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알라룸푸르에서의 1년

책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

If you want something you've never had,
you must be willing to do something you've never done.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을 원한다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을 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한때, 남편의 커리어가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멘토분의 도움을 받아

한 프로그램을 수강했다.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지금처럼 아둥바둥 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고,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었다.


그것은 의심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의심, 세상에 대한 의심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내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아 있다면,

그 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


의심이 사라진 후, 우리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한 번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자유로운 삶을 위해,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해외로 떠나는 일을 결정했다.



결심부터가 의식 확장의 시작이다

해외로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우리의 의식은 확장되고 있었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우리의 뇌는 변화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해외로 떠나려면 제일 먼저 뭘 해야 하는가?

집 안의 물건부터 정리해야 한다.

(여행과는 다르다. 여행은 어차피 다시 돌아오기에 뇌는 큰 변화를 준비할 필요가 없다.)


정리를 하는 행위를 하면서부터 이전에는 할 필요도, 들어오지도 않았던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꼭 챙겨야 할까?

무엇을 버려야 할까?

어떤 물건을 누구에게 줄까?


자연스럽게 주변 인연과 삶의 우선순위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정리해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인생에서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 생각해 볼 기회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다.


'11평짜리 좁은 빌라에 뭐 이리도 물건이 많았을까.'


우리집은 사람이 아닌 물건이 사는 곳이었다


만약 우리가 해외로 떠나겠다는 결정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여전히 그 좁은 빌라에서

1년에 한 번도 입지 않는 옷, 읽지 않는 책, 이유 없이 방치해둔 온갖 물건들에 둘러싸여

물건이 사는 집에 얹혀 사는 듯이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집을 후딱 비우고 KL(쿠알라룸푸르)로 떠났다.


"Life begins at the end of your comfort zone."
(삶은 당신의 안전지대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새로운 것을 해보겠다는 결심,

그게 곧 의식 확장의 첫 단추가 되었다.



다른 결정은 우리를 다른 공간으로 부른다.



의식에 태풍이 불어야 한다.

태풍이 거대한 물살을 휘몰아치며, 물의 위와 아래를 완전히 뒤섞듯이,

내 의식에서도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다.


한동안 잔잔해서 고여있던 물결은 사라지고,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의심과 두려움까지 몽땅 끌어올려졌다.

익숙한 생각들은 휘청거렸고,

새로운 시야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거센 흐름이 휩쓸고 지나간 후에야,

우리는 지금처럼 살지 않기로 다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삶의 형태는

그동안 우리가 해왔던 '우리다운' 결정들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 지금처럼 사는 것을 그만하려면 가장 뭘 먼저 해야할까?

'우리다운' 결정을 멈추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결정들을 해야 했다.

그 첫번째 선택이 비즈니스석을 예약하는 것이었다.

100만원 남짓한 돈을 더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였다면 아끼는 것을 무조건 최우선 순위로 두고 결정했을 테니,

이제는 반대로 가보자고 생각했다.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짐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랩에서 제일 높은 가격대인 Executive van을 불렀다.



새로운 결정을 하면, 새로운 경험이 따라온다.

비즈니스석을 탄 후, 비행기 여행을 생각하면 무의식적으로 떠올랐던 단어가 바뀌었다.


✈️ 과거의 비행기 여행

❌ "엉덩이 아프다"

❌ "몸이 찌뿌둥하다"

❌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덜 불편할까?"


이번 비즈니스석 여행

◈ "편안하다"

◈ "자유롭다"

◈ "내가 원하는 자세로,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쓸 수 있다."


옆 사람과 부딪힐 걱정이 없으니

노트북을 펴도, 책을 읽어도, 어떤 자세를 취해도 자유로웠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히려 쾌적했다.


'벌써 도착했어?'

비즈니스 전용 라운지



Executive van을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시간 동안 도로를 달려야 했지만, 큰 차를 탔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안정감이 들었다.

넉넉한 좌석과 공간, 프리미엄 차에 맞는 기사의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어우러지는 안락한 분위기.

이 작은 변화가 주는 기분 좋은 감각이, 새로운 삶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새로운 결정을 하는 순간, 새로운 경험이 따라오고,

그 경험은 또 다른 새로운 결정을 이끈다.

이렇게 해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물리적 공간과 에너지를 경험하면서,
나를 구성하는 입자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KLCC 공원에서


의식의 확장은 인지부조화가 올 때 일어난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는 기존의 신념과 현실이 충돌할 때 발생한다.
이 순간이 의식을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다.


정확히는 인지부조화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인식의 확장을 결정한다.


인지부조화가 일어날 때 우리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1. 기존의 신념을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정보를 부정한다.

2.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존 신념과 현실을 조화롭게 통합한다.



내가 겪은 인지부조화 중 몇가지를 소개해본다.


✅ 이슬람 국가는 왠지 모르게 무섭다?

✅ 한국만큼 안전한 나라가 없다?

✅ 환불은 당연하다?



KL은 국제도시다.

KL에 도착한 후, 익숙함을 완전히 깨는 풍경이 펼쳐졌다.

히잡을 쓰고 커피를 내리는 스타벅스 바리스타

아디다스 로고가 박힌 히잡에 힙합 바지를 매치한 이슬람 소녀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남자들

여장 남자들, 일본 애니 코스프레를 한 현지인들


더 놀라웠던 것은 '이슬람 국가'라면 왠지 엄격하고 두려운 이미지가 있었는데,

편견과 달리 말레이시아는 종교의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곳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가게마다 트리가 반짝이고

힌두교 축제일에는 이를 기념하는 화려한 장식들이 백화점 입구마다 설치되어 있고

설날(중국 춘절)에는 도시 전체가 빨간색 홍등과 장식으로 물든다.

