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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Apr 22. 2020

플라스틱과 개인주의

완벽한 조합

도쿄에 처음 왔을 때 가장 힘들었던 점 중 하나는 쓰레기 분리수거였다. 우리는 나름대로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었건만, 이사온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관리인 아저씨가 갑자기 집에 찾아와 "프레젠토!(プレセント:선물)"하며 메구로구 재활용 가이드 한글 번역본을 주고 가셨다. 그 "프레젠토!"의 숨은 의미는 아마도 "이걸 보고 제대로 좀 하시오"였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막상 재활용 안내 가이드를 보고 나니 혀를 내둘를 정도로 디테일이 많았다. 요일별로 내놓는 날자가 다른 것은 물론이고, 우유갑 폐기 방법, 다양한 종이류의 각기 다른 폐기 방법, 페트병 폐기 방법, 등등 얇은 책자 한 권으로 묶어졌을 만큼 숙지할 내용이 많았다. 그때까지 우리가 엉터리로 했던 분리수거의 뒤처리는 관리인 아저씨의 몫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만숀에 살기 때문에 어쩌다 실수를 하거나 대충 해놓아도 관리인이 대신 정리를 해주지만, 주택들은 정말 엄격하다. 분리수거 차가 집 앞에 오더라도, 만약 매뉴얼에 적힌 것과 뭔가 살짝만 다르게 돼있으면 아예 쓰레기를 갖고 가지를 않는다. 따라서 집에 쓰레기가 쌓이는 불상사를 겪기 싫으면 분리수거를 제대로 해야만 한다.


처음에는 매뉴얼대로 엄청 열심히 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쓰레기 분리수거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까다롭게 분리수거 매뉴얼을 정해놓은 것을 두고, 혹자는 환경을 생각해서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 널리 알려진 제로 웨이스트 (zero waste) 운동처럼 애초에 쓰레기 양을 줄이는 게 모두에게 더 좋은 것 아닌가? 원인을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계속 분리수거만 미친 듯이 시켜대는 이들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제로 웨이스트에 더 관심을 갖고 쓰레기를 줄여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는 삶이 너무도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이라고 표현해야 더 맞는 것 같다. 한 조각 두 조각 낱개 포장되어있는 상품들, 마트에서 무료로 마구 주는 비닐봉지, 심지어 한 번은, 내가 가져간 장바구니를 배송시켰더니 장바구니가 통째로 다른 비닐에 담긴 체 배송이 되었다. 계란각 마저 플라스틱인 이 곳에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분리수거라도 조금 더 신경 쓰는 일 밖에는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들은 딱히 플라스틱을 줄이고 싶지가 않다는 것을. **


도쿄의 마트



플라스틱이 제공하는 편의는 일본 문화가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에 너무나 적합하게 들어맞는다. 플라스틱은 그 특유의 간편함 외에도, 소비자와 판매자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주기 때문이다. 많은 현대 일본인들은 사람과 사람 간의 불필요한 1:1 대면을 피하고 싶어 한다. 이들은 정육점에 가서 사는 고기보다 미리 토막 내져 플라스틱 랩으로 씌워진 고기가 좋고, 식당에서 하는 식사 대신 편의점의 플라스틱 용기 안의 벤토가 더 편하다. 이런 개인주의자들은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 자체를 줄일 수 있다.


또한 플라스틱은 일본의 냉정한 친절함을 최대한 지켜내게 하는 매체이다. 여기서 말하는 친절함은 과도한 자상함 또는 정겨움이 아닌, 냉정한 선을 지키며 고객을 상대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소비자인 당신에게 여기까지만 제공합니다." 내지는 "당신이 구매한 상품을 온전히 전달했습니다. 그 이상의 책임은 안 집니다." 하고 은연중에 말을 하듯.


플라스틱은 가볍고, 저렴하고, 위생적인 데다가, 원하는 형태로 가공하기도 쉬워서 일본인들이 지향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지키는 것에 이보다 완벽한 물질이 아직까지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플라스틱이 얼마나 삶 속에 심각하게 침투해있는가를 인식조차 못하는 지경까지 온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 이사 온 동네의 마트에서는 비닐봉지를 돈을 주고 사야 한다. 같은 구에서도 비닐봉지에 대한 규정은 마트마다 제각각인 것을 보니 법적으로 아무 통제도 하지 않는 것 같다. 나만 하여도 2년 이상 비닐봉지를 무료로 무제한 제공받아서 그런지, 그 간편함에 익숙해져 새로운 동네 마트의 비닐봉지 규정이 처음에는 불편했다. 하물며 몇십 년을 이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생활에서 불편함과 귀찮음을 감수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일 것 같지는 않다. 이들 나름대로는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선을 지키고자 사용되는 것이 후손들에게 더 큰 피해를 줄 게 분명한데도... 가끔 만숀 재활용실을 지나가며 칼같이 분리되어 있는 쓰레기를 볼 때면, 이들은 과연 세계의 환경 문제와 트렌드를 알면서도 이런 라이프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일까 의문이 든다. 모른다면 뒤처진 언론과 미디어의 문제일 테고, 알면서도 그러는 것이라면 소름 끼치도록 사회에 순종적인 이들 가치관의 문제일 것이다.












** 이 글을 발행하고 몇 달 뒤인 7월부터 도쿄는 마트 비닐봉지를 유료화했다.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그 이유는 (코로나 때문에 치루지 못한) 도쿄 올림픽에 맞춰 외국인들 눈에 친환경적으로 보이려고 겸사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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