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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우리가 서로의 시간을 통과할 때..

by madame jenny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감정을 주고받으면서도 우리는 늘 어딘가 엇갈린다.


누군가는 더 깊이 믿고, 누군가는 더 멀리 물러서며,

그 사이에서 감정은 조금씩 모양을 바꾼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은 그런 모호함 속에서

끝까지 서로를 바라보려 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다.


은중과 상연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며

서로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본다.

가장 잘 알지만, 동시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그들은 서로에게 편안하지만은 않은 거울 같은 친구였다.

은중이 조용한 진심으로 상연을 지켜보는 동안,

상연은 늘 세상의 시선과 싸우며 자신을 증명하려 했다.

그 엇갈림이 시간이 쌓이면서 서로의 삶을 다르게 만들었다.


〈은중과 상연〉은 죽음을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속에서 삶이 얼마나 찬란할 수 있는지를 말한다.

상연의 결정은 생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온전히 인식한 자의 ‘마지막 표현’이었다.

그녀는 타인의 시선이나 종교적 도덕의 틀보다

자신의 ‘존엄’을 선택했다.

그 순간, 삶은 단순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은중은 그 옆에서 말없이 손을 잡는다.

그 손에는 어떤 설득도, 위로도 없다.

침묵이 모든 언어를 대신한다.

그 침묵 안에는 용서, 회한, 그리고 완전한 ‘수용’이 있었다.

인간이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순간은

말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건 단지 ‘같이 있음’으로만 증명된다.

〈은중과 상연〉에서 은중이 상연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그 말의 의미를 떠올리게 했다.

그 얼굴은 이미 죽음을 향해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 표정이 있었다.

그 표정을 끝까지 기억하려는 은중의 시선은

살아 있는 자가 죽는 자에게 바치는 가장 온전한 존중이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존재를 다시 세상 속에 불러들이는 행위다.

그렇기에 ‘기억한다는 것’은 ‘살린다’는 말과 닮아 있다.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나는 한동안 그들의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치 크레센도[Cresendo]처럼 잔상이 더 큰 공명으로 커졌다.

그들의 불완전함 속에 진실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결핍을 통해 자기 안의 온도의 변화를 느낀다.

때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워 스스로를 태워버릴까 두렵고

때론 고통스러울 만큼의 차가운 온도에 두려움을 느낀다.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의 시간을 통과하며 온도의 흔적을 남기는 일,’

상학이 이야기한 시간을 ‘채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그 채집의 ‘흔적’이 누군가의 삶을 지탱하는 온기가 되는 일이다.

고통스러울 만큼의 추위를 겪은 후엔 평범한 온열감도

‘안정감’이라는 따스한 ‘온기’가 될 수 있다.

성연의 ‘안아줘...’라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추운 그녀의 몸부림이었을까...


‘감정을 갖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스스로에게 갇혀 있었던’

상연은 은중에게 이렇게 말한다.


“은중아, 네가 다가올수록… 나는 더 멀어지고 싶었어.”


그녀가 느꼈던 사랑이 주는 두려움과 갈등. ‘감정의 역설’이며 외로움이었다.

사랑을 온전히 받아들여본 적도 없는 그녀의 독백이었다.

말끝마다 냉소적이고 세상을 비꼬며 잿빛세상의 어느 곳에도 따스함이 없다는 둣 부정했던

그녀의 가장 서툰 방식의 자기 방어를 무기처럼 찔러댔다.

상연의 날카롭고 건조한 말의 투척..진짜 상처는 그녀가 입을 것이라는 사실을

정작 그녀는 몰랐다.

상처를 감추려다가 사랑을 잃고

사랑을 잃고 나서야 더 깊은 상처의 고통으로 스스로를 더 꽁꽁 싸매며

냉소로 복수하려 했던 그녀의 마지막의 허무함...


‘결국’ 절망의 끝에서 머뭇거리며 다가온 성연에게..


‘답이 없다는 걸 알아

너의 시간을 같이 겪을게...’

라는 은중의 한마디는 안도와 안정감의 따뜻한 온도로 뼛속 깊게 느껴졌을 거다.

‘레비나스’는 타인을 ‘얼굴’로서 마주할 때

비로소 윤리가 시작된다고 했다.

난 그 윤리를 ‘이해와 공감’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방향이라고 이해하고 싶다.

은중이 상연의 얼굴을 블루하우스의 푸른 문 앞에서 서로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장면은

그 말의 의미를 떠올리게 했다.

그 얼굴은 이미 죽음을 향해 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사랑받고 싶은 인간의 근원적 표정...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그 표정을 끝까지 기억하려는 은중의 따스한 시선은

그녀가 성연에게 보여준 가장 온전한 ‘존중’의 윤리다.


진심으로 은중이 성연을 ‘이해와 공감’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방향은

기억을 통해 ‘친구’ 성연의 존재를 다시 은중의 세상 속에 따뜻한 온도로

불러들이는 행위다.


마치 그녀 책상에 가만히 놓아둔 사진처럼..

은중은 성연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지..

사람은 사라져도, ‘친구’성연과 함께 보낸 시간의 ‘채집’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이 바로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며,

드라마에서 인용된 [길버트 그레이프]의 불길 안에서 두 사람이 스스로를 태우지 않고

영원히 ‘살아’ 지키는 온도다.


‘크레센도’처럼 점점 더 크게 따뜻함을 느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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