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온라인 컬렉션, 최초의 팝업스토어, 패션계를 사로잡은 나비효과
Stories: New Beginnings
최초의 온라인 컬렉션, 최초의 팝업스토어, 패션계를 사로잡은 나비효과들
시작 알레르기.
이 생소한 알레르기의 개요는 이렇다. 시작이란 단어만 보면 책임감과 부담감이 밀려와 식은땀이 나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입술이 바짝 마르고 손끝이 저려오는 것이 주요 증상. 매해 반복되는 1월 1일이 마냥 설레지 않는다면 한 번쯤 의심해 볼 만한 질환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설마 이걸 진짜 믿는 사람은 없겠지.
하지만 시작은 설렘 반, 두려움 반이라는 말이 괜히 있나. 언제부턴가 시작 앞에서 멈칫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면 반드시 이 글을 읽어야만 한다. 여지껏 단 한 번도 지키지 못한 새해 다짐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서툴고 사소한 시작이 이뤄낸 놀라운 결과들이 바로 여기 모여 있으니까.
새로운 출발 앞에서 선 당신을 위한, 패션의 역사를 바꾼 시작의 순간들.
스스로를 패션의 왕이라 칭했던 프랑스의 디자이너, 폴 푸아레(Paul Poiret, 1879-1944). 자신을 왕이라 부르다니 뭔가 사이비의 냄새가 솔솔 풍겨오지만… 장담한다. 그는 진짜다.
패션을 바라보는 푸아레의 혁신적인 시선은 패션 모더니즘의 초석을 다졌다 평가받는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예술과 상품의 경계에 있는 패션의 양면성을 균형 있게 다루면서, 이전의 패션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시도들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는 21세기의 패션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지점과도 긴밀히 맞닿아 있다.
나는 내 옷에 서명을 할 때마다 나를 이 명작의 창조자로서 여긴다.
단언컨대 푸아레는 창조적인 디자이너였다. 그는 디자이너라면 단순히 옷을 짓는 데 열중하는 것이 아닌, 입는 사람의 욕망을 헤아리고 이를 효과적으로 적용하며, 앞으로 다가올 경향을 예측할 선구안까지 지녀야 함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다. 푸아레는 여성을 코르셋(Corset)으로부터 해방시킨 감사한 인물이기도 하다. 가슴 밑으로 헐렁하게 떨어지는 하이 웨이스트 라인의 디자인과 1920년대 플래퍼(Flapper) 스타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심플한 드레스는 불편한 코르셋 없이도 충분히 아름다운 실루엣을 표현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외에도 일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 스타일의 코트와 와이어를 설치해 마치 전등갓처럼 보이게 만든 드레스, 터번 형태의 머리 장식 등은 오리엔탈리즘에 매료되었던 그의 취향과 풍부한 상상력을 드러내는 인상적인 아이템이다.
현재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는 여러 럭셔리 브랜드의 행보는 사실 모두 푸아레의 아이디어를 계승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이미 CHANEL보다 10년 앞선 1911년, 패션 디자이너로선 최초로 독자적인 향수 라인을 론칭했으며, 나아가 인테리어 디자인과 패션을 조화시켜 고객의 라이프스타일 속으로 스며들기 위한 시도를 거듭했다.
사실 패션만큼 도전에 관대한 분야도 없다. 지난 한 해 패션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을 회상해 보라. 열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의 수많은 콘셉트와 트렌드들이 넘쳐나지 않았는가. 결국 이 모든 시도의 근원엔 이 폴 푸아르의 탁월한 심미안과 망설이지 않는 실행력이 서려있었다. 이쯤 되면 스스로를 패션의 왕이라 칭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옛날 옛적, 인터넷이 없고 스마트 폰도 없고 심지어 티브이까지 없는 세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세상에도 패션은 존재했었다.
패션은 매체의 발달의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분야다. 쇼핑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젠 유튜브에서 클릭 한 방이면 각종 브랜드의 런웨이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날이 갈수록 패션은 런웨이에 진심이 되어간다.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효과적으로 어필하기엔 이만한 기회가 없으니.
지금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광경이지만,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런웨이는 VIP 고객을 위한 프라이빗한 행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화려하고 웅장한 런웨이의 모습은 어디서 온 것일까?
패션과 런웨이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한 몸이었다. 패션의 상업적 측면을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도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품을 실제로 접하고 이를 통해 구매를 유도하는 아주 단순한 시스템이었지만, 브랜드에겐 가장 중요한 홍보 수단이 되어 준 기특한 이벤트였다.
때문에 19세기 말의 런웨이는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중요한 행사였다. 비즈니스에 정통한 디자이너들은 여성들을 고용해 자신의 의상을 입히고, 경마장이나 산책로를 거닐게 했다. 대중들의 시선을 받고 언론의 주목을 이끌어 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패션의 왕, 폴 푸아레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그의 주최 아래, 1911년에 개최되었던 1002일째 밤(Thousand and Second Night)은 현대 런웨이의 새 장을 연 행사로 기록된다. 그는 당시 소소하게 진행되어 오던 런웨이를 사교 파티 형식으로 바꿔버리는 극단적 개혁을 시도했다. 초대된 손님들은 반드시 페르시아 풍의 의상을 입어야 했으며, 거절하거나 다른 복장으로 나타날 경우 입장이 불가하거나 그가 디자인한 임의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는 규칙까지 있었다. 어쩌면 현대 코스튬 플레이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겠다. 덕분에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은 본의 아니게 그의 작품의 모델이 되는 신선한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
파티의 분위기는 매우 호화스러웠다고 전해진다. 세계 각지에서 섭외한 댄서와 오케스트라의 수준급의 공연은 물론 오리엔탈 풍의 독특한 무대 장식, 또한 진귀한 음식과 주류로 초대된 손님들의 오감을 한껏 충족시켜 주었다고.
