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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Mar 28. 2024

에디터의 마음을 훔친 마성의 여자들

나 혼자만 알고 있긴 너무 아깝다.



흑발의 냉미녀 열전


소소한 취향 하나를 고백하자면, 나는 냉미녀 마니아다. 날카로운 눈빛에 말수도 없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성격을 가진 캐릭터를 보면 항상 마음이 동해왔는데... 그렇게 하나둘씩 모으다 보니 한 가지 필연적인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흑발. 칠흑같이 어두운 머리색이 신비롭고 차가운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때문일까.



영화 배틀로얄(위)과 블러드(아래)ⓒtheatlantic.com, ⓒkpbs.org




평소 사랑스럽고 천진한 이미지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던 일본의 탑배우 아오이 유우(Aoi Yu). 평소 문명에 물들지 않은 산골 소녀 느낌의 모리걸 룩으로 추앙받던 그녀지만 내가 애정하는 아오이의 캐릭터는 따로 있다. 바로 영화 콰이어트 룸에서 만나요(2008)의 미키 역. 거식증에 시달리는 위태로운 소녀를 연기하며 그동안 그녀가 맡았던 배역과는 정반대의 매력을 뽐낸다. 게다가 올블랙 의상에 짙은 스모키 메이크업, 흑발의 드레드 헤어가 범상치 않은 모습.



영화 콰이어트 룸에서 만나요ⓒmubi.com



역시 흑발과 블루는 필승조합인 걸까. 영화 포제션(1981)에서 안나 역을 맡은 이자벨 아자니처럼 말이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빙의되어 기행을 일삼는 충격적인 캐릭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파란 드레스에 흑발을 늘어뜨린 그녀의 모습은 시릴 만큼 아름답다. 박쥐(2009)의 태주, 김옥빈도 비슷한 외형을 하고 등장하는데 이는 안나에 대한 오마주임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최근 화제가 된 가여운 것들(2024)의 엠마 스톤 역시 마찬가지다. 무릎께까지 내려오는 검은 장발에 풍성한 하늘빛 드레스가 참 절묘한 궁합이다.



영화 포제션ⓒanothermag.com
영화 박쥐ⓒhighonfilms.com
영화 가여운 것들ⓒelle.com




이런 흑발캐들에겐 머리색 이외에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치명적인 상처를 맘 속에 꽁꽁 품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인해 각성하여, 욕망에 충실한 돌진형으로 거듭난다는 점이다. 그녀들의 짙은 머리색은 마치 내면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를 비유하는 것일까. 하지만 다행이다. 마침내 그 그림자를 걷어내고,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인 뒤, 원하는 것을 쟁취하려 한다는 것이. 그래서 안심이다. 심연의 욕망을 똑바로 응시하고, 겁 없이 마주하며, 그곳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게. 설령 그 끝이 해피엔딩이 아니라 할지라도.



욕망 메타포 그 자체인 이토 준지의 토미에ⓒmedium.com








훔치고 싶은 매력


하지만 그중 제일은 역시 리브 타일러(Liv Tyler)다. 이 분에게 입덕하게 된 계기는 조금 특이한데 사실... 전 썸남의 최애였다. 아무래도 썸 상대의 최애에겐 당연히 무한한 관심이 쏠리기 마련. 반은 호기심으로, 반은 질투심으로 밤낮없이 그녀를 파다 보니 웬걸, 오히려 내 쪽에서 그녀의 매력에 홀려버리게 된 것이다.



영화 헤비(1995), 쿠키의 행운(1999) 속 리브 타일러ⓒcollider.com




미국의 유명 록 밴드 에어로스미스(Aerosmith)의 보컬 스티븐 타일러(Steven Tyler)의 첫째 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의 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특히 에어로스미스의 대표곡 Crazy의 뮤비 속에 등장한 모습은 최고. 시원한 마스크에 해맑고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한 번 보면 계속 생각나는 마력을 내뿜는다. 영화 클루리스(Clueless)의 히로인인 알리시아 실버스톤(Alicia Silverstone)과 함께 출연했는데, 각자의 개성이 산뜻하게 어우러지는 게 보는 내내 입가의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에어로스미스의 Crazy 뮤비 중 한 장면ⓒmubi.com




영화 엠파이어 레코드(1997)에서의 리브의 아웃핏은 90년대 무드가 유행 중인 현재 패션계에서도 100프로 먹힐 최강의 구성이다. 베이비 블루 크롭 스웨터와 체크 스커트, 블랙 부츠까지 무엇 하나 거슬리지 않는 완벽함이다. 어라, 그러고 보니 여기도 블루다. 작품의 내용은 그럭저럭이지만, 90년대 미국의 빈티지한 풍경들과 리브 타일러의 당찬 모습이 돋보이는 영화다.



