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파이가 되는 80년대에 살아요
둘째 아이가 6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유아 체조 및 노래 교실인 동네 짐*리에 등록을 하러 갔다. 런던에서 첫째가 회원이었다고 웬일로 입회비를 면제해주었다. 월회비를 계산하려고 하니, 첫 회비는 현금으로, 다음 회비부터는 은행에서 자동이체를 하면 된다고 했다. 카드결제가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진작에 단념했었으므로, 기대도 안 했었다. 남편 이름으로 된 은행 계좌의 자동이체 정보를 옛날 나 어릴 적에나 쓰였던 먹지가 껴있는 전표에 적어서 다음번에 갔더니, 이번에는 인감도장을 찍어오랜다. 80년대도 90년대도 아닌 21세기에 말이다.
인감도장. 서양 국가들에서는 존재 조차 하지도 않으며, 한국에서도 부동산 거래 같은 데 외에는 쓰일 일이 거의 없는 그 인감도장을 일개 학원 등록하는 데에 갖고 오라니... 똑같은 사건이 첫째의 수영 레슨 등록 때도 일어났다. 두 곳 모두 싸인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했다. 꼭 인감도장이어야 한다고.
물론, 이런 일본에도 온라인 뱅킹이 있다. 하지만 실시간으로 쏙쏙 정보가 입력되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일본의 온라인 뱅킹은 전산의 속도가 굉장히 뒤떨어지고 업무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온라인 뱅킹 실제의 목적인 '편리함'을 다 수행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주말에는 계좌 업데이트가 안되고 평일에도 업무시간 이외에는 이체를 할 수가 없다. 월요일까지 어디에 꼭 계좌이체를 해야 한다면, 늦어도 금요일 오후 2시 정도에는 이체를 해야 한다. 더 안전하고 싶으면 목요일이나 금요일 오전에 하는 것이 좋겠다.
차라리 온라인 뱅킹이 없다면 용납하겠다. 이건 온라인 뱅킹이 있긴 하지만 편리성이 떨어지는 이상한 시스템이라, 없느니만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받는 현금 결제를 선호하나 싶기도 하다. 더 답답한 건,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이 시스템이 자기들이 아는 유일한 온라인 뱅킹이기 때문에 불편함을 못 느낀다는 것이다.
혹자는 일본에 고령인구가 많아서, 또는 자연재해가 많아 디지털 시스템에 의존도가 떨어져서, 등등 여러 이유들을 대지만 신기하게도 이런 시대에 역행하는 뱅킹 시스템과 함께 21세기의 주산업 중 하나인 핀테크도 공존한다.
편의점들을 비롯한 여러 상점에서 **페이, ##페이 등등 여러 가지 앱으로 결제를 할 수가 있고, 집에서 배달 앱을 통해 음식을 시켜 먹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실시간 결재되는 21세기형 방식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도쿄가 신기한 것은 80년대 같은 아날로그식 방식과 현대의 디지털 방식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방식만을 고수하며 생활할 수는 있어도 디지털만 이용해서는 절대로 생활이 불가능하다. 여러 기관들과 상점들에서 주는 온갖 서류와, 각종 카드 및 종이 전표들을 보관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엔 나만 손해다. 우편함에는 우리 어릴 때 있었던 "찌라시"라고 불리는 광고 용지들이 수북하다. 대부분의 전산 시스템은 마치 8-90년대 동사무소 같이 운영된다. 하지만 동시에 소수의 신세대 고객들을 위해 (어쩌면 올림픽용 이미지 메이킹을 위해) 신식 IT기술을 사용하기 시작한 곳들도 있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나라. 도쿄에서의 삶은 마치 와이파이가 되고 아이폰이 있는 80년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