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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an 26. 2024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양말에 샌들은 정말 괜찮을까? 팬츠리스 트렌드는 또 어떻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

우리 모두에겐 이런 금쪽이 시절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골치 아파지는 질풍노도의 시기, 사춘기.

올해 패션계에도 이런 사춘기가 찾아온 것일까. 절대 하지 말라며 그렇게 나무라던 패션 불변의 규칙들이 어엿한 트렌드가 되어 나타났다. 뭔가 의심스럽다고? 걱정 마라. 지금부터 제시할 몇 가지 키워드만 숙지한다면 그 누구보다 멋지게 이 트렌드를 소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양말에 샌들을 신으면 안 된다


이젠 전설이 되어버린 최악의 듀오. 흰 양말에 스포츠 샌들은 아재 패션의 상징이자, 괴짜 패션의 핵심이자, 영국인들을 최악의 패션 센스를 가진 유럽 관광객으로 만든 악명 높은 조합이다. 오죽하면 위키피디아엔 양말과 샌들 이란 항목이 따로 개설되어 있으며, 해외판 지식인 서비스 Quora엔 샌들에 양말을 신는 게 범죄입니까? 라는 질문이 올라와 있을 정도다.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돋는 조합 ⓒistockphoto.com



사람들이 이 조합을 납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효율성에 있다. 본래 샌들은 발의 통풍을 목적으로 하는데, 거기에 양말을 신어버리는 건 샌들의 존재 이유를 무의미하게 하는 거라나.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양말은 발의 보온을 목적으로 하는데, 샌들은 보온과는 전혀 동떨어진 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 둘의 만남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 것이다.



혼자 꿋꿋하게 샌들에 양말을 착용한 베컴 ⓒtheguardian.com
그동안 꾸준히 양말과 샌들 조합을 밀고 있었던 저스틴 비버ⓒpopsugar.com, ⓒvogue.com



그래도 아름답다면 모든 게 괜찮지 않을까? 여러 럭셔리 브랜드들은 이 해묵은 인식을 깨기 위해 남다른 시도를 이어왔다. VETEMENTS와 Maison Kitsuné, Lucien Pellat Finet 등 여러 컬렉션에서 샌들과 양말의 조합을 런웨이 위로 당당히 출동시켰던 것.



VETEMENTS 2018 FW, Maison Kitsuné 2018 FW
Lucien Pellat Finet 2018 FW ⓒvogue.com




비록 시작은 미미했지만, 이윽고 그 작은 물결은 점차 큰 파도로 변하여 2024년인 현재엔 트렌드의 반열에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거듭되는 반대와 외면의 순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전 세계 패션 애호가들의 동의를 얻어낸 샌들과 양말. 우린 그들의 만남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다.



MSGM 2024 SS, Victoria Beckham 2024 SS
KENZO 2024 SS, Maryam Nassir Zadeh 2024 SS ⓒvogue.com



셀럽들의 동참도 이러한 성과에 크게 한몫했다. 모든 여성들의 워너비인 지지 하디드와 헤일리 비버까지 이 조합에 과감히 몸을 던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블랙이나 브라운처럼 어두운 컬러의 샌들에 은은한 베이지와 화이트처럼 강한 대비를 줄 수 있는 양말을 선택하였으니, 이 부분 참고할 것. 또한 올봄 유행 아이템인 버뮤다 팬츠와 롱 스커트 룩에 부츠 대신 활용하기도 괜찮은 조합이다.



ⓒvogue.in, ⓒinstyle.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경한 트렌드에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면, 죽으면 죽었지 샌들과 양말은 용납할 수 없다면... 그런 당신을 위해 온 마음으로 추천한다. 차라리 양말만 신어버리라고. 어떻게? YEEZY와 BOTTEGA VENETA의 삭스 슈즈처럼. 거추장한 신발에 대한 생각을 아예 지워버린, 이 질풍노도의 결정체에 과감히 도전해 보는 거다.



