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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Mar 21. 2024

쿨하고 와일드한 하루키의 패션 취향

소설가의 옷입기 철학은 어떨까

Stories: Murakami Haruki

쿨하고 와일드한 하루키의 패션 취향



하루키만큼 자신의 취향을 재치 있게 풀어내는 사람이 또 있을까. 데뷔 전 재즈 카페를 운영했을 정도로 재즈를 사랑하고, 풀코스 마라톤을 25회나 완주한 달리기 애호가에, 무릎 위에 고양이를 올려놓고 맥주를 홀짝이며 소설을 집필하는 정 많은 집사. 하루키의 모든 저서엔 그의 한결같은 취향들이 고스란히 스며있다. 그런데 이쯤 되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질문 하나. 과연 하루키의 패션 취향은 어떨까?



©sabukaru.online








쿨하고 와일드한 하루키


솔직히 그의 패션 취향을 알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루키의 에세이 중 절반 이상이 자신의 취향을 토로하는 데에 할애되고 있지만, 패션에 대한 이야기는 찾기가 꽤나 어려우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가 패션에 전혀 관심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는 2021년 11월, 뉴욕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패션이 새로운 캐릭터를 개발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고백한다. 옷의 종류와 입는 방식이 한 개인의 입장에 대해 많은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nytimes.com




그의 최고 히트작인 장편 소설,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1987)만 봐도 그렇다. 주인공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처음 만났을 때 녹색 폴로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도(일본어로 녹색은 미도리), 첫사랑인 나오코를 떠올리면 그녀가 즐겨 입던 우아한 캐멀색 코트가 함께 생각나는 것도, 그토록 소중했던 존재인 나오코가 와타나베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 포도색 라운드넥 스웨터인 것도 모두 우연은 아닐 것이다.



영화판 노르웨이의 숲 (ノルウェイの森, 2011).우리나라에선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imdb.com, ©mubi.com, ©letterboxd.com



하지만 에세이에서 발견한 그의 패션 취향은 너무나 평범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에세이 제목처럼 하고 와일드하다면 좋을까. 청년 시절엔 헤링본 무늬를 몹시 좋아해 처음 맞추는 양복은 꼭 그걸로 하겠다는 막연한 선망도 있었고, 결혼식엔 수수한 올리브그린 색의 영국식 스리피스를 손수 맞출 만큼 열정도 있던 그였는데, 서른이 다 되어선 본격적으로 쿨해지기로 작정한 것인지… 문예지 <군조>의 시상식엔 폐업 세일에서 산 구식 면양복과 헌 테니스화를 신고 가 버리는 와일드한 면모를 보여준다.



하루키와 오랜 호흡을 맞춰 온 삽화가 안자이 미즈마루(Anzai Mizumaru)의 그림.왼쪽에서 두번째가 하루키다.©fashion-headline.com







내게도 패션 뮤즈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하루키에게도 선호하는 아이템은 있다. 무려 여섯 벌이나 갖고 있는 Brooks Brothers의 블레이저코트와 Van Jacket의 만 오천엔 짜리 더플코트가 그 주인공. 특히 더플코트에 대한 그의 애착은 대단한데, 맥시 코트와 니트 코트, 가죽점퍼와 피코트, 스타디움 점퍼와 오리털 파카 등이 출현했던 변화무쌍한 일본의 겨울 트렌드 속에서도 꾸준히 더플코트를 고수해 왔다고 한다. 대체 왜 그것만 입냐는 주변 사람들의 핀잔까지 꿋꿋이 참아가며 말이다.



블레이저를 입은 모습은 비교적 찾기 쉬운데 더플 코트를 입은 사진은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온다.©fashionnet.vn
60년대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브랜드 Van Jacket©ivy-style.com



게다가 그에겐 나름의 패션 뮤즈도 있다. Uniqlo의 매거진 라이프웨어(LifeWear)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예전 미국 영화에서 힌트를 많이 얻는다고 하는데,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1962)의 조지 페파드(George Peppard)나 명탐정 하퍼(Harper, 1966)의 폴 뉴먼(Paul Newman)의 스타일을 예로 든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줄곧 슈트 차림을 고수하는 사람들이기에 요즘 트렌드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덧붙인다. 결국 그들처럼 입겠다는 다짐이라기 보단, 그런 중후한 무드를 지향한다는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속 안정된 슈트룩을 보여주는 조지 페파드©themoviescene.co.uk
명탐정 하퍼의 폴 뉴먼©moma.org








COMME des GARCONS과 하루키


하느님도, 내 주변 사람들도, 마누라도 잘 알고 있듯이 나는 복장에 그리 신경을 안 쓰는 인간이다. 여름에는 티셔츠에 짧은 바지, 봄가을에는 리바이스 청바지에 스웨터나 트레이너, 겨울이 되면 그 위에다 가죽점퍼나 J프레스 더플코트를 입는다. 신발은 나이키 조깅화. (...) 구두는 갈색과 검은색 리갈 윙팁을 한 켤레씩 갖고 있는데, 이것들은 폐기된 원자력선처럼 신발장 안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해 뜨는 나라의 공장)



