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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an 12. 2024

우리는 패션으로 청춘을 기억한다

영화 파라노이드 파크, 키즈, 키즈 리턴으로 살펴보는 어린 날들의 초상

Stories: Youth Culture in Film

우리는 패션으로 청춘을 기억한다



히치 하이킹을 하는 두 소년이 주인공인 짧은 소설을 쓴 적이 있다. 배경은 호주. 과거 브리즈번에서 잠시 머물 때 자주 가던 여행 코스가 주 무대였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소꿉친구인 찰스와 로빈. 아침에 엄마와 심하게 다툰 찰스는 더 이상 나를 찾지 말라는 쪽지만 덩그러니 남기고 무작정 집을 나선다. 그리곤 곧장 로빈에게 달려가 함께 해변으로 떠날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전 세계의 모든 소년이 그렇듯, 이 둘 역시 주머니엔 땡전 한 푼 없다. 망연자실하는 찰스. 친구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던 로빈은 고민 끝에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찰스, 우리 히치 하이킹을 하는 건 어때.

그리고 그들은 그렇기 애지중지하던 스케이트 보드 밑판에 골드 코스트(Gold Coast: 브리즈번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 걸리는 해변 도시)라 크게 적는다. 의외로 머뭇거리던 찰스가 먼저 보드를 머리 위로 치켜들고 도로변에 나선다. 그때 저 멀리서 나타나는 은빛 포드 팰컨. 하지만 막상 세우고 보니 차가 거의 만석이다. 운전석엔 청년 한 명, 뒷자리엔 그의 부모로 보이는 노부부. 게다가 집채만 한 골든 리트리버까지 타고 있어 두 소년이 함께 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또다시 망연자실해 버리는 찰스. 하지만 로빈은 비장하게 말한다. 너 먼저 가, 곧 뒤따라 갈게. 그렇게 두 소년은 각자 다른 차를 얻어 타고, 같은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이상한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는 이야기.






우리는 패션으로 청춘을 기억한다


나의 상상 속 찰스는 붉은 머리에 빼빼한 몸, 초록 도마뱀이 그려진 파란 캡을 쓰고 있었다. 또 다른 주인공인 로빈은 짙은 밤색 머리칼에 하얀 비니, 그리고 웃을 때마다 살짝 보이는 벌어진 앞니가 매력 포인트.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패션이었다. 그저 소설 속 가상의 인물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브리즈번 공원에서 보았던 보드 소년들을 떠올리며 두 소년의 의상을 구상해 갔다. 우선 찰스에겐 STUSSY의 화이트 티셔츠를, 로빈에겐 Supreme의 빨간 박스 로고가 가슴팍에 새겨진 차콜색 티셔츠를 입혔다. 하의는 (당연히) 둘 다 Levi’s 빈티지 데님, 그것도 최대한 헐겁게 걸치도록. 신발은 두 말할 것 없이 Vans의 블랙 스웨이드 하프캡.



영화 미드 90(2019) ⓒgq-magazine.co.uk



사실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없었다. 설령 그들이 파자마 차림이라 했어도 말이다. 그래봤자 ‘거리의 사람들이 파자마 차림의 소년들을 흘깃거렸다’, 라던가 ‘뒷자리에 앉아있던 노부부가 찰스에게 물었다. “넌 왜 파자마를 입고 있니?”’ 정도의 문장이 추가되었겠지. 하지만 내겐 이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청춘의 한가운데에서, 아무 차나 얻어 타고 훌쩍 떠나버릴 만큼 패기 넘치는 그들이 과연 무엇을 입고 있는지가.

가장 찬란한 시기. 아무도 범접할 수 없을 본인만의 개성을 갈고닦는 시기. 누구에게 멋져 보이고 싶어 거울 앞을 밤낮으로 서성이던 시기. 청춘 속 시시때때로 솟구치는 이름 모를 감정들은 고작 몇 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희미해진다. 하지만 그때 입었던 그 착장은, 그 스타일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된다. 그렇기에 청춘과 패션은 시대를 불문하고 영원히 하나다.






무심함의 미학


그래서 그런가. 수많은 청춘 영화들 속 패션은 그토록 반짝일 수가 없다. 뚜렷한 공통점이나 특징 따윈 없다. 아무거나 입은 것 같지만, 결코 아무거나 입지 않았다. 이 한 문장이면 설명 끝이다.

그 무심한 멋의 끝판왕은 뭐니 뭐니 해도 스트릿 패션이 아닐까. 슬쩍 걸친 후드와 배기 진, 아무렇게나 눌러쓴 비니에서 흐르는 아우라가 나는 트렌드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입고 싶은 걸 입을 뿐이야 라고 외치고 있으니.



