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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Dec 04. 2023

미지의 매력, 오컬트

패션계 트렌드를 찾아온 손님 



마법 같은 순간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경이로운 경험을 했을 때, 우린 이러한 표현을 쓴다. 이 마법 같은 순간 속에서 인간은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이해할 수 없기에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그래서 흥미로운 것이다. 그렇다. 인간의 무궁무진한 호기심은 이처럼 모순 투성이다. 때로는 모든 의심을 벗겨낼 명명백백함을, 때로는 어떤 논리도 비껴갈 미지의 무언가를 꿈꾸니 말이다.



영화 세인트 모드(Saint Maud) ⓒesquire.com



오컬트(Occult)란 장르가 사랑받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만물의 민낯을 드러내는 과학을 맹신하면서도 그 절대적 법칙을 무력하게 만들 특별한 체험을 기대하는, 이런 이중적 심리를 교묘히 자극하는 게 바로 이 장르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다. 인간의 오감은 물론 상식마저 가뿐히 뛰어넘는 초월적 존재와 현상이 잔뜩 모여있는데, 목마른 호기심이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으랴.






두려움을 즐겨라


영화 엑소시스트(The Exorcist) ⓒclassichorrorshop.com


이게 다 영화 엑소시스트(The Exorcist) 때문이다. 오컬트 하면 사람들은 사탄 숭배나 악령에 빙의된 끔찍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하며 일단 얼굴부터 찌푸리니까. 하지만 절반은 오해다. 이 유별난 장르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주제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오컬트란 명칭은 '감추어진 것', '비밀' 등을 뜻하는 라틴어 '오쿨투스(Occultus)'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마법과 초능력, 점성술, 심령현상이나 UFO처럼 실존 여부가 불투명한 힘과 존재들을 주로 탐구하는 장르라 보면 된다.



스베타 도로셰바, 연금술사 ⓒbehance.net


그럼 상상해 보자. 지구 평평설이 불변의 진리라 여겨졌던 먼 과거의 세상을. 칠흑 같은 밤하늘 속 반짝이는 별들, 불현듯 쏟아지는 소나기, 번쩍하는 번개와 천둥, 매일 뜨고 지는 태양까지... 이 모든 게 풀리지 않는 신비로 남아있던 시절을 말이다. 그 시기의 인간은 지금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으며,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거대하고 혼란스러운 대상이었다. 오컬트는 이 혼란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현상들 속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서.



헤르난 바스, 오컬트 매니아 ⓒlonglistshort.com



그러나 현대의 오컬트는 과거에 비해 훨씬 성숙하게 변모했다. 급격하게 발전한 과학기술이 혼돈과 맹신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인간을 구원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는 호기심에겐 불행이었다. 더 이상 궁금해할 것이 사라져버리고 말았으니.

그렇게 갈 곳을 잃은 호기심은 정신의 가장 위대한 활동인 상상력과 조우한다. 덕분에 지금의 우리는 더 이상 정체불명의 것에 당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지에 대한 공포를 똑바로 마주하고,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이렇게 오컬트는 과거처럼 학문과 탐구의 성격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영감을 주는 하나의 장르로 굳어지게 되었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Eyes Wide Shut), 영화 검은 사제들(The Priests)ⓒimdb.com, ⓒmubi.com
영화 미드소마(MIDSOMMAR), PREEN BY THORNTON BREGAZZI 2017 SSⓒa24films.com, ⓒhero-magazine.com







개취 존중 부탁드립니다


1994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도시전설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교실 이데아를 거꾸로 재생하면, 피가 모자라... 라고 울부짖는 악마의 메시지가 들린다는 이야기였다. 그 여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추적 60분에서까지 이 문제를 다룰 정도였다. (근데 진짜 들리긴 들린다) 때문에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오컬트의 이미지는 최악. 세상의 종말을 바라는 사탄 숭배자들의 미친 행보로 치부되어 버렸다.



1994년 8월 1일에 방영된 KBS 추적 60분 ⓒseotaiji-archive.com



하지만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상황은 달랐다. 오히려 그들은 이러한 오컬트의 독보적인 분위기를 비주얼적 요소로 활용해 충성스러운 마니아들을 양산해내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의 일렉트로니카 그룹 프로디지(The Prodigy) ⓒmetalinjection.net

한때 내한을 한다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소문이 돌았던 영국의 일렉트로니카 그룹 프로디지(The Prodigy). 파워풀한 샤우팅과 몰아치는 비트가 인상적인 음악과 만난 악마 컨셉은 그들의 날카로운 카리스마를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장치였다.