도시 전체가 폭죽으로 뒤덮히는 일은 일상이다.



언론 매체를 통해서는 나에게 얼마나 제한된 정보만 들어오는지,

또 실제로 겪어보지 않고 누군가가 전해주는 것만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근거없는 편향을 갖게 되고, 실체와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KL은 안전하다.

KL에 오기 전까지는 '한국이 치안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한국도 매우 안전한 나라지만,

말레이시아 역시 카페에서 물건을 잠시 두고 자리를 비워도 그대로 있을 만큼 안전했다.

밤 늦게까지도 거리가 환하고, 차와 사람들이 많아 활기가 넘쳤다.


한국에서만 살고, 한국을 기준으로만 사고하게 되면, 당연히 한국식 안전과 문화가 제일 좋은 줄로만 알게 된다. (그게 좋다 나쁘다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확장 측면에서 제한이 있다는 것이다)하지만 새로운 곳을 경험하니, '안전하다', 또는 '좋다'는 기준 또한 상대적이라는 걸 느꼈다.




KL에서는 환불이 당연하지 않다.

나에게 가장 컸던 인지부조화 중 하나는 환불 문화였다.

한 번은 선물용으로 사둔 그릇 세트를 환불하려 했으나, 환불이 불가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아니 쓰지도 않고 개봉도 안했는데, 환불이 왜 안되는거야? 한국에서는 소비자의 권리라고!"


결국 교환만 가능하다는 정책으로 우리가 사용할 제품으로 교환을 했다.

교환해온 찻잔세트


처음에는 그저 황당했다.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되었을 환불이 여기서는 그렇지 않으니

뇌가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지부조화가 온 것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른 관점이 생겼다.

물론 이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환불이 쉽지 않은 문화가 오히려 건강한 소비 문화를 만드는 게 아닐까?'


찾아보니 이곳에서는 기본적으로 소비자가 환불을 하지 않을거라는 문화가 있다.

그래서 판매자도 제품을 더욱 꼼꼼이 살피고 보여줄 의무가 있고,

소비자도 스스로 '책임있는 구매'를 하는 태도를 갖게된다.


한국에서는 왠만하면 '환불은 해줘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 어쩔 때는 되려 환불을 권장하는 기업도 있다. 구매를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문화가 '일단 사고 보자'식의 소비 습관을 장려하는 것 아닐까 싶다.

환불에 관대한 문화가 영세업자 입장에서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하고, 구매에 대한 책임을 소비자에게는 전혀 지지 않게 하는 인식을 심게된다.


KL에서 겪은 이 작은 에피소드는 '당연하게 여겨왔던 환불 문화가 정말 절대적인 것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어느 곳에서는 당연한 시스템이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당연하지 않을 수 있다.



몸으로 하는 경험이 핵심이다

만지고, 보고, 듣고, 느끼는 몸의 경험만이 의식이 전환되고 세계가 확장된다


의식을 확장하고 더 높은 차원에 도달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새로운 환경에 자신을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오감이 들어와야 새로운 생각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책이나 유튜브를 통해 간접적인 정보를 얻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경험'이다.

물론 그 안에서도 인사이트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내 몸이 그 상황에 놓여 '이제 어쩌지?'하고 부딪히는 직접 경험과는 차원이 다르다.


▶ 책이나 영상은 '읽고 넘길 수' 있지만

▶ 몸으로 하는 경험은 그 상황을 직접 마주해야 한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동물이다.

책과 영상은 선택적으로 정보를 취득하는게 가능하다.

따라서 피할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하지만 낯선 공간, 낯선 문화를 직접 만나면 스스로의 관점이 흔들리는 상황을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때 비로소 의식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출) 눈만이 감지할 수 있는 광활함, 바람의 촉각, 햇빛의 열기, 새의 소리



책은 경험인가?

책은 분명 '간접 경험'의 훌륭한 도구다.

하지만 어디까지 '간접적'이라는 명확한 한계가 있다.

저자가 겪은 이야기가 곧바로 나의 체험이 되지는 않는다. (독자가 자주 착각하게 되는 부분이다)

정보와 지식으로 축적될 수는 있어도,

'오감으로 인한 충격'이나 '인지부조화' 수준의 뒤흔듦을 주기는 어렵다.


"책을 읽고 인식이 확장된 적 있는데?" 라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결국은

▶ 내가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된 수준에서의 확장일 뿐이다.

하지만 실제 경험은 내 수준을 넘어서는 충격을 준다.




마무리: 경험하는 만큼 확장된다

우리는 익숙한 것 속에서는 결코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낯선 환경, 예상치 못한 순간, 직접 부딪히는 경험만이 우리의 의식을 확장시킨다.


우리는

새로운 공간에서

낯선 문화를 만나고,

인지부조화를 겪고,

그 속에서 무너지고 다시 조립되는 과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더 이상 '과거의 나'에 의존하며 나를 과거에 가두지 않는다.

나의 세계는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A ship in harbor is safe, but that is not what ships are built for."
– John A. Shedd
항구에 정박한 배는 안전하지만, 배는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당신도 그렇다.





이야기를 마치며

매번 다른 새벽의 모습 사진을 몇 개 올려본다.

다른 선택이 우릴 다른 공간으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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