파라노이드 파크(Paranoid Park, 2007) ⓒimpawards.com



이런 흐르는 패션의 맛을 잘 알고 있는 감독이 몇 있다. 그중 첫 타자는 미국의 구스 반 산트(Gus Van Sant). 60회 칸 영화제에서 특별 기념상을 수상한 그의 작품 파라노이드 파크(Paranoid Park, 2007)는 연출과 내용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매 장면이 스트릿 브랜드의 캠페인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힙한 분위기의 미장센이 일품이다. 특히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8미리 카메라 영상은 그중에서도 백미. 또한 주인공 역인 알렉스를 전문 배우가 아닌 일반인으로 선택한 것 역시 탁월했다. 익숙하지 않은 마스크에서 풍기는 날 것 그대로의 생생함이 카메라를 뚫고 나올 정도니까.



영화 촬영 현장의 구스 반 산트 감독과 두 주인공 ⓒplansamericains.com


영화 속 패션 역시 심상치 않다. 주된 배경인 파라노이드 파크가 스케이트 보드 파크라 진짜 찐 보드 패션이 원 없이 쏟아져 나온다. 박시한 티셔츠와 후디, 의외의 컬러로 포인트를 준 무늬와 뭔가 있어 보이는 뜻 모를 문구들. 당신이 보드 패션에 일가견이 있다면 꼭 봐야 할 작품으로 자신 있게 추천한다.




ⓒtelegraph.co.uk, ⓒfilmlinc.org, ⓒimdb.com, ⓒport.hu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패션처럼 멋지지 않다. 오히려 암울하다. 미숙한 자아의 잘못된 판단이 치명적인 실수를 낳고 결국 평생의 죄책감으로 남게 되는, 젊은 날의 숙명을 묵직하게 그려내니까. 그러니 얘들아, 누가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엔 함부로 가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세상엔 어쩔 수 없는 게 분명히 있다. 그저 소년은 넘치는 호기심이 이끄는 길로 주저 없이 따라갔을 뿐. 이해한다. 아마 나라도 뾰족한 수는 없었을 거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품게 된 소년이 작은 공책에 솔직한 마음을 적기 시작할 때, 관객 역시 누구에게도 보여주기 싫었던 자신의 일기를 가만히 읊어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영화를 보는 동안 비난의 화살은 고요히 멎어간다.







총천연색 개성들의 아름다운 파열음


영화는 예쁜데 내용은 쓰레기야. 이 영화를 본 친구들의 반응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당신도 그럴까? 희대의 문제적 작품, 래리 클락(Larry Clark)의 키즈(Kids, 1995)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 친구들의 말대로 이 영화는 예쁜 쓰레기 일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은 억울했다. 솔직히 내용보단 클로에 세비니(Chloe Sevigny)가 예뻐서 보라고 한 건데...



키즈(Kids, 1995) ⓒboo-hooray.com



그렇다.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 그 클로에 세비니가 맞다. 내로라하는 국내 셀럽들의 패션 롤모델이자, 기라성 같은 럭셔리 브랜드의 뮤즈로 활약해 온 그 분 말이다. 이 영화에서 클로에는 짧은 커트 머리로 등장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앳되고 신선한지 탄성이 절로 나온다. 연기력도 일품이라 이 작품 이후 본격적으로 영화계에 진출하게 되었다고.



영화 키즈로 데뷔한 클로에 세비니(우) ⓒnytimes.com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좋은 표현이 없다. 그래서 또 한 번 꺼내본다. 아무거나 입은 것 같지만 결코 아무거나 입지 않았다.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어디 하나 멀쩡한 곳이 없지만 아니, 인생의 바닥 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을 살아가는 가엷고도 불행한 청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놀랍도록 빛난다. 저마다의 총천연색 개성들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파열음이라고나 할까.



ⓒnytimes.com, ⓒvariety.com



하지만 스토리는 믿기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뉴욕 타임스의 저널 리스트인 자넷(Janet Maslin)은 이 작품에 대해 ’미국 청소년기의 초상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처럼 보이게 만든다.‘ 라고 평가한다. 또한 주인공인 제니 역의 클로이는 ‘매혹적이며, 충격적인, 소름 끼치면서도 흥분되는 영화’라 표현한다. 덧붙여 이 영화를 구매하고 배급한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은 ‘내가 본 영화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영화였다’고 고백한다.

내 추천에 쓰레기라고 격분의 답신을 했던 친구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키즈는 마냥 예쁜 쓰레기가 아니다. 미국 사회의 어두운 면을 있는 가감없이 담아낸 역사적인 작품이다. 어른들이 만든, 하지만 어른들은 부재한 세상에서 어른보다 더 깊이 타락해 버린 미성년들의 처참한 실상을 살벌하게 담아내고 있으니.