매력적인 음악만큼이나 화제가 되었던 프런트 맨 키스 플린트(Keith Flint)의 스타일은 가히 경이롭다. 비비드한 컬러로 물들인 헤어와 섬뜩한 메이크업, 독특한 패션으로 매 공연마다 진검 승부를 펼치는데 무엇 하나 거를 타선이 없다. 진짜 악마의 인간형 그 자체. 하지만 매우 스타일리시하다는 게 함정이다.





프로디지의 프론트 맨 키스 플린트ⓒheraldsun.com, ⓒtheprodigy.info
키스 플린트에게 영감을 받은 VERSACE의 2020 SS ⓒvogue.com


1995년 결성된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 슬립낫(Slipknot)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이들의 사진을 보면 누구 하나 멀쩡하게 등장하질 않는데 그게 또 시선강탈에 한몫한다. 온갖 오컬트와 호러 무비 속 캐릭터들의 마스크를 쓴 모습이 방금 지옥에서 강림한 것만 같다.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 슬립낫(Slipknot) ⓒrollingstone.com



UK와 빌보드 차트 1위는 물론 2006년엔 그래미 수상까지 한 어마무시한 밴드인 만큼 엄청난 팬덤을 자랑하는데, 콘서트에 모인 팬들의 모습을 보면 슬립낫의 오컬트적 무드가 그대로 흡수된 것만 같다. 미리 맞춘 것 같은 비슷한 복장에 어디서 구했는지 노력이 가상한 마스크들까지. 이걸보면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난다는 말은 비단 부모자식 사이에만 통용되는 표현이 아닌 듯 하다. 어떤가, 당신도 이 파괴적인 위력에 동참하고 싶어지지 않는가?



슬립낫이 아니다. 슬립낫의 팬들이다. ⓒdesmoinesregister.com



그중에 최고봉은 아이슬란드의 보물, 비요크(Björk)다. 대체불가한 음색과 음악 스타일은 물론 매번 변신에 가까운 새로운 컨셉을 완벽히 소화하는 덕에 패션계가 애정하는 뮤지션으로도 손꼽리는 그녀. 장 폴 고티에(Jean Paul Gaultier)의 뮤즈이자,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아이리스 반 헤르펜(Iris Van Herpen)과의 협업까지. 기라성 같은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을 받으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달의 신을 표현한 비요크의 Biophilia 앨범 재킷. 의상은 네덜란드의 디자이너 Iris Van Herpen이 제작하였다.
장 폴 고티에의 1994년 런웨이에 섰던 비요크, 알렉산더 맥퀸과 함께 디자인한 Homogenic의 의상ⓒdazeddigital.com, ⓒbjork.com
Iris Van Herpen 2023 FW, Iris Van Herpen 2021 SS ⓒvogue.com



그녀가 얼마나 오컬트에 심취해 있는지는 몇 개의 인터뷰만 읽어봐도 파악이 가능하다. 2011년, The Quietus와의 인터뷰에선 서양식 점성술의 일종인 별자리 차트까지 완벽히 분석해내는 능력자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이게 다가 아니다. 그녀는 분명 이 장르의 매력을 정확히 캐치하고 있다. 마치 고대의 전설과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자연의 정령들의 모습으로 나타나 리스너들의 눈까지 매료시켜 버리니까.



ⓒdazeddigital.com, ⓒartsy.net, ⓒstyle.com







오컬트, 패션에서 빛을 발하다


오컬트의 진가는 패션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신비로운 분위기와 범접 못 할 카리스마. 쉽게 재현하기 힘든 두 가지 매력이 공존하는 장르이니 말이다. 만약 당신이 남들과 차별화된 아웃핏을 원한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할 코스다.





빛을 경계하라


블랙 코드는 오컬트 패션의 기본이다. 평생 해를 등진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운의 드라큘라와 강력한 마법의 힘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마녀를 떠올려보라. 그들의 착장은 어둠을 상징하는 블랙, 그 자체다. 특유의 무겁고 음산한 무드가 오히려 베일에 싸인 존재의 비밀스러움으로 읽힌다.



