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정은 May 13. 2020

인간관계의 벽

타테마에에서 오는 외로움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편이다. 그 이유는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예민하고 소심한 성격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부터 지나치게 사람을 많이 신뢰해서 피해를 본 적이 많았다. 경험으로 배운다고는 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난 순진함은 쉽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서른 중반에 순진함이라고 표현하기엔 미련함이 더 맞을 것이다.


어디에선가, 어른이 되어 만난 관계에 내 마음을 다 주는 것은 포커게임에서 갖고 있는 카드를 다 보여주는 것과 같은 멍청한 짓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을 이겨내기란 참으로 힘든 것. 관계에 많이 의존하기에 사람에 실망하고 상처 받았던 나는 런던에서 만난 너무나 좋은 친구들을 통해 신뢰와 우정을 쌓고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도쿄로 이사를 결정했던 무렵에 '거기 가서도 금방 친구들 만들고 비슷한 경험을 하겠지.'라고 아주 어리석은 생각을 했었다.




이사 오자마자 말도 안 통하는데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던 나는 새로운 친구를 사귈 심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인들 특유의 자상함으로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동네 엄마들, 같은 학교 학부모들, 등 새로 도쿄라는 곳에 이사 온 나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주던지 굉장히 고맙고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두루두루 잘 아는 사람은 많아졌지만 영국에서 만났던 친구들 정도로 친해졌다고 할 수 있는 일본 사람은 두 명뿐이다. 한 명은 20년 전부터 알았던 보딩스쿨 선배고, 다른 한 명은 같은 학교 학부형 중에 외국에서 인생 대부분을 살았던 일본적이지 않은 (뿌리만 일본인인) 엄마다.


일본인의 문화에는 혼네(本音)와 타테마에(建前)라는 것이 있다. 혼네는 본심, 타테마에는 겉으로 나타내는 모습을 말한다. 물론 일본에 오기 전에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었어도, 어느 문화에나 이런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혼네와 타테마에가 실제로 일상에서 얼마나 느껴지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었다.


혼네와 타테마에가 주는 장점은 마찰과 갈등의 가능성을 거의 희박하다 싶을 정도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타테마에가 존재하는 목적 자체가,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간에 남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사람 간의 감정적 마찰과 갈등이 있기가 힘들다.


혼네와 타테마에는, 널리 알려진 일본인의 이중적인 이미지에 크게 기여를 했다. 그것은 굉장히 맞는 이미지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악의를 갖고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상처를 주거나 상처를 받는 것이 두려워 대부분이 이런 성향을 택한 것이다. 인간관계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나는 처음에 오히려 이 곳이 그런면으로 인해 편하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일정 수준 이상 친해진 일본인들과의 사이에서도 항상 넘지 못하는 어떠한 벽이 있었다. 이 벽이 뭔지에 대해서는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 항상 필터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에 나는 내가 느끼는 이 벽이 언어적 문화적 차이라고 생각을 했다. 내가 외국인이어서 이들이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거나, 이들이 영어로 얘기할 때 뭔가 완벽히 번역이 안 되는 것인가 보다 하고.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그들끼리는 서로 거리가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내가 외국인이라, 조금 덜 눈치 보고 편하게 얘기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 정도로도 나와 아주 친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내 기준으로 친한 것은 그게 아닌데.


그들은 자신을 키워준 부모나 가족 외에는 그 벽을 넘어서는 관계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배우자 와도 눈치 보고 계산하고 예의 차리는 부부도 많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일 수도 있다. 나를 낳아준 부모 외에는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고 결국은 다 남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듯. 다시 생각해보면, 예전에 내가 대인관계에서 상처를 받았었던 건,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세상은 정의롭고 인간은 의리 있고 정직해야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닐까? 항상 본심과 겉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의식하고 지낸다면 절대로 남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성인이 된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될 테니.


따라서 혼네와 타테마에가 있는 사회에서의 삶은 항상 피곤하게 안테나를 켜고 있거나, 아예 관심을 끄고 안테나를 끄고 있거나, 둘 중 하나여야만 한다. 하지만 정말 대인 관계를 최대한 피하고 살더라도, 어디 동굴에 들어가 살지 않는 이상, 일상에서 겪어야 하는 타테마에의 스트레스는 이들의 삶에 기본으로 깔려있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친구가 나를 파티에 초대했는데 못 간다면 "미안하지만 참석 못할 것 같아" 또는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라고 얘기하는 것 대신 "아... 저..."가 정답으로 일본어 선생님이 준 교재에 실려있는 것처럼, 별 것 아닌 일상에서의 사소한 일들에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초대를 한 입장에서는 그 정도만 갖고도 거절의 의미인지를 눈치껏 알아야 하고, 거절하는 입장에서도 최대한 "못 가"라는 직설적인 대답을 피하여 거절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내가 느끼기에 오히려 혼네와 타테마에는 그 목적과는 반대로, 그것 때문에 오는 불필요한 스트레스가 더 큰 것 같다. 그 스트레스를 겪지 않기 위해 이들은 조금이라도 깊은 관계를 최대한 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것이 어릴 때부터 학습되어 와서 "관계"라는 것이 조금 더 딱딱한 것으로 자리매김한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꾸려나가야 할 가정이 있고, 챙겨야 할 어린아이들이 둘이나 되어서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관계로 그나마 덜 외로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독신에 마땅한 취미조차 없다면 일본에서의 삶은 정말로 외로울 것이다. 딱딱함에서 오는 편함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치 회사 동료 외에는 세상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분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