YEEZY의 삭스 슈즈를 신은 칸예 웨스트, BOTTEGA VENETA의 캠페인 속 켄달 제너ⓒvogue.com, ⓒhypebeast.com








속옷이 왜 속옷이냐


안에 입으니까 속옷이 아니겠느냐, 하며 딸내미에게 등짝 스매싱을 날리던 어머니들껜 매우 안 좋은 소식이다.

패션계가 명하노니 이젠 각종 속옷들이 겉옷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




MIU MIU 2023 FW
Dolce & Gabbana 2024 SS
Dior 2024 SS, Vaillant 2024 SSⓒvanityteen.com, ⓒvogue.fr




이 트렌드의 핵심은 ‘속옷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다. 최근 새로움보다 대담함에 초점이 맞춰진 듯한 컬렉션들 안에서 속옷의 인기는 최고점. Acne Studios와 Natasha Zinko, SRVC, GCDS 등에서 선보인 착장은 우리가 여태껏 알고 있던 속옷과 겉옷의 경계를 보란 듯이 허물어 버린다.



Acne Studios 2024 SS, Natasha Zinko 2024 SS
SRVC 2024 SS, GCDS 2024 SSⓒhypebae.com, ⓒvogue.fr
Vaquera ⓒVaquera.nyc




그저 민망해 하기엔 아직 이르다. 우리 앞에 나타난 그들의 속옷룩은 그야말로 완벽하니까. 컬러는 물론 소재와 모양까지 겉옷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트렌치코트와 블랙 슈트, 클래식한 셔츠와 니트웨어까지 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게 없다.

물론 지금 당장 도전하라고 등 떠밀 순 없지만 이대로라면 근 삼 년 안엔 가능해지지 않을까? 그때가 오면 모든 사람들이 한때 팬티라 불리었던 바지를 입고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게 될지도 모른다.



MIU MIU 2024 SS, Cormio 2024 SS
OTTOLINGER 2024 SS, Chet Lo 2024 SSⓒhypebeast.com, ⓒshowstudio.com
숙련된 패션 감각으로 멋지게 팬츠리스 룩을 소화한 벨라 하디드와 카일리 제너 ⓒcelebsfirst.com








상습적 비율파괴범


요즘 유행하는 오버사이즈 실루엣의 열광적인 지지자로서, 어깨의 끝보다 한 뼘 이상 나아가지 않는 재킷과 코트를 모두 처분해 버린 사람으로서, 비율이 변형이 얼마나 미학적인 재미를 줄 수 있는지 익히 체감 중이다. 조금만 틀어져도 불편한 게 비율이며, 조금만 조절해도 아름다운 것도 비율이며, 조금만 변해도 색다른 느낌을 줄 수 있는 게 바로 비율이니까.



다빈치의 황금비율 ⓒmos.org


하지만 가끔 선을 넘는 디자이너들이 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황금 비율을 설계한 다빈치 님의 말을 도통 들어먹질 않는 그들. 비율을 흥미롭게 조절하다 못해 폭력적으로 변형시켜 버리는 빌런들. 나는 그들을 상습적 비율파괴범이라 부르는데, 아마 올해는 이 빌런들이 활개칠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JW ANDERSON 2024 SS, COMME des GARCONS 2024 SS ⓒvogue.com




그중 가장 악질은 바잘리아 형제다. 그렇다. 이젠 모르는 사람이 없는 BALENCIAGA의 뎀나 바잘리아(Demna Gvasalia)와 VETEMENTS의 구람 바잘리아(Guram Gvasalia), 이 둘 말이다.

한 유튜버는 BALENCIAGA의 신발을 보고 점점 자라고 있는 거 아닌가? 하며 농담을 던졌는데, 올해 들어 또 약간 커진 걸 보니 어쩌면 정말 자라고 있는 걸지도. 신발 크기 따위엔 굴복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내비치고 있는 중이다.



BALENCIAGA 2024 SS
BALENCIAGA 2024 SS
Feng Chen Wang 2024 FW ⓒvogue.com



그렇다면 VETEMENTS는 어떨까? 형만한 아우 없다 하지만 요번엔 예외다. 형보다 더한 아우가 있다. 모든 옷이 쑥쑥 자랐다. 평소 VETEMENTS의 오버사이즈 실루엣보다 16배나 커진 크기로. 뭔가 잘못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지만 아니다. 이건 철저히 계획된 기획이다.

