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Mar 26. 2024

털도 패션이 되는 세상

패션계에 털을 적극적으로 선보인 선구자는 누구인가


Stories: Fashion and Weirdness

털도 패션이 되는 세상




털은 어디에나 있다.


아침에 출근을 위해 머리를 감을 때도, 청소를 하기 위해 마주한 마룻바닥에서도. 그래서일까.

패션은 신체와 가장 가까운 예술인 만큼, 몸에서 자라는 털을 패션으로 승화시킨 디자이너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신선함, 때로는 두 눈을 의심케 하는 기괴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들의 작품 세계. 지금껏 눈이 즐거운 독특한 패션을 찾고 있었던 젠테 독자라면 주목하시라.

2024 파리 패션위크에서 가장 주목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닌 Maison Margiela 2024 SS 꾸뛰르 컬렉션.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의 손길이 닿은 시스루 드레스 사이로 비치는 건.. 두 눈을 의심케 했으니. 모델들은 정말 하체를 다 벗고 런웨이에 섰던 걸까?



©vogue.com

Maison Margiela 2024 SS Couture



다행스럽게도(?) 드레스에 비친 건 실제 음모가 아니었다고. ‘머킨 속옷’이라는 이름으로, 망사 같은 실크 튤 위에 인조털을 한 땀 한 땀 엮어 만든 것이었다. 역시 꾸뛰르 컬렉션답게 장인 정신이 담겨 있었는데, 그 작업 과정은 Maison Margiela의 아티즈널 디자이너 시안 @sianschell 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살펴볼 수 있었다.



©@sianschell_





패션과 패티시 사이의 모호한 경계

아래의 이미지들을 보고 어떤 감정이 먼저 들었는가.


©yuyenchang.com, ©fashion.mam-e.it

Yu-Yen Chang 1999, JIL SANDER 2009 SS



누군가는 신선하게 또 누군가는 역겹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든 털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일종의 페티시즘(Fetishism)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신체의 털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디자이너를 사로잡아왔다. 특히 아방가르드와 실험적 패션이 활발했던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중심으로 털 아이템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들이 만든 피스들은 실제로 착용할 수 있는 제품을 넘어서서 하나의 디자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왜 디자이너들은 털, 정확히는 체모에서 영감을 받았을까.

컬렉션에 체모가 등장하면 일단 그 자체로 도발적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브랜드가 추구하는 이미지를 구현하는데 맞다고 생각해서 썼을 수도 있다. 털은 우리에게 지극히 일상적인 요소다. 우리는 매일 머리카락을 관리하기 위해 욕실에서, 거울 앞에서 꽤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던가. 게다가 머리숱은 자신감의 원천(!)처럼 여겨지기도 하니… 말 다 했다. 이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다양한 패션 하우스들이 어떻게 미친 창의성을 발휘했는지 지금부터 살펴보자.





이토록 털에 진심인 디자이너는 없었다


사실 브랜드 Margiela가 신체의 털을 떠올리게 하는 컬렉션을 선보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의 디렉터, 존 갈리아노(John Galliano) 이전에도, 애초에 디자이너 마틴 마르지엘라(Martin Margiela) 본인이야말로 패션계에 털을 적극적으로 선보인 선구자였으니.

1999년 FW에 처음 등장한 털이 달린 목걸이부터 2009 SS에 아이코닉한 역사를 쓴 ‘가발 코트’까지. 이미 쓰인 가발을 재활용해 사용한 것이었다. 머리카락, 더 나아가 가발은 연극에서 화려함과 비참함 사이를 오가는 그 자체의 드라마틱함을 지니고, 그 때문에 Margiela가 계속해서 선택했던 소재이다.



©vogue.com

Maison Margiela 1999 SS

©vogue.com

Maison Martin Margiela 2009



꼭 비싸거나 진귀한 재료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한 피스를 만드는데 들어간 시간과 노력 그리고 장인 정신. 이게 바로 디자이너 마르지엘라가 새롭게 정의한 오뜨 꾸뛰르다.