이처럼 평소 패션에 깊게 관여하지 않았던 하루키의 생각도 이 브랜드를 만나면서 단숨에 바뀐다. 바로 레이 가와쿠보(Rei Kawakubo)의 COMME des GARCONS. 1986년, 공장 견학 시리즈를 쓰기 위해 고토 구에 있는 COMME des GARCONS의 발주 공장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COMME des GARCONS 1986 FW©rejectsmagazine.com




패션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악명 높은 브랜드인데... 대체 하루키는 레이 가와쿠보의 그 독특한 미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루키는 공장 견학 직전, 시부야의 세이부 백화점에 있는 COMME des GARCONS의 부티크에서 여름 재킷과 티셔츠를 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COMME des GARCONS 체험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그는 속으로 ‘무슨 곡마단의 원숭이 같잖은가’라고 생각했지만 함께 간 부인이 그렇게 이상하진 않다고 해서 덜컥 사버리게 되었다나.

어쨌든 하루키가 언급한 COMME des GARCONS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편하다.
2. 오래 입고 있을수록 디자인의 특이함을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3. 옷에서 어떤 일관된 사상 같은 것이 느껴지는데, 그것이 싫지 않다.

공장 견학 후엔 브랜드에 대한 생각이 보다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을뿐더러, 무엇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하고 있음이 느껴졌기에, 이 재킷을 보다 소중히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에세이의 말미에 적는다. 또한 이 여파(?) 때문인지 이후 가장 자주 방문하는 옷가게가 아오야마 근처의 COMME des GARCONS 매장이 되었다. 일 년에 세 번 정도 들린다고. 과연 레이의 옷은 사람을 휘어잡는 어떤 마력 같은 게 있는 게 분명하다.


아오야마에 위치한 COMME des GARCONS 스토어©gloobles.com







이렇게까지 티셔츠를 좋아하다니


하루키가 패션에 대한 책을 쓰다니. 2021년 초판된 무라카미 T(MURAKAMI T, 2021)의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나의 반응은 이랬다. 아마 그의 팬 모두가 나와 같은 반응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에세이의 연재처는 그 유명한 일본 패션 매거진 뽀빠이(POPEYE).



무라카미 T의 일본 판본©hyperjapan.co.uk
패션 애호가들의 지침서가 되어준 뽀빠이 매거진©ebay.com




얼핏보면 그는 무려 200장이나 되는 티셔츠를 갖고 있는, 티셔츠 마니아처럼 보이지만 사실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면 어딘가의 판촉물이나 랜드마크의 기념품, 또는 출판사의 이벤트성 굿즈 정도가 절반이다. 나머지는 대체로 중고샵에서 구매한 것들. 뭔가 대단한 소유욕이 발휘되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이걸 사고야 말겠다! 라는 욕망이 실린 옷은 거의 없는 듯 보인다.



무라카미 T에 등장한 티셔츠들©nytimes.com, ©vanityfair.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셔츠는 하루키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오랫동안 전문 작가 생활을 하며 슈트를 입을 일이 거의 없었고, 언제나 편한 티셔츠에 팬츠 그리고 운동화 차림으로 다니는 것이 몸에 붙어버린 그는 이 티셔츠 차림의 일상을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이라 표현한다. 그의 단편 일인칭 단수의 화자의 표현을 빌리면, 포멀한 슈트 차림은 신선한 감각을 주지만 곧 목덜미가 근질근질하고 숨쉬기가 답답해지며 땅을 밟는 구두 소리까지 너무 딱딱하고 크니까.

그런 의미에서 티셔츠는 나에게 자유를 상징하는 것 같아요. (뉴욕 타임스, 2021년 11월)

그중 특히 애정이 많은 티셔츠는 18살 무렵에 구입한 Champion 티셔츠와 1983년 호놀룰루 마라톤을 완주하고 받은 티셔츠. 특히 Champion 티셔츠는 이거 사야 해! 라고 생각이 들어 산 최초의 티셔츠라고. 참고로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Once Upon a Time... in Hollywood, 2019)의 브래드 피트(Brad Pitt)가 입고 나온 것과 같은 제품이다.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esquire.com



읽고 난 책은 버려도, 티셔츠는 버리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하루키. 그에게 티셔츠는 기억과 관련이 깊다. 먹었던 음식과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방문했던 장소들 등 티셔츠에 대롱대롱 매달린 추억들이 입는 순간 함께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낡아도 버리기가 어려운 게 충분히 이해가 간다. 입지 못할 정도로 너덜너덜해 진 옷들은 자동차 왁스칠에 사용한다고 하는데... 어이,어이, 그 정도면 충분하다구.



©flickr.com



세상엔 좋은 취향도 나쁜 취향도 없다. 마음이 동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모으다 보면 언젠간 취향이 되어 있는 것, 그뿐이다. 그렇게 취향은 누군가의 선택을 바라며 그저 묵묵히 있다. 문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있느냐다. 그것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면, 또한 꾸준히 사랑한다면, 취향의 자격으론 충분하다.

하루키 덕분에 나는 블루 노트 레이블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호레이스 실버(Horace Silver)를 만났고, 맥주 안주로 양념 한 톨 치지 않은 매끈한 손두부를 선호하게 되었으며, 언젠가 겨울의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럼주가 들어간 커피를 꼭 마셔보고야 말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상당히 감사드립니다. 하루키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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