이 괴상한 컬렉션을 보며 당신은 어떤 생각을 했는가? 마치 명령어를 잘못 습득해 설계자의 의도와 어긋나는 이미지를 만들어 버린, AI의 실패한 작업처럼 보이지는 않는가? 구람은 이 오류와 같은 의상들을 통해 AI에 대한 인간의 맹신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VETEMENTS 2024 SS ⓒvogue.com



이게 끝이 아니다. 단점을 최대한 가리고 장점을 부각시키는 게 패션의 순기능이라면 이 공식마저 거부하는 대단한 금쪽이가 있다. 바로 빌런 중에 빌런, Rick Owens. 이번엔 머리 위까지 뾰족하게 솟은 어깨와 풍선처럼 부푼 종아리로 승부수를 띄운다.



Rick Owens 2024 FW ⓒvogue.com



대중들은 가끔 히어로보다 더 멋진 빌런에 열광한다. 그런 빌런들은 온갖 범죄와 일탈로 우리를 흥미롭게 하면서도,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교훈까지 함께 건넨다. 패션계의 빌런도 그렇다. 그들은 비율 파괴라는 트렌드에 탑승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미감을 제시하려 한다. 보편적 미감으로 가득한 세상이 얼마나 지루한 곳인지, 나아가 그러한 미감을 잣대로 자신과 타인의 단점을 지적하며 비난하고 있는 건 아닌지 철저히 일깨워 주는 것이다.

도대체 입지도 못할 옷을 왜 그렇게 만드느냐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보기 좋은 옷을 만드는 게 아닌, 이 시대 패션이 해야 할 일을 멋지게 수행 중인 착실한 빌런이다.



진짜는 아니다. 작품이다. ⓒ @itsmaysmemes 인스타그램




TPO가 뭐죠?


뭔가 이상한 출근룩.
어딘가 이상한 법원룩.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인간의 몹쓸(?) 심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트렌드, TPO 외면하기. 하루에도 열두 번씩 TPO 때문에 고민하는 프로 회의자들과 상급 모임러들에게 적극 권장하나 뒷일은 책임 못 진다.



HED MAYNER 2024 SS ⓒfashionotography.com



뭔가 이상한 HED MAYNER의 출근룩을 먼저 살펴보자. 셔츠에 슈트, 타이까지 분명 구성은 합격인데 어딘가 이상하다... 고 느끼게 하는 것이 바로 포인트다. 디자이너인 헤드 메이너(Hed Mayner)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규칙도 어기지 않고 사회적 규범에 대해 교묘히 도전하는 것이 이 컬렉션의 주제다. 그러니 이건 TPO에 맞으면서도 맞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하다.



POSTER GIRL 2024 SS ⓒhypebae.com



어딘가 이상한 POSTER GIRL의 법원룩은 어떤가. 작년 뜨거운 화제였던 기네스 펠트로의 법원룩을 떠올리면 이들의 복장은 거의 범죄 수준이다. 그러나 이 역시, 범죄자 수준의 자신감을 탐구하겠다는 POSTER GIRL의 의도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판사와 경비, 배심원들 앞에서 멋들어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얼핏 보면 수영장에 온 착각이 들 듯한 PRADA 2024 FW ⓒvogue.com




하지 말라던 것만 골라서 하던 말 안 듣는 청개구리는 결국 슬픈 엔딩을 맞이했지만, 시대가 변하면 결말도 변하는 법. 21세기의 청개구리는 남다른 시선과 독특한 발상으로 각종 분야의 성공 신화를 써내려 가고 있다. 패션도 그렇다. 이 치열한 세계에서 청개구리의 존재는 그 무엇보다 귀하다. 그들의 손을 거치면 뻔한 착장도 개성 가득히 변하니까.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예외는 아니다. 뭔가 도통 해결되지 않는 일을 마주한다면, 한 번쯤 전혀 다른 길을 둘러보는 것도, 가끔은 하지 말라는 생각을 품어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걸 부디 기억해두기. 이 시대의 청개구리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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