아직은 다소 부족했던 스페인어 대신 좀 더 편히 일어났던 모든 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 그와 택시 기사 간의 대화가 짧게 오갔고 결국 내 손에 쥐어진 동전 몇 개. 아무래도 더 이상 돌려받긴 힘들겠다 싶었다. 포기하고 호스텔로 들어갔고 간단한 체크인을 거치고 나서 침대에 누우니 새벽 두시였다.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나려고 시작부터 액땜하나 보다- 하고 스스로 위안했다.


새벽 늦게 겨우 잠들었지만 이른 아침부터 다시 움직여야 했다. 부킹닷컴을 통해 미리 1박만 예약해 놓은 곳이 머무는 사람이 거의 없어 너무도 조용했고 또 막상 도착해서 보니 위치도 중심지까지 꽤나 멀었다.

어젯밤 나를 도와줬던 직원은 시가지 근처를 돌아다닐 계획이란 나의 말에 지도를 꺼내 곳곳에 빨간색 펜으로 선들을 그으며 이 너머로는 절대 가서는 안된다며 위험 지역들을 일러주었다. 하루 만에 떠난다는 사람에게 이렇게나 친절할 수가.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호스텔을 나왔다.

새로운 곳을 찾는 대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운명이었을까, 길 건너 민트색 페인트가 예뻐서 들어가 본 호스텔 로비에 누가 봐도 한국인이 앉아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거니, 여기서 이미 한 달씩이나 머물며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흥미로운 한국인 한 명이 머물고 있는 노란색과 민트색이 조화롭게 섞인 복층 호스텔. 더 고민할 게 없었다. 다행히 바로 예약 가능한 자리가 남아있었고 내일 바로 옮겨오기로 했다.


호스트 존은 친절했다. 돈을 벌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자 호스텔을 운영하는 듯 보였다. 오랜 기간 알고 지내온 삼촌처럼 편안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아직 정식 게스트가 아님에도 오랜만에 날씨가 좋아 전망대에 올라갈 예정이니 시간 되면 같이 가자는 제안을 받았다.

당시엔 이제 막 도착한 후라 도시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 다녀온 뒤 찾아보니 보고타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인 몬세라떼 언덕이었다. 그리고 한국 가이드북과 블로그엔 강도를 만날 확률이 매우 높으니 걸어 올라가려는 시도를 하지 말고 무조건 케이블카를 타라고 적혀있는 곳이었으며, 게다가 더 중요한 건 해발 3,150m 높이의 언덕이었다. 나는 당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저 해맑게 웃으며 가벼운 반팔 차림으로 존과 언니를 따라나섰다.


존과 당나귀들



그래서 나에게 일어난 일은? 올라가는 길 한 가족을 만나 조잘대는 어린아이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알록달록 옷을 입은 당나귀들을 마주치고, 십 대 무리가 부끄러워하며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하고, 존의 지난 삶 얘기를 듣기도 하고 한국어를 가르쳐도 주며 깔깔대다 보니 금세 정상에 올랐을 뿐 그 어떤 마음이 불편해질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연 미리 가이드북을 찾아보고 모든 여행 계획을 세밀하게 세워두었다면, 그래서 존의 요청을 거절하고 흔히들 하는 대로 이 길을 케이블카로 빠르게 올랐다면, 지금처럼 이 장소가 마음 깊이 남을 일 없이 그저 동네 높은 언덕 정도로 가볍게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오르던 길 함께 주고받은 농담들, 잠시 내렸던 비의 냄새, 아이의 수줍은 미소까지 모두 없었던 일이었을테다.


노을지는 시간에 맞춰 한번 더 올랐던 몬세라떼 언덕


필수 관광지, 추천 맛집, 대표 쇼핑 리스트 등 그들이 말하는 것들은 그들의 여행일 뿐이다. 나는 내 여행을 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했고 고민 중이던 현지 유심칩 구매를 하지 않기로 정했다.

진정한 여행은 구글 맵 속 최단거리가 아닌 작은 골목 사이로 멀리 돌아서도 가보고, 맘에 들던 길은 한번 더 가보기도 하는 비효율적인 헤맴 속에 있으리라.





내일은 어디서 눈을 뜰까요

가진 건 편도 티켓뿐, 240일간 이어지는 무계획 여자 혼자 남미 일주

By. 제니 (@hyeziin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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