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퍼센트의 남자 14인
Stories: The Man of My Dreams
100 퍼센트의 남자
이제는 클래식이 되어버린 하루키의 단편,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일에 관하여. 이 짧은 소설에서 화자는 하라주쿠 골목에서 잠시 스친 100퍼센트의 여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00퍼센트의 여자아이를 유형화하는 일은 아무도 할 수가 없다. 그녀의 코가 어떻게 생겼었나 따위는 전혀 떠올릴 수가 없다. 아니, 코가 있었는지 어땠는지조차 제대로 기억할 수 없다. 내가 지금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그다지 미인이 아니였다는 사실뿐이다. 왠지 조금 이상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있어 100퍼센트의 여자라는 걸 확신한다. 무려 마주치기 50미터 전부터 그녀를 알아 볼 정도로. 그렇다. 이건 그의 말처럼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말로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마음을 쓱, 하고 건드릴 때의 그 낯선 느낌. 또한 그것이 내게 있어 꽤나 중요한 것임을 인지했을 때의 경미한 충격. 아마 당신도 한번쯤은 느껴보았을 정말 이상한 일.
어쨌든 하루키의 도발로 나 역시 막연히 100퍼센트의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골똘히, 그리고 진지하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누군가를 한 눈에 내 맘 속에 들이기 위한 어떤 강력한 기준에 대해.
결국에 답은 하나다. 스타일. 뭐라 설명할 수 없지만 불현듯 마음을 움켜쥐는 멋. 적합한 표현이 도무지 떠오르질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을 끈질기게 묶어두는 생생한 마력. 대체 스타일이 아니면 그 무엇이 이 이상한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나는 100퍼센트의 남자를 찾기 위한 여정(?)에 돌입한다.
2023년 FW, MIU MIU를 비롯한 여러 브랜드에서 긱 시크를 트렌드로 내세웠을 때 나는 비로소 올게 왔구나 싶었다. 게다가 그 열풍이 올해까지 식지 않고 있다 하니 너무나 반갑다.
고백하자면, 긱 시크만이 뿜어낼 수 있는 특유의 어리숙한 분위기를 애진작부터 사모하고 있었다. 청소년기에서 취향이 멈춰 버린 옷장, 센스라곤 1도 찾아볼 수 없는 아이템들, 그 속을 마구 헤집다 집히는 대로 꺼내 입은, 그런 룩을 말이다. 감이 안 잡힌다고? 그렇다면 가장 신뢰받는 방법 안내 사이트인 위키 하우의 긱 시크하게 옷 입는 방법을 참고해 볼 것.
그래서 그런지 이 룩을 그럴듯하게 재현한 이들 중 태반은 남 말은 전혀 듣질 않는 마이웨이에 무언가에 깊이 빠진 몰입형 캐릭터들이 많다. 말 그대로 긱(Geek)스럽다. 그러니 패션 따위에 신경 쓸 여유나 있겠는가. 크고 헐렁한 바지에, 타이도 없이 대충 걸친 셔츠, 매치가 까다로운 총천연색의 재킷이나 점퍼에 허름한 운동화와 로퍼까지. 이 정도면 충분히 합격이다.
이들은 사랑을 해도 한 사람만 미련하게 끝까지 판다. 이젠 세계적인 빅스타가 된 킬리언 머피의 풋풋한 모습이 인상적인 영화 디스코 피그(Disco Pigs, 2001). 그는 우연히 한 날 한 곳에서 태어난 소꿉친구를 죽기 직전까지 사랑하는 남주인공 ‘피그’를 연기하며 순애보의 절정을 보여준다.
의상 역시 이런 그의 캐릭터와 무척 닮았다. 블랙 위주의 컬러 팔레트와 낡은 스웨터, 소매 길이가 딱 맞는 더플코트까지 그야말로 귀찮음의 일색. 내 머릿속엔 오직 사랑하는 그녀밖에 없다는 걸 애써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 말이다.
영화 레퀴엠(Requiem for a Dream, 2001)의 자레드 레토는 또 어떤가. 마약 중독이란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사랑도 젊음도 다 버린 채 치명적인 선택만 골라하는 노답 주인공 해리. 그는 잔혹한 운명에 몸과 영혼까지 기꺼이 던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은... 항상 반짝이는 걸. 보아라. 구겨진 청바지에 오버사이즈 핏 티셔츠, 반팔 버튼다운 셔츠로 너드미를 한껏 살린 착장을. 이쯤 되면 감이 잡힌다. 런웨이가 아닌 현실 속 긱 시크의 핵심은 바로 철저한 무심함이다.
긱 시크가 풋풋하고 어리숙한 면을 강조한다면, 이제부터 소개할 나쁜 남자들의 스타일은 그와는 전혀 다른 끌림 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순수함과는 접점하나 없는 난해하면서도 화려한 무드가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쩜 연애도 똑같다. 한 번 걸리면 순식간에 빠져들고, 만나는 내내 휘둘리다, 지독하게 벗어나기 힘든 것, 하물며 평생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나쁜 남자의 매력 아니겠는가.
