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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Mar 07. 2024

2024 컬렉션에 영감을 준 네 편의 영화

아는 만큼 보이는 법.

Culture: Fashion Inspired by Art

2024 컬렉션에 영감을 준 네 편의 영화



아는 만큼 보인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이 짧은 구절엔 보다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조선시대 문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의 말로, 무언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이토록 진중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 이래봬도 진지한 관계예요


요즘 패션계가 딱 그렇다. 아는 만큼 보인다. 여러 럭셔리 브랜드의 디렉터들이 자신의 영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타 장르의 예술 작품을 소환하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대 초반 록 음악의 무드에서 힌트를 얻은 AMBUSH 2024 RTW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피오나 애플(Fiona Apple)과 밴드 소닉 유스(Sonic Youth) 출신의 킴 고든(Kim Gordon)을 콕 찝어 언급했고, YOHJI YAMAMOTO 2024 FW에선 영화감독 빔 벤더스(Wim Wenders)를 비롯해 예술계의 명사들을 직접 런웨이 무대에 세워 무한한 존경심을 표했다.



AMBUSH 2024 RTW와 뮤지션 피오나 애플(좌), 킴 고든(우)
YOHJI YAMAMOTO 2024 FW에 등장한 영화감독 빔 벤더스(우)©wmagazine.com, ©vogue.com








잊히지 않는 잊을 수 없는


예술의 생명력엔 한계가 없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장면과 멜로디들, 어떤 작품에 푹 빠져 보았던 경험들. 이것들은 영영 잊을 수 없는 결정체로 굳어져 우리 맘 속의 한 자리를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랜 시간 끈질기게 살아남아 불현듯 일상의 빈 구석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고뇌에 빠진 창작자들이 이 귀중한 영감을 허투루 흘려보낼 리가 있겠는가. 물론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다.



에드가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시 The Raven에서 영감을 받은 THOM BROWNE 2024 FW©forbes.com






Eyes Wide Shut, 2000


©movieposters.com



아이즈 와이드 셧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이며, 훌륭한 크리스마스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VOGUE, 2024. 01)

JW ANDERSON의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의 매운맛 가득한 2024 FW 컬렉션. 평소에도 기발한 시도로 우리들을 즐겁게 해 준 그가 이번엔 씨네필들의 최고 명작으로 손꼽히는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아이즈 와이드 셧을 선택했다.



©vogue.com


영화는 부유한 젊은 의사 윌리암 하포드(톰 크루즈)의 강렬하면서도 모호한 욕망을 탐구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인다. 수위 높은 성적 묘사와 적나라한 장면들 때문에 이미 충분히 화제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잊어선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영화의 수준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감독의 탁월한 연출과 치밀하게 계획된 미장센이다. 보라와 검정, 빨강으로 교차되는 컬러 플레이, 벽에 걸린 커튼, 인물들의 착장을 참고한 텍스처까지. JW ANDERSON의 런웨이를 끝까지 보고 나면 마치 아이즈 와이드 셧을 N차 관람한 기분이 들 것이다.



영화 아이즈 와이드 셧©bfi.org.uk, ©filmcolossus.com


뿐만 아니다. 영화 세트 곳곳에 출현해 고혹적이면서도 다크한 분위기를 강화시켜준 회화 작품들 역시 어엿한 의상으로 재해석 되었다. 하나 놀라운 점은 이 그림들이 모두 화가인 큐브릭의 아내 크리스티안(Christiane Kubrick)의 작품이라는 것. 현재 JW ANDERSON 공식 유튜브에 협업 과정을 담은 필름도 함께 공개되어 있다.


©vogue.com, ©idyllopuspress.com



예술가 부모의 뛰어난 유전자 덕분인지 딸인 카타리나(Katharina Kubrick)도 화가로 활동 중이다. 컬렉션 초반에 등장한 인상적인 고양이 그림이 바로 그녀의 작품. 모델은 큐브릭이 생전에 매우 애지중지하던 반려묘다. 이쯤 되면 그저 큐브릭의 영화뿐만이 아닌, 그의 생애 전반과 맺었던 관계들까지 단번에 함축한 애틋한 헌정의 컬렉션이라 볼 수 있겠다.



큐브릭과 그의 반려묘©littlebuddythecat.com






Kwaidan(怪談), 1964


©imdb.com


현재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뉴욕 기반의 브랜드, Puppets and Puppets. 그들의 2024 SS 컬렉션은 고스풍의 분위기와 주술적인 테마로 가득했다. 이 압도적인 컬렉션에 영감을 준 건 고바야시 마사키(Kobayashi Masaki) 감독의 영화 콰이단. 이 작품은 일본 신화와 민간 설화가 혼합된 4가지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으로, 각 에피소드가 모두 주옥같아 마니아들 사이에선 숨겨진 보석이라 인정받는 작품이다.

언론의 평가 역시 훌륭하다. 1965년 칸 영화제에선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으며, 저명한 영화 전문 매체인 Sight & Sound에선 무섭기엔 너무 아름다운 영화라며 극찬을 보냈으니까.