영화 엠파이어 레코드ⓒvogue.com
90년대의 리브 타일러의 착장들ⓒpinterest






눈과 귀를 사로잡는 그녀들


흑발의 냉미녀만큼이나 내 마음을 심쿵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카테고리. 바로 음악 하는 여자다. 미국의 록 밴드 더 킬스(The Kills)와 데드 웨더(The Dead Weather)의 보컬 앨리슨 모스하트(Alison Mosshart)와 트립합의 보석 포티쉐드(Portishead)의 베스 기븐스(Beth Gibbons), 몽환적인 목소리가 독보적인 블론드 레드헤드(Blonde Redhead)의 카주 마키노(Kazu Makino)까지.

이 셋의 장점은 그냥 존재 자체가 스타일이라는 것에 있다. 트렌드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매번 추구하는 음악과 딱 들어맞는 아웃핏으로 나타나니까. 특히 록 적인 무드가 가득한 앨리슨의 패션은 올해의 트렌드로 손꼽히는 그런지와 인디 슬리즈 느낌을 연출하기에 최적의 참고서가 되어 줄 것이다.



R13와 앨리슨 모스하트의 콜라보레이션ⓒrefinery29.com
포티쉐드의 베스 기븐스ⓒlast.fm
이자벨 마랑의 뮤즈, 카주 마키노ⓒelle.com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 마리타 아르헤리치(Martha Argeric)에게 반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나는 그녀가 연주하는 슈만과 라흐마니노프를 거의 1000번은 넘게 들었을 정도로 열렬한 팬인데, 그녀의 스타일 역시 그 뛰어난 실력에 지지않을 정도다. 감탄을 넘어 존경이다. 그저 헝클어진 머리에 블랙 계열의 슴슴한 옷을 걸쳤을 뿐인데 그 자연스러움이 너무나 싱그럽고 귀중하다. 본연의 존재가 내뿜을 수 있는 멋. 바로 이것이 그녀의 아우라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다. 물론 파워풀한 연주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데에 거리낌이 없다.



마리타 아르헤리치
ⓒwalterbitner.com, ⓒjacquesthelen.com



앞선 인물들과는 다르게, 다양한 컨셉으로 변신을 꾀하며 내 마음을 흔들어버린 그녀들도 있다. 일본의 국민가수 나카모리 아키나(Nakamori Akina)와 시이나 링고(Sheena Ringo). 둘 다 컨셉에 얼마나 진심인지 무대 하나를 보고 나면 마치 완성도 높은 뮤지컬을 구경한 것만 같은 든든한 포만감이 든다. 때로는 호기심 가득한 꾸러기 소녀처럼, 때로는 비련의 여인처럼, 때로는 혁명에 앞장서는 리더처럼 컨셉과 어울리는 패션들을 적재적소로 끌어와 우리의 눈까지 즐겁게 해 주니, 이건 마치 종합선물세트나 다름없다.



80년대 전성기를 누렸던 나카모리 아키나
여전히 건재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이나 링고ⓒpinterest





우리의 만남은 서로를 변하게 하고


흔히 버디 무비하면 남성 둘이 펼치는 모험담을 떠올린다.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1998)나 정우성과 이정재 콤비의 시초인 태양은 없다(1999)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틈에서도 불쑥 솟아 빛을 발하는 여성들의 버디 무비도 있다. 그중에서도 내 최애작은 안젤리나 졸리(Angelina Jolie)와 위노나 라이더(Winona Ryder)의 열연이 돋보이는 작품, 처음 만나는 자유(1999)와 체코의 초현실주의 영화 데이지즈(1966)다.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좌)와 데이지즈(우)ⓒamazon.co.uk




처음 만나는 자유 속 두 주인공은 정신병원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이들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스스로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고, 공감이라는 치유의 과정을 거쳐 마침내 진정한 자유를 획득해 낸다. 만약 당신이 성장 서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백 프로 만족할 것. 섬세한 내면 묘사와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가 작품의 질을 보장하는 것은 당연하고, 추가로 두 주인공의 아웃핏도 끝내준다. 다시 봐도 안젤리나 졸리의 금발 처피뱅은 파격적이면서도 신선한 비주얼 쇼크다.



처음 만나는 자유ⓒpopsugar.co.uk



데이지즈 역시 시한폭탄 같은 두 소녀의 에너제틱한 여정을 재치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워낙 다루는 개념도 많고 스토리도 난해해서 설명만 한나절감이지만, 그걸 전부 배제하더라도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이 자아내는 귀엽고 발칙한 무드만으로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머릿속을 말끔히 비우고 그녀들과 함께 하다보면 우울과 고민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을 것이니.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매 순간 화보와 같은 두 소녀의 패션이다. 즉흥적이면서도 당돌한 그녀들의 행동을 닮은, 멋진 착장들이 줄줄이 출현한다.



데이지즈ⓒartforum.com




애호(愛好)와 동경(憧憬)은 엄연히 다르다. 애호가 가까이 마주하여 즐기는 것이라면, 동경은 꾸준히 좇아야 하는 것. 한때 동경했던 마성의 그녀들을 헤아려보며 다시금 다짐한다. 이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그녀들을 좇아야겠다고. 한동안 잊고 있어서 미안했다고. 그러니 당신들도 그 빛을 잃지 말고 계속, 영영 끝나지 않을 달콤한 꿈을 꾸게 해 달라고.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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