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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Feb 23. 2024

보라색을 좋아하나요?

보라색이 특별한 이유. 패션계에서도 외면할 수 없는 결정적인 매력

Stories: Fashion and Color Purple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왔지.
보라를 떠올리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는 노래가 있다. 1990년, 혜성처럼 등장해 우리나라 모든 리스너들의 마음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던 그 곡, 강수지의 보랏빛 향기. 물론 멜로디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그보다 더욱 인상적인 건 바로 노래의 첫 구절이다. 세상에, 첫눈에 반하는 순간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한 가사가 또 있을까?



유튜브@kbs.kpop.classic





모호함 속에서 피어나는 신비로움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보랏빛처럼 다가온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일까. 이 엉뚱한 표현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보라가 가진 독보적인 특징 덕분이다.

보라는 우리 모두가 익히 알고 있듯 빨강과 파랑이 균형 있게 섞인 색이다. 하지만 이 두 색을 각각 단독으로 두고 봤을 땐 서로 정반대의 성격이다. 빨강은 열정과 희망 때로는 분노를, 파랑은 냉철함과 우울함 때로는 슬픔을 상징하니까. 때문에 보라는 접점이라고는 1도 없는 극과 극의 만남에서 탄생한 진귀한 색이다. DNA 자체가 양면의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는 혹독한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하지만 보라에겐 바로 이 모호함이 무기다.



영화 아가씨ⓒbfi.org.uk


결국 보랏빛처럼 살며시 다가온 그대는 극과 극을 아우르는 다양한 면모를 가진, 그래서 쉽게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신 끊임없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그렇기에 내 모든 관심을 빼앗는 데도 모자라 이윽고 마음까지 슬쩍 훔쳐버릴, 그런 신비로운 존재로 읽힌다.



영화 라라랜드ⓒmedium.com


그래서일까. 보라만큼 여러 함의를 품고 있는 색도 없다. 신성함과 고귀함, 우아함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동시에 불안과 죽음, 혼돈 역시 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연에서 보기 어려운 색이기에 희귀함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상상력과 예술적 자아처럼 인간의 풍부한 정신적 활동 그 자체와도 연관성이 있다.






하늘에서 보랏빛 비가 내리면


보라는 유독 여러 아티스트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왔다. 모네와 샤갈, 로스코, 마티스, 클림트 등 내로라하는 화가들의 작품에서 강렬한 보랏빛을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중에도 19세기 말 인상파 화가들의 최애 컬러다. 오죽하면 인상파 화가들 모두가 바이올레토마니아(violettomania, 보라색광)라는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썰도 돌았었으니. 심지어 인상주의의 대표 격인 마네는 친구에게 이런 고백도 했다. ”공기의 진짜 색은 바이올렛이야. 3년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바이올렛이겠지.” 세상에, 의심할 여지가 충분한 걸.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에두아르 마네, 라일락 꽃병구스타프 클림트, 애밀리 플뢰게의 초상클로드 모네, 수련ⓒcommons.wikimedia.org, ⓒpixels.com




그러나 내겐 보라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프린스(Prince)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미국의 전설적인 뮤지션이자,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팽팽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그의 최고의 히트곡인 퍼플 레인(Purple Rain, 1984)은 당시 빌보드 200에서 24주 연속 1위를 기록할 만큼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롤링 스톤즈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0곡 중 하나로 이 곡을 꼽았을 정도. 허나 놀라지 마시라. 곡의 길이가 무려 8분 40초다.





나는 그저 당신이 보랏빛 비를 맞는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에요.

다른 사람의 연인을 사랑한 화자의 절절한 심정이 녹아있는 가사, 웅장한 멜로디, 유니크한 보컬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기타 연주까지. 퍼플 레인은 정말 무엇 하나 버릴 요소가 없는 완벽한 노래다. 그러나 완벽한 건 노래뿐만이 아니다. 퍼플이 들어간 제목에 맞추어 치밀하게 코디한 프린스의 퍼플 패션은 한참이 지난 현재에도 두고두고 화제가 될 만큼 훌륭하다. 게다가 그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보라색 기타는... 아름답다는 말로 밖엔 표현할 길이 없다.








ⓒesquire.com, ⓒvanityfair.com, ⓒprince.org



대중음악 평론가인 네이트 슬론(Nate Sloane)은 뮤지션들에게 보라색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에게 보라는 자유입니다. 보라가 갖는 불명확함과 모호함이 다양한 감정과 개념에 대해 더 많이 탐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AP통신, 2023년 12월) 그렇다. 그들에게 보라는 그저 색이 아닌, 어떤 지향점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Purple Haze를 불렀던 지미 핸드릭스ⓒicon-icon.com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하지만 이런 보라도 패션 앞에선 얄짤없다. 채도와 명도에 따라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예민함 때문이다. 그래서 착장에 보라를 집어넣을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자칫하면 광대처럼 보이기 십상이니까.