©vogue.com


욕망에 눈이 멀어 전처를 배신한 검객이 겪는 끔찍한 참극 ‘검은 머리’, 절대 발설해선 안 될 비밀을 발설한 대가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눈의 여인’, 앞이 보이지 않는 비파 연주가의 모험 이야기 ‘귀 없는 호이치’, 신작에 목마른 한 작가의 비참한 최후를 그린 ‘찻 잔 속‘ 까지. 모두 어린 시절 둘러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즐겼던 괴담의 향취가 짙게 깔려있다.

이런 으스스한 스토리를 더욱 빛나게 하는 건 바로 영화의 독특한 미장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동양적인 색채와 미학, 그리고 자연의 생동감과 여백을 적절히 더해 이질적이고도 묘한 느낌을 이끌어낸다. Puppets and Puppets의 디자이너 Carly Mark는 이 작품에 등장한 유령들, 그 실체 없는 형상과 영화 속 인물들의 감정 교류가 컬렉션 전반에 흐르는 로맨틱한 고스 무드의 원초적 영감이 되었다고 밝힌다.



영화 콰이단©nytimes.com, ©madmuseum.org






American Horror Story, 2011


©en.wikipedia.org



홍콩에서 태어나 런던을 기반으로 작업을 전개해 가는 Robert Wun. 그의 두 번째 쿠튀르 쇼는 평소 그가 좋아했던 영화들에서 뽑아낸 장면들을 참고한, 독특한 무드로 꾸며졌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호러 장르의 마니아라는 것.

그래서인지 컬렉션 의상들도 예사롭지 않다. 온몸이 불타고 있는 것만 같은 불꽃 프린트의 시폰 드레스나 괴기스러운 마스크, 혈흔이 잔뜩 튄 드레스와 섬칫한 존재가 등 뒤에 붙어 있는 레드 실크 드레스까지. 세상 모든 악몽 속의 주인공들을 전부 모셔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충격적이다.



©vogue.com, ©grazia.sg



그의 영감을 자극한 영화는 바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2011~)와 거장 팀 버튼(Tim Burton)의 비틀쥬스(1988). 두 작품 모두 무시무시한 스토리와 함께 환상적인 장면 연출로 인기를 끈 작품들이다. 특히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는 현재 시즌 12까지 나온 미국 FX의 장수 프로그램으로, 수많은 마니아 층을 확보한 국민 시리즈. 비틀쥬스 역시 팀 버튼만의 다크 판타지 감성이 담긴 수작이다. 단순히 깜짝 놀래키기 위한 단발성 호러물이 아닌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진행되기에 도무지 한 눈을 팔래야 팔 수가 없다.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었던 무서운 미지의 존재들이 어떻게 재현되는지, 절로 호기심이 동하지 않는가.



영화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1-4), 비틀쥬스(5-7)©empireonline.com, ©ew.com, ©imdb






Twin Peaks, 1990


©imaginus.ca




이번 UNDERCOVER 2024 FW는 미국 TV 시리즈 트윈 픽스의 굿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장 준 타카하시(Jun Takahashi)의 트윈 픽스를 향한 열렬한 구애라고 보면 좋을까. 뭐, 그리 놀랍지도 않다. 여태껏 UNDERCOVER가 다루었던 주제들만 헤아려 봐도 그가 미스터리와 음모, 판타지에 얼마나 진심인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니까.



©vogue.com



트윈 픽스는 컬트의 귀재,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가 각본과 연출, 제작까지 맡은 말 그대로 린치 월드의 축소판이다. 린치 특유의 난해하고 심오한 화법 때문에 제작진의 고민이 극에 달했다 전해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33%라는 높은 시청률과 골든 글러브 최우수 TV시리즈까지 수상하며 인기와 작품성까지 모두 잡은 보기 드문 케이스. 스릴러와 치정극, 초자연적 요소들을 재치 있게 버무린 내용과 감독의 장점인 몽환적인 연출로 수사물의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근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complex.com, ©imdb.com, ©welcometotwinpeaks.com



트윈 픽스란 제목은 작품의 주 무대인 한 삼림 마을의 이름으로, 내용은 이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 소녀 살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기 위한 FBI 요원 데일 쿠퍼의 모험담(?) 비스무리한 것이라 보면 된다. 왜 비스무리한 이라는 표현을 썼는지는 드라마를 보면 금세 납득될 것.

나는 이 모험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지만, 결국 우리가 도착하는 그곳은 아름답고도 기이한 곳일 거라 확신해.

컬렉션의 타이틀인 아름답고도 기이한 (Wonderful and Strange)의 출처 역시 주인공 데일의 대사다. 온갖 오컬트적 현상과 비상식적 소동극이 쉴 틈 없이 벌어지는 막장 동네 트윈 픽스. 미스테리한 사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UNDERCOVER의 모험도 그 아름답고 기이한 풍경을 닮아 있을 수밖에.



©vogue.com



자, 어떤가. 이렇게 알고 보니 뭔가 달리 보이지 않는가? 당신이 이 알고 보는 재미에 제대로 흥미를 느꼈다면 이제부터 시작이다. 평소 머릿속을 맴돌며 당신의 호기심과 맹렬하게 밀당하던 그 무언가를 다시 용감히 꺼내 보는 거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그리고 깊이 있게 섭렵해 보기. 언젠가 사랑하는 것들로 가득찬 세상의 모습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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