재료 자체 가치보다는 인간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는 그 작업 자체에 방점을 두고 털을 통해 컬렉션을 선보인 Margiela. 일반적으로 사용감 있는 제품에 가치를 두지 않고, 제작 방식을 드러내지 않는 콧대 높은 파리 꾸뛰르 전통의 중심에 도전장을 던진 셈이었다. 이로써 마르지엘라는 자신만의 아방가르드를 오랜 전통에 새로이 새겨 넣었다.



©vogue.com

Maison Martin Margiela 2015 FW



프랑스 니트 패션의 진수를 보여준 Sonia Rykiel. 갑자기 왜 다른 브랜드가 나오냐고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당시 하우스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마치 생일 선물처럼 내로라하는 다양한 디자이너들이 2009년 쇼를 구성했었는데, 마틴 마르지엘라도 참여했기 때문.

비주얼 자체로 눈을 사로잡았던 사자 같은 곱슬머리 코트는 디자이너 소니아 리키엘(Sonia Rykiel)의 생전 헤어 스타일로부터 영감받았다고 하니, 역시 털에 진심인 마르지엘라라고 할 수 있겠다.


©vogue.com

Sonia Rykiel 2009 SS



이제는 패션계를 떠나 순수 미술로 그 무대를 옮긴 마르지엘라. 하지만 그의 머리카락, 그러니까 체모 사랑은 여전한 모양이다.



<바니타스(Vanitas)> ©dazeddigital.com



국내에서도 선보인 그의 전시에서 볼 수 있었던 작품 <바니타스(Vanitas)>. 얼굴을 덮은 모발의 두상은 머리카락 색상만으로 유년부터 노년까지 나타내며 인간의 생애 흐름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가 담긴 작품이었다. 인공 피부를 입힌 실리콘 구체에 자연 모발을 하나하나 이식하여 완성했다고.





기괴함과 기발함은 한 끗 차이


항상 페티시적인 요소에서 영감을 받아 기괴함 속 아름다움을 표현한 알렉산더 맥퀸(Alexander McQueen). 그 역시 신체의 털을 자신의 컬렉션에서 선보인 디자이너다.

그가 1992년 센트럴 세인트 마틴을 졸업하며 발표한 ‘Jack the Ripper Stalks His Victims’은 여전히 회자되는 컬렉션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가 빅토리아 시대의 매춘부들이 본인의 머리카락을 판매하던 것에서 영감을 받아 브랜드 플라스틱 라벨에 실제 사람의 머리카락을 잘라 넣었기 때문. 그중에는 실제 맥퀸의 머리카락도 있었다고 한다.



©supermodelshotspot.blogspot.com

Alexander McQueen의 ‘Jack the Ripper Stalks His Victims’ 컬렉션.

©minniemuse.com



그저 그로테스크하기만 하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맥퀸은 머리카락을 통해 망자를 기억하는 매개로서 애도용 악세사리로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전설로 남은 그의 ‘머리카락 라벨’로 출시된 제품은 지금도 수천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vogue.com

모델들의 음모를 그대로 노출한 범스터 팬츠, Alexander McQueen 1996 FW

©vogue.com

아프리카에서 영감받은 Alexander McQueen 2000 FW





이건 일상에서 도전해 볼 만할지도?


눈을 제대로 뜨고 보라. 모델들이 착용한 넥타이를.
그렇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것이다.


©vogue.com

Schiaparelli 2024 FW



“스키아파렐리에는 셀럽과 꾸뛰르만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입을 수 있는 현실적인 옷 역시 하우스의 일부죠” - 2019년부터 Schiaparelli를 이끌고 있는 다니엘 로즈베리(Daniel Roseberry).

2024 FW 컬렉션에서 다니엘은 사소한 디테일에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에 레퍼런스를 담아냈다. 슈트 셋업에 매치한 머리카락 넥타이는, 과거 머리카락으로 재킷이나 부츠를 장식했던 엘사 스키아파렐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의의 표현이었다.