평소 순한 맛에 길들여져 있던 나의 마음에 불을 붙인 건 트레인스포팅(Trainspotting, 1997) 속 이완 맥그리거의 패션이다. 그레이 스키니 진과 매칭한 화이트 컨버스 하이가 그렇게 멋질 수 없더라. 가끔은 블랙 봄버로 화려함을 지그시 눌러주는 것도, 체크 플란넬 셔츠를 허리에 둘러 색다르게 연출하는 것도, 일탈을 일삼는 캐릭터의 자유로운 성격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진다.
세상은 넓고 나쁜 남자는 많다. 게다가 그들의 스타일은 하나 같이 개성이 넘친다. 앞선 이완 맥그리거는 그저 맛보기일 뿐, 보자마자 심쿵했던 한 남자가 아직 남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의 트렌드이기도 한 바이커 룩의 정석을 보여준 영화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The Place Beyond the Pines, 2013)의 라이언 고슬링. 영화 시작부터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은 붉은 레더 재킷과 푸른빛의 메탈리카 심벌이 인상적인 슬리브리스, 블랙 워커까지 단언컨대 내겐 지상 최고의 오프닝 룩이다. 정말 나쁜 남자와 레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장 이상적인 조합이다.
하지만 막상 현실 속 내 남친이라면 또 다른 태세를 취하게 된다. 무심한 긱 시크도, 마성의 매력이 짙게 흐르는 나쁜 남자 스타일도 다 싫다. 집 근처에서 커피나 한 잔 할까 해서 만났는데 새빨간 가죽 재킷에 헤비한 워커를 신고 쿵쾅쿵쾅 나타나면 부리나케 도망칠 것 같으니까. 물론 상대방의 취향은 전적으로 존중합니다.
입덕 성공률 20%의 별난 취향을 갖고 있는 나도 남친룩에선 별 수 없다. 아무래도 기본기가 탄탄한 쪽을 선호하게 되고야 만다. 2000년대 초 일본 연예계를 씹어 먹었던 배우, 쿠보즈카 요스케의 룩처럼 말이다. 특별할 거 하나 없지만 색상과 실루엣이 미묘하게 아름다웠던 그의 차림. 영화 고(Go, 2001)에서 보여준 요스케의 스타일은 심플하면서도 정갈하다. 와인빛 피케 셔츠와 화이트 티셔츠, 루즈한 핏의 데님. 당시 일본 스트리트 패션의 향취가 물씬 느껴진다.
그럼 마지막으로 숨겨왔던 필살기를 하나 꺼내 보겠다. 첫 눈에 보자마자 하루종일 구글링을 하게 만들었던, 넷플릭스 시리즈 러브 앤 아나키(Love & Anarchy, 2020) 속 비에른 모스텐의 아웃핏이다. 로코물에는 별 관심이 없던 내가 그의 착장을 구경하기 위해 시즌 2까지 전부 섭렵할 정도였으니.
남친룩의 워너비답게 비에른 역시 기본 아이템을 기가 막히게 활용한다. 그레이와 짙은 브라운, 블랙 톤의 안정감 있는 니트를 기본으로 캐주얼한 상의와 점퍼까지 모두 무채색의 궤도를 따른다. 아무래도 흰 피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영리한 계략(?)이 아닐까.
매 회가 베스트일 정도로 주옥같은 패션이지만, 그중에 최고는 슈트 차림에 새침하게 눌러쓴 비니다. 기본 슈트의 단정함으로 TPO를 유지하면서도 아우터와 비니의 컬러를 통일시켜 지루한 분위기를 타파하려 했으니, 고것 참 박수받아 마땅하다!
인간의 기억 속에서 타인의 패션은 생각보다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름 석자는 곧잘 잊지만 대신 착장에 대해 묘사하며 어떤 이의 존재를 상기할 때도 있지 않은가. “그 검정 가죽 재킷 입고 있던 걔 있잖아.” 하는 식으로.
우리 모두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어떤 옷을, 어떤 모자를, 때론 어떤 신발을 신었던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우린 더더욱 스타일을 포기할 수 없다. 아니, 절대 포기해선 안된다.
한때는 셔츠와 타이를 맨 락스타에게 반했고, 한때는 하와이안 셔츠를 대충 걸친 이에게 끌렸으며, 한때는 몸통만큼 큰 백 팩을 짊어진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여기 미처 다 적지 못한 게 아직 한 트럭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공통분모는 미미하다. 당연하다. 이처럼 세상엔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빠져들고야 마는 게 있다. 마땅한 이유도 모른 채 100퍼센트의 상대를 저절로 감지해 버리는 일처럼. 이렇게나 많은데 그게 뭐 100퍼센트냐며 비웃을 지 모르지만, 맹세한다. 그 순간엔 언제나 100퍼센트였음을.
언젠가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상대를 마주친다면.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것도,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오직 나만의 느낌뿐이다. 그러니 더 이상 당신의 느낌을 의심치 말기를.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