패션의 역사엔 수많은 폴 푸아레의 DNA를 이식받은 수많은 혁신가들이 있다. 비록 시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소했으나 현대엔 태풍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패션 속 나비효과 같은 순간들을 짚어보자.
: Yves Saint Laurent의 르 스모킹(Le Smoking)
그런 시절도 있었다. 턱시도가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지던 때가. 젠더리스 스타일이 트렌드로 올라선 현재엔 용납할 수 없는 고리짝 같은 소리지만 말이다. 이 오랜 고정관념을 깨부순 구세주는 바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Yves Saint Laurent)!
그는 1966년 FW 컬렉션에서 중성적인 멋을 강조한 여성용 턱시도, 르 스모킹 라인을 론칭한다. 불과 30년 전인 1930년대에 유명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Marlene Dietrich)가 남성복을 착용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 위협까지 받을 정도였으니, 이 시도가 얼마나 혁신적이었는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듯. 대담하고 강력한 아우라가 느껴지는 의상들을 보면 오늘날의 SAINT LAURENT의 무드의 본질을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요즘의 런웨이는 혹시 데님에게 점령당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과거의 데님은 하이 패션과는 다소 거리가 먼 아이템이었다. 데님이 처음으로 런웨이에 등장한 건 바로 1975년의 Calvin Klein의 청바지. 20세기 가장 도발적인 캠페인이란 영예로운 칭호를 얻은 같은 해의 광고와 맞물려, 패션에서 데님의 위치를 상승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해냈다.
HELMUT LANG의 1998 FW 컬렉션은 당시 패션계에 여러모로 큰 충격을 선사했다. 뉴트럴 톤이 장악한 컬러 팔레트와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심플한 실루엣, 이에 더해진 네온 컬러 포인트와 토끼 귀 디테일까지. 헬무트 랭의 행보를 주시하던 미니멀리스트의 욕망을 충분히 채워주고도 남을 만큼의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이 쇼가 주목받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컬렉션 전체를 녹화한 필름을 인터넷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던 것.
당시엔 라이브 스트림 기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아쉽게도 사전 녹화의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으나, 2022년 팬데믹을 시작으로 현재 거의 모든 브랜드가 런웨이의 라이브 송출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걸 보면 엄청나게 앞선 행보다.
이 모든 사건(?)의 주도자, 디자이너 헬무트 랭은 2020년 WWD와의 인터뷰 이 최초의 방식이 굉장히 성공적이었음을 강조했다. 온라인 시청을 통해 전 세계의 잠재 고객이 런웨이 룩에 즉시 익숙해질 수 있었고, 그 룩을 구매하기 위해 매장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는 확실한 성과를 이뤄냈으니까.
2023년은 팝업스토어의 해였다고 하도 과언이 아니다. 패션은 물론 음식과 음악, 문학 등 여러 분야의 팝업스토어가 전국 방방곡곡에서 열렸으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궁금증 하나. 이 팝업스토어란 개념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물론 우리나라 오일장과 같은 문화 역시도 팝업스토어의 시조새 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접하는 팝업의 형식과 흡사한 건 90년대 후반 무렵부터 나타났다. 시즌 상품을 중점적으로 판매했던 유럽의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미국의 할로윈 상점 등이 그 예다.
공식적인 첫 팝업스토어의 원형은 1997년, 미국의 미디어 기업가인 패트릭 코리엘츠(Patrick Courrielche)가 LA에서 기획한 대형 이벤트다. 음식과 음악, 패션을 하나로 모은 하루 짜리 행사였지만 자신의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여러 기업이 참여했다는 점과 방문객에게 브랜드에 대한 단기적 경험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지금의 팝업스토어와 같은 결을 보인다. 행사를 찾은 고객들의 반응 역시 뜨거웠다. 궁극의 힙스터 몰(Ultimate Hipster Mall)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고.
그런데 패션 브랜드가 독자적으로 선보인 최초의 팝업스토어는 바로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의 COMME des GARCONS. 혹시나가 역시나. 언제나 기발한 발상으로 우릴 놀래키는 멋진 브랜드다.
2004년, 독일 베를린을 시작으로 여러 나라에서 단발적으로 진행되었던 COMME des GARCONS의 팝업스토어는 게릴라 샵이라는 독특한 컨셉을 내세우며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들에겐 나름의 철저한 조건도 있었다. 한 곳에서 1년 이상 지속되지 않아야 하며, 대중적인 명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것. 또한 리모델링 작업을 배제함으로써 공간 본연 그대로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할 것.
그래서인지 현장 사진을 보면 마치 COMME des GARCONS 군단의 습격을 받은 것만 같다. 정제되지 않은 환경에 자유롭게 배치된 제품들까지. 디자인만큼이나 참 파격적인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패션 모더니즘의 기반을 다진 폴 푸아레부터 최초의 팝업스토어까지. 패션의 역사를 바꾼 최초의 순간들은 그렇게 불현듯 시작되었다. 그들에겐 비장한 각오도, 불타는 야심도, 성공에 대한 확신도 없었다. 그저 하고 싶은 건 해야만 한다는 강한 의지 만이 있었을 뿐이다. 또한 이로써 다시금 깨닫는다. 예측 불허의 불안을 벅찬 설렘으로 둔갑시키는 시작의 놀라운 힘을.
이 절대적인 힘 앞에 우린 기꺼이, 그리고 행복하게 굴복하고 말 것이니.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