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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May 09. 2020

나의 분수

한계를 알고 그에 만족하기

몇 년 전인가부터 “소확행”이란 말이 유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필에 나와서 유명해졌다는 이 말이, 일본에서 왔다는 것이 나는 놀랍지 않다.


한국에서는 이 말이, 기성세대에 비해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운 N포 세대를 상징한다고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 일본에서의 소확행은 세대적 차이 없이 모두가 겪는 어쩔 수 없는 감정의 돌파구 같다.




도쿄의 주택가 길을 걷다 보면 집집마다 있는 빈틈없는 주차장을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어찌나 꽉 들어맞게 주차장을 만드는지, 주차를 할 때 단 한치의 오차도 허용되지 않는 것 같다. 땅을 낭비 없이 최대치로 활용하려는 이들의 마인드 때문일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조차 넉넉함을 누리는 건 사치인 것만 같은 이들의 가치관이, 때로는 보는 나로 하여금 숨이 턱 막히게 한다.


흔한 주택가 주차장 모습들


 

일본 사회를 도형으로 표현하자면 각기 다른 여러 사이즈의 정육면체들이 쌓여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사회가 넘어지지 않도록 차곡차곡 쌓을 수만 있다면 각각의 정육면체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 하나의 정육면체는 그 자신 또는 그 가정에 주어진 몫을 나타낸다. 정육면체를 흐트러트리지만 않으면 그 안에서는 자유롭다.


하지만, 이찌닌마에(一人前: 한 사람의 몫)*, 내게 주어진 몫을 안다는 것은, 내가 넘지 말아야 할 선과 나의 한계 또한 항상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육면체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인들은 내가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계 안에서 최대한의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말이다. 그것이 무라카미가 표현한 서랍 속에 반듯하게 개어져 있는 속옷일 수도 있고, 퇴근 후 집에 가서 만화 캐릭터를 수집하는 회사원의 오타쿠(オタク)스러운 만족일 수도 있다.


자유사회에서 자란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인생을 스스로 컨트롤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서 자란 이들은 규칙이 주는 편안함에 익숙해져, 어쩌면 스스로 모든 것을 주도하고 바꾸는 인생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소확행이, 본인이 컨트롤하여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일 것이다.




예전에 내가 참 좋아하는 작가인 알랭 드 보통의 TED 강연을 본 적이 있었다. 중요한 부분을 요약하자면, 우리가 현대 사회에 살며 성공을 좇고 주변인들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이유는 어릴 때부터 모두가 "너는 할 수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를 주입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치 다른 사람들의 기준에 성공하지 못하면 하나뿐인 인생을 자신이 무능하여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영국 여왕에게 질투심이나 경쟁심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나와 너무 동떨어진 존재라서 이다. 신분 사회였던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나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인생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실패나 불운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도쿄에 살며 일본인들의 삶을 보며 그 강연이 떠올랐다. 신분제도도 아닌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항상 자기 분수와 한계를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 이들의 삶. 그래서 자신에게 할애된 테두리 안에서만 만족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삶. 내가 익숙했던 삶의 방식보다 대다수의 이 곳 사람들은 삶에 더 만족하고 소소하게 행복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남과 비교도 덜하고 내 선만 잘 지키며 살면 되니까. 이론적으로는.


분명 알랭 드보통이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식의 제한적인 삶의 태도는 아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은 겉으로는 그가 얘기하는 현대인이 살면서 느끼는 불안감, 시기심, 절망감 등을 어느 정도 해소한 사회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도 인간이고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데 어찌 그런 감정들이 없겠나.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들에게 소확행이란 어쩌면 이런 사회에서 쌓일 수밖에 없는 답답함과 스트레스의 해소 방법이 아닐까?







알랭 드 보통 2014년 TED 강연:

https://www.ted.com/talks/alain_de_botton_a_kinder_gentler_philosophy_of_success?language=en


*'이찌닌마에'에 대하여

https://brunch.co.kr/@jenshimmer/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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