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Interview With The Vampire), BBC의 드라큐라 시리즈ⓒimdb.com, ⓒbnnvara.nl
드라큘라에서 영감을 받은 Gareth Pugh(위)와 RODARTE(아래)의 콜렉션ⓒi-d.vice.com, ⓒvogue.com
ANN DEMEULEMEESTER 2018 FW, 2017 FW ⓒvogue.com



약간의 퇴폐미를 가미한 고스 룩 역시 오컬트의 향취가 풍기는 스타일이다. 물론 그 기반은 서양의 고딕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후에 오컬트 소설 속 주인공들의 서사와 맞물리며 보다 강렬한 캐릭터성을 띄게 된 것. 초월적인 능력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뱀파이어, 오래된 성 안에서 홀로 마법을 연마하는 마법사. 영험한 존재에 심취해 비밀스럽게 움직이는 밀교도들까지. 이성의 힘에 지배받지 않는 초월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의 패션까지 바꾸어놓았다.



Alexander McQueen 2007 FW ⓒvogue.com
일본의 고스 룩 스타일ⓒelle.com, ⓒwwdjapan.com, ⓒlolitahistory.com
Dior 2017 SS COUTURE, GUCCI 2019 RESORT
YOHJI YAMAMOTO 2020 FW, COMME des GARCONS 2020 SSⓒvogue.com







당신의 미래를 알려드립니다


미래를 점치기 위한 도구로 쓰인 타로 카드(Tarot). 각 카드의 상징을 뜻하는 아름다운 그림은 여러 예술가들에게 신선한 영감이 되어주었다.

현재 Dior의 디렉터를 맡고있는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Maria Grazia Chiuri)의 데뷔 컬렉션 역시 타로에 기반해 있다. 이 아이디어는 Dior의 창립자였던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오랜 습관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 전해지는데, 타로에 심취해 있었던 크리스찬이 자신의 컬렉션을 선보이기 전 카드점으로 결과를 점쳐보곤 했다고.



Dior 2017 SSⓒvogue.com



서양식 점성술에 토대가 된 별자리를 다룬 컬렉션들애서도 패션에 스며든 오컬트의 흔적을 포착할 수 있다. 탄생일을 기반으로 한 서로 다른 12개의 성향이 개성을 중시하는 패션계의 경향에 딱 맞아 떨어진다. 게다가 반짝이는 별들이 미적 만족감까지 충족시켜 주니 기특하기 그지없다.



Elsa Schiaparelli 1938 FW, John Galliano 1997 SS
VALENTINO 2016 PRE-FALL, Emilio Pucci 2015 FWⓒvogue.com







미지의 존재들


매번 반신반의하지만, 도무지 미련을 놓을 수 없는 유령과 외계인. 이 미지의 존재들을 향한 인간의 열광적인 관심은 아마 세상이 끝날 때까지 식지 않을 것 같다. 아이나 어른이나 이 이야기만 나오면 홀린 듯이 집중하니 말이다.

이러한 강력한 이끌림은 패션의 상상력에도 불을 지폈다. GCDS의 2022년 컬렉션에 등장한 기이한 의상들이나 HR 기거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Alexander McQUEEN의 2010 SS 런웨이, UNDERCOVER의 마스코트인 GRACE Dolls까지. 마치 오컬트 영화 한 장면에나 등장할 법한 광경이 무대 위에 실물로 나타났다.



GCDS 2022 FW
Alexander McQUEEN 2010 SS
BURBERRY 2022 SS, UNDERCOVER의 마스코트 GRACE Dollsⓒsabukaru.online, ⓒnssmag.com, ⓒvogue.com










그래도 나는 믿고 싶다


ⓒbuzzfeed.com




아직도 오컬트를 소수의 취향이라 단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뜬구름 잡는 소리를 믿고 좇는다며 비난하고 조롱하는가.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다 트렌드를 몰라서 하는 소리다.

미국의 유명 스톡이미지 사이트인 셔터스톡(Shutterstock)은 2020년 크리에이티브 보고서를 통해 오컬트가 최근 트렌드로 급부상 중이라 발표했다. 마법(Magic)에 대한 검색량은 525%, 영적(Spiritual)에 대한 검색량이 289%나 증가했다고. 이는 곧 대중들이 오컬트만이 갖는 신비한 매력에 차츰 매료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결과다. 상식과 이성이 닿지 않는 곳에 우두커니 머물러 있을 그 무언가를, 우린 여전히 믿고 싶어 하는 것이다.



Maison Margiela 2021 SS ⓒvogue.fr



단순한 선호가 어엿한 취향이 되려면, 스스로의 판단을 굳게 믿어야만 한다. 그러니 남몰래 오컬트를 검색창에 입력하고 있을 그대여, 이젠 당당히 자신의 취향을 선포해라. 어떤 이는 음침하다며 손사래를 치고, 어떤 이는 기분 나쁘다며 시선을 돌릴지도 모르지만, 당신은 그 비밀스러운 어둠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그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한 행운아니까.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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