Blumarine, Sportmaxⓒvogue.com


그런 의미에서 올해 봄 키컬러인 라일락은 참으로 은혜로운 선택이다. 은은한 빛깔 덕분에 튀지 않고 어디에나 무난히 어우러진다. 게다가 색의 면적에 구애 없이 어떤 아이템에도 적용하기 좋다. 2024년 SS시즌 속 3.1 Phillip Lim이나 Priscavera, Tanya Taylor의 의상처럼 전신을 라일락 컬러로 물들이는 것도 문제없다.



3.1 Phillip Lim, Priscavera
Tanya Taylor, PH5
BOTTER, St. Johnⓒvogue.com


곧 다가올 따스한 봄날과도 잘 어울리는 라일락. 스산했던 거리에 총천연색 들꽃들이 하나 둘 모습을 보이면 그때가 바로 라일락 아웃핏을 실행해야 할 때다.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상승세인 발레코어 트렌드와도 찰떡이기에, 걸리쉬한 무드를 연출할 때도 좋다. 미니 원피스나 발레 플랫의 장만을 고심하고 있다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컬러.



Supriya Lele, Emporio Armani
Alix Higgins, Coachⓒvogue.com



이와 더불어 보라는 소재의 매력을 극대화시켜주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특히 실크나 시폰, 레이스와 같이 질감으로 승부 보는 의상들이 그렇다. 가볍고 발랄한 느낌과 동시에 우아하면서도 신비한 분위기도 함께 섭렵할 수 있으니 혹시나 과해 보일까 겁먹을 필요 전혀 없다. 화이트나 베이지톤은 너무 뻔하지 않은가. 한 번쯤은 색다른 도전으로 지루한 아웃핏에 활력을 주는 것도 필요하다.



sacai, Carolina Herrera
Michael Kors, JIL SANDER
AURALEE, CHANELⓒvogue.com






보라색을 좋아하면?


그런데 이상하다.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 질문했을 때, 선뜻 보라라고 답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드물다. 자, 우리에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난제가 남았다. 보라색을 좋아하면 우울증이다, 또라이다, 심지어 변태다...라는 괴소문. 그리고 그 경험자가 여기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새 학기, 자기소개 때 보라색 좋아한다고 한 번 말했다가 그걸로 내내 놀림을 당했던 그 불쌍한 아이가 바로 나란 말이다.

검정과 가까운 색인 보라. 때문에 여러 아티스트들은 인생에 굴곡 속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보라를 주로 사용했다. 프랑스의 화가 마리 로랑생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상처로 힘들었을 때, 피카소는 가난에 허덕이던 시기에 이 색을 많이 썼다고 전해지니까. 또한 색채 심리학자들은 요즘 MZ세대들이 보라색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초조함과 불안감으로 가득한 심리가 작용했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마리 로랑생, 기타를 든 소녀ⓒbarnesfoundation.org


하지만 보라는 치유의 색이기도 하다. 에너지 보존을 담당하는 부교감신경을 자극해 신체를 휴식으로 이어지게끔 만든다. 결국 마음이 힘든 시기에 보라색을 찾게 되는 건 단지 자신의 고통을 겉으로 표현하려는 단순한 욕구에서 비롯된 건 아니다. 오히려 이 고난을 무사히 이겨내고 잃어버린 에너지와 건강을 찾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피카소, 노란 머리 여인ⓒartsy.net


또한 보라는 개성과 조화, 화합의 색이기도 하다. 미국 최초의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Kamala Harris)를 비롯해 미셸 오바마와 힐러리 클린턴, 질 바이든도 취임식 행사에서 보라 계열의 의상을 선택했다. 이는 빨강과 파랑으로 분열된 정치계를 단결하겠다는 각오로 보인다. 성 평등과 LGBT 인권의 상징으로 보라가 쓰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며 다양성을 지향하겠다는 깊은 뜻이 서려있는 것이다.



카멀라 해리스, 질 바이든ⓒgraziadaily.co.uk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말한다. 모든 사물이나 개념은 그 자체로 완전하지 않으며 대립되는 것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라가 바로 이에 대한 증명이다. 서로 다른 두 온도가 만나 완전한 하나로 거듭나듯 타인을 내 안으로 반갑게 맞이하는 일. 우리는 보라로부터 대립과 갈등을 무너뜨리는 다정한 포용의 미덕을 배운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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