©gentlewoman.eu, ©schiaparelli.com, ©philamuseum.org





어린 시절부터 연마한 머리 땋기 실력


국내에서도 머리카락으로 예술을 선보인 브랜드가 있었으니, 바로 2022 FW에서 ‘집착’을 주제로 컬렉션을 전개한 김해 김씨(金海 金氏)라는 뜻의 브랜드 KIMHEKIM이다.

KIMHEKIM이 한 컬렉션의 주제로 헤어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 있었다. 인형 놀이와 사촌 누나의 머리 땋는 것을 즐겨 하던 그였기에 헤어는 늘 익숙한 소재였다고. 그렇게 헤어를 드레스로 표현해 보면 어떨까 하고 시작한 게 OBSESSION N4 컬렉션이었다고. 한 땀 한 땀 엮어 만든 헤어 코르셋과 드레스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수준.



©kimhekim.com

KIMHEKIM 2022 FW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털 아이템을 소개합니다


패션계의 아카이브를 뒤적이다 보면, 털이 얼마나 숱한 디자이너들의 영감이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털에 영감받은 아이템들이 여기 있다.

HELMUT LANG이 추구하는 미니멀함에 녹아든 털의 페티쉬적인 요소는 절로 앙큼하다는 말이 나온다. 특히 2024W FW 컬렉션에 등장한 포니테일 헤어를 연상케 하는 샌들 프린지는 실제 말의 갈기를 사용했다.



©metmuseum.org

HELMUT LANG

©dazeddigital.com



윤기나는 털을 부츠나 벨트에 장식하거나, 아예 머리 위에 붙여버린 준 타카하시(Jun Takahashi)의 UNDERCOVER.



©nssgclub.com

UNDERCOVER

자른 머리 카락을 묶어서 보여준 Hussein Chalayan 2016 FW

©nowfashion.com
©magliano.website, ©howday.official.ec

한 땀 한 땀 땋아 만든 MAGLIANO의 벨트




카츠야 카모의 아방가르드한 헤드피스 세계


헤어 스타일링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아티스트가 있다. 바로 헤어 스타일링의 아름다움을 재정의한 헤어피스를 제작한 아티스트 카츠야 카모(Katsuya Kamo).



©tatlerasia.com

카츠야 카모.



JUNYA WATANABE 2023 FW에 등장한 그의 작품은 단순한 헤어 스타일링을 넘어 하나의 피스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vogue.com

JUNYA WATANABE 2023 FW



디자이너 하이더 아커만(Haider Ackermann)은 Vogue와의 인터뷰에서 카츠야 카모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우리는 우아함과 광기의 완벽하고 균형 잡힌 세계, 그의 예술적 감성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관찰하며 서로 조화롭고 조용하게 작업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협업 메이트였다"



©vogue.com

Haider Ackermann 2016 SS



카츠야 카모를 설명하는 한 단어가 있다면 펑크다. 그 정신을 기반으로 섬세한 감각에 상상력이 만나 런웨이의 짧은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그. 어찌 보면 그의 작품은 런웨이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그가 한 올 한 올 엮어낸 걸작들은 진정한 예술에는 한계가 없음을 보여준다.



©vogue.com

Katie 2016 FW



털로 만드는 패션인들의 예술 세계. 이 글을 읽으며 누군가는 다소 낯설게 느꼈을 수도 있다. 당연하다. 그간 털에는 아름답지 않다는 관념들이 덧씌워졌었으니.

그럼에도 잊지 말자. 패션이 가장 흥미로운 순간 중 하나는 틀에 박힌 관습에 물음을 던질 때라는걸. 그야말로 미친 창의력을 발휘해 털을 패션으로 승화시킨 디자이너들의 작품에서 우리는 패션의 무한한 가능성을 본다.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jentestore 바로가기

작가의 이전글 90년대 행 타임머신을 탑승하시겠습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