감독 래리 클락(좌)와 주연배우인 저스틴 피어스(우) wmagazine.com
포토 그래퍼로도 활약하는 래리 클락이 직접 찍은 촬영 현장의 폴라로이드 ⓒnssmag.com


영화 개봉 20주년 기념으로 진행된 Supreme x Kids 캡슐 컬렉션 ⓒvhsmag.com
JW ANDERSON과 래리 클락의 협업 포토북 The Smell of Us ⓒvogue.comⓒvogue.com






내 맘대로 입어도 사는 덴 전혀 지장이 없다네


기타노 타케시(Takeshi Kitano)의 영화를 좋아한다. 거의 대부분 좋아한다. 아니, 전부 다 좋아하는 거 같다. 아웃 레이지(Outrage, 2010) 같은 야쿠자물까지 꼬박꼬박 섭렵한 걸 보면 말이다. 그중 최애는 1996년 작인 키즈 리턴(Kids Return)이다. 기타노가 그려내는 청춘 군상이 참 맘에 들어서다. 그의 청춘은 참 철판이 두껍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실패하고 쪽팔려도 쿨하게 인정하고 꿋꿋하게 일어나 툭툭 털고 갈 길을 간다.



키즈 리턴(Kids Return,1996) ⓒimdb.com



솔직히 기타노를 보면, 패션이랑은 거의 담을 쌓고 지낼 것 같은 인상이지만 의외로 그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꽤나 칸지(感じ: 느낌이란 뜻의 일본어 명사)가 있다. 키즈 리턴의 두 주인공, 마사루(카네코 켄)와 신지(안도 마사노부)도 그렇다. 둘의 교복 패션부터 트레이닝 패션, 스트릿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복 패션과 야쿠자 패션까지 90년대 일본 패션의 총집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독 기타노 타케시와 두 주인공 ⓒimdb.com, ⓒeastasia.fr, ⓒprimevideo.com




학교에서 문제아로 이름난 신지와 마사루. 단짝 중에 단짝이었던 그들의 인생은 작은 계기로 인해 확연히 갈린다. 영화를 꼭 봤으면 하는 마음에 스포는 하기 싫으니 타고난 재능 차이라고 일단 해두자. 어쨌든 선생에겐 인간 말종 취급이나 받던 그들이었지만 각자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해 점차 유의미한 성과를 쌓아가게 된다. 야쿠자의 길을 걷게 된 마사루는 조직에서 중간 보스 자리를 꿰차고, 프로복서로 성장한 신지는 큰 대회에서 활약하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이다.



ⓒimdb.com


하지만 이놈의 인생,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결국 배신과 나쁜 유혹에 휘말려 참담한 실패에 빠진 두 주인공. 영화의 말미, 다시 조우하게 된 둘은 주변 모두가 이들에게 등을 돌린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반가이 맞이한다. 그리고 기꺼이 함께한다. 이때 나오는 대사가 참 좋다.

마짱, 우리들 이제 끝난 걸까?

신지가 마사루에게 묻는다. 그에 대한 마사루의 대답은 이렇다.

바보,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잠시 주춤하는 모든 청춘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오랜 방황 끝에 다시 재회한 마사루와 신지 ⓒasianmoviepulse.com



자, 그렇다면 나의 소설 속 찰스와 로빈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래도 독자들의 흥미를 자극하려면 찰스가 탄 차의 트렁크엔 수십억의 현금다발이 들어있어야 할 것이고, 뒤따라 간 로빈이 탄 차엔 신분을 감추고 기밀 작전을 진행 중인 그리스 출신 CIA 요원 정도는 있어줘야 맞는 거겠지만. 아쉽게도 내가 쓴 이야기는 이런 흥미진진한 서스펜스 추격전과는 거리가 멀다.

다행히도 둘은 무사히 골드 코스트에 도착한다. 찰스보다 늦게 출발한 로빈이 오히려 먼저 도착해 있다는 게 좀 이상한 점이긴 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 별 탈 없이 목적지에 도착했으면 그걸로 된 거지.

겨우 두 시간 남짓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서로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다. 찰스는 노부부의 50주년 결혼기념일 맞이 가족 여행 후기와 3년 전 유기견이었던 골든 리트리버를 입양하게 된 청년의 사연, 그리고 그 청년의 어린 시절과 자신의 모습이 놀랍도록 닮았다는 신기한 우연을 로빈에게 말해 줄 예정이다.

할 말이 많은 건 로빈도 마찬가지다. 홀로 남은 로빈 앞에 멈춰 선 빨간 토요타 아발론의 등장을 시작으로, 차주인 젊은 여성의 터프한 운전 실력과 그녀가 자신의 Supreme 티셔츠를 칭찬해 줘서 뿌듯했던 마음, 그러나 사실 그녀는 바로 어제 7년을 만난 연인과 이별한 뒤 고향을 떠나는 길이었다는 하소연까지. 그렇게 다시 만난 찰스와 로빈은 홀로 떠난 생애 첫 여행의 경험담을 나눈다. 그들 앞엔 한없이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마치 아직 도달하지 못한 미래처럼.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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