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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정은 Apr 19. 2020

규칙이 주는 편안함

불필요한 생각을 줄이다.


둘째 아이가 백일도 되기 전에 일본을 왔던 나는 아이의 예방 접종을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오자마자 동네 소아과를 알아봐서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우리가 다니기 시작한 소아과는 리셉셔니스트와 간호사, 의사 모두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잘 되는 편이라 굉장히 운이 좋았다. 


우리 동네 소아과


들어갈 때에는 모두가 신발을 벗고 신발장에 잘 정리를 해둔 후, 제공된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소아과에 대한 나의 첫 이미지는 굉장히 깨끗하고 조용했다. 예약을 하고 갔는데도 대기시간이 엄청 길었다. 


'왔습니다'하고 기다리고. 등록하고 기다리고. 예방 접종 표 작성하고 기다리고. 의사 면담하고 기다리고. 그러다 간호사가 와서 아기 몸무게를 재겠다고 옷을 벗겨달라고 했다. 내 기준대로 기저귀 빼고 다 벗겼더니, 기저귀까지 벗겨달라고 했다.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고. 이들에겐 대충이란 없다. 


기저귀를 벗기고 알몸인 아기의 몸무게를 재고, 다시 옷을 입히려 새 기저귀로 가는데, 아무리 봐도 쓰레기통이 보이지 않았다. 벗겼던 기저귀를 간호사에게 가져가 "すみません(스미마셍:실례합니다만), where is the trash can?(쓰레기통은 어디에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내가 들은 충격적인 대답은: "Please take it home (집으로 가져가 주세요)" 이였다.


Please take it home.



두둥... 나는 여분의 비닐봉지가 없었다. 크게 당황하는 나의 모습에 리셉셔니스트가 와서,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됐으니 이번만 봐준다는 느낌으로 어디서 작은 비닐봉지를 가져다주었다. 도쿄에서는 병원뿐만이 아니라, 관광지가 아닌 곳은 쓰레기통이 없기 때문에 그 후로 나는 항상 여분의 비닐봉지를 가방에 갖고 다닌다. 


사실, 소아과에서 기저귀를 버리는 행위는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원래는 기저귀를 병원에 버리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혹시 아이가 아플 경우에는 기저귀가 감염 폐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어서. 하지만 한국과 영국에서 가봤던 모든 소아과에는 편의를 위해 항상 쓰레기통이 구비되어있었다. 




도쿄에 처음 왔을 때 내가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삶의 룰(rule)에 나를 끼어 맞춰야 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살아봤던 다른 나라들, 한국, 미국, 영국도 물론 큰 틀에서 자기들만의 법칙과 규칙이 있었지만, 자질구레한 일상까지는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사는 장소가 다르더라도 '나'라는 인간의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바꿀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지난번 포스팅에 쓴 것처럼, 모든 것에 보이지 않는 이들만의 규칙이 있고 예외란 있을 수 없다. 그 점 때문에 이들의 틀에 나를 맞춰 끼워야 했다. 친구나 친척집에서도 기저귀를 버리는 것은 굉장한 실례이다. 그렇기에 귀찮다고 비닐봉지를 갖고 나가지 않으면 아주 몰상식한 사람이 되거나, 사용한 기저귀나 과자 포장지 따위가 내 가방 속에서 지저분하게 굴러다닐 것이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 피해와 불편함이 나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그 후로 도쿄에서의 시간이 많이 흘렀다. 어느새 이들의 규칙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를 발견했다. 더 이상 불편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규칙이 있기에 생활이 편해진 점이 많았다. 규칙에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모두가 함께 지키는 규칙이 불필요한 고민과 사회적 마찰을 줄여준다는 것을 배웠다. 


이 심리는 학창 시절 교복과 같은 것이다. 교복을 입힌다는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교복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알듯이, 교복만이 주는 그 편안함이 있다. 이 편안함은 교복이라는 의복이 주는 육체적 편안함이 아닌 심리적인 편안함일 것이다. 사복을 입었을 때 올 수 있는 모든 불필요한 문제 또는 논쟁을 없애준다. 그리고 모두가 입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오는 소속감 또한 생긴다. 교복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결국에는 트레이닝복처럼 편한 옷이 아니더라도 교복이 몸에 익어 사복보다 더 편하다고 까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엄격한 쓰레기 분리수거 법 지키기, 손수건 갖고 다니기, 친구 집에서 음식 남기지 않기, 아기의 신발을 꼭 벗기고 공공장소 의자에 올려주기 등등 아주 사사로운 디테일에까지 이들은 규칙을 정해놓고 지킨다. 나 혼자만 이러한 사소하고 특이한 룰들을 정해놓고 지킨다면 손해를 보는 일이겠지만, 사회의 모두가 이를 루틴 화하여 지키기에 불협화음의 가능성을 크게 줄인다. 때로는 지키느라 힘들 수 있는 이 모든 규칙들이, 모두가 지키기에 오히려 사회 전반에 안정감이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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