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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Apr 04. 2024

봄의 설렘을 닮은 네 편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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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Spring Into Love

봄의 설렘을 닮은 네 편의 영화




봄을 향한 설렘. 그 싱그러운 감정을 오롯이 담은 영화 네 편.



아이 오리진스 (I Origins, 2014)


©imdb.com



나의 이별은 항상 새벽에 이루어졌다. 흔히 말하는 새벽 감성에 도움이 필요했던 건지, 아님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마음에 그랬던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 영화를 본 날도 그랬다. 담백한 이별을 마치고, 구겨진 마음을 도무지 마주할 수 없어 뭐라도 해야만 했다. 솔직히 보기 전엔 별 기대도 없었다. 고작 113분짜리 미국산 영상물이 내게 뭘 해 줄 수 있는데.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5분을 보고난 뒤, 나는 더 이상 슬프지 않게 되었다.



©imdb.com




영화의 장르를 굳이 따지자면 SF 로맨스. 진화론을 입증하기 위해 눈의 홍채를 연구하는 과학자 이안(마이클 피트)과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이안과 사랑에 빠진 소피(아스트리드 베흐제프리스베), 그리고 이 둘의 곁을 맴돌던 또 다른 과학자 카렌(브릿 말링) 사이에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주인공은 단 셋 뿐이지만 이 영화엔 다양한 사랑의 감정들이 출현한다. 바로 요 지점이 감상 포인트다. 첫눈에 반하는 기적과 운명적인 재회, 필연적인 권태기, 가슴 시린 짝사랑과 상대의 상실을 묵묵히 헤아리는 막연한 애정까지. 그리고 그 안엔 불시에 찾아오는 이별도 숨어 있다. 마치 사고처럼. 결코 예감할 수 없었던 그런 이별이.



긱 시크 룩의 정석을 보여주는 마이클 피트의 아웃핏©movieinsider.com, ©imdb.com




사랑과 과학. 얼핏 보면 전혀 연관 없어 보이는 이 둘은 사실 가설과 증명이란 공통점으로 깊게 엮여있다. 우연히 밤하늘 속 별빛을 목격하고 항성 에너지의 근원을 예측했었던 어느 물리학자처럼, 우리 역시 우연한 만남으로부터 피어난 감정을 사랑이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상대를 관찰하고 되뇌이며 소환한다. 둘 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가설이나, 사랑의 가설이나 그것에 몰입하게 하는 동력은 같다. 바로 믿음이다. 아이 오리진스는 그 빛나는 믿음을 겨냥하고 있는 영화다.



영화 속 베스트 룩©fotogramas.es




작품 속에 등장했던 여러 사랑의 모습들 중에서도 가장 잊히지 않는 건 대상이 사라진 후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아있던 사랑의 잔여(殘餘)다. 또 하나의 명작 클로저(Closer, 2005)의 명대사, 사랑이 어딨어?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는데... 와는 정반대의 관점이다.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현존한다고. 우리가 믿고 있다면, 믿기만 한다면, 언젠가 불현듯 나타나 치열했던 우리의 진심을 증명해 줄 것이라고. 때문에 이별은 결코 사랑의 끝을 증명하지 못한다고. 이 영화는 그렇게 사랑의 아픔을 경험했던 모든 이들을 위로한다.



©nytimes.com








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 2006)


©imdb.com



브로크백 마운틴은 온갖 편견이 집대성된 영화다. 카우보이라는 두 주인공의 직업만 봐도 그렇다. 먼저 카우보이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황량한 사막 속에 짙은 남자의 향기를 풍기며 나타나, 살벌한 결투 속에 목숨까지 베팅하는 배짱을 갖춘, 위험하고 아슬아슬한 캐릭터가 아닌가?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그런’ 카우보이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 흔한 권총씬 하나 없다. 오히려 세상의 편견에 아스러져 버린 가여운 사랑만이 있을 뿐이다.



©nbcnews.com



만년설로 뒤덮인 8월의 양목장에서 처음 만나 여름 한 철 동안 함께 일하게 된 두 카우보이, 에니스(히스 레저)와 잭(제이크 질렌할). 이들의 업무는 외딴 숲 속에서 하루종일 양 떼를 돌보는 일이다. 반복되는 일과와 지루한 풍경 속에서 시간을 보내던 둘은 어느새 깊숙한 속내까지 공유하게 되고 점점 각별한 관계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내 서로에게 우정 이상의 감정이 있음을 알아채게 된다. 그 스스로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심연 속의 감정을 말이다.



웨스턴 코어 무드를 만끽할 수 있는 두 주인공의 패션©tasteofcinema.com, ©pinterest



이 작품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2006년,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까지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며 당대 최고의 영화임을 입증했으니까. 자극적인 요소를 섞어 관심을 끌거나 뻔한 장애물을 세워 주인공들을 시험에 빠뜨리는 게 아닌, 캐릭터 스스로가 선택하고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을 충분히 조성한다. 세상의 모든 애(愛)는 그 자체로 무궁한 가치가 있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하는 연출이다.



2006년 오스카 무대에 나란히 선 제이크 질렌할과 히스 레저©cheatsheet.com




그렇게 영화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일러준다. 숭고한 대자연 속 인간은 한낱 미물에 불과하며 그들을 둘러싼 편견 역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지를. 이에 비해 사랑의 힘은 개인의 세상을 휩쓸어 버릴 정도로 거대하고 또 거대함을. 한눈에 전부 담을 수 없을 만큼 드넓게 펼쳐진, 저 산의 능선처럼.



©seven24films.com








로미오와 줄리엣(Romeo + Juliet, 1996)


©imdb.com



이 작품의 장점을 헤아리려면 열 손가락이 모자라다. 오랜 사랑을 받아온 고전을 이질감 전혀 없이 현대적으로 각색한 센스 하며, 리즈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데려온 주옥같은 캐스팅 하며, 돈냄새 풀풀 나는 영상미 하며, 적재적소에 치고 빠져주는 음악 하며, 마지막으로 주조연 할 거 없이 본연의 개성을 한껏 살려낸 패션 하며... 마치 러닝타임이 긴 패션 필름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뛰어난 미학적 성과를 이뤄낸 작품이다.



©harpersbazaar.com, ©wonderlandmagazine.com




내용은 또 어떠한가. 전 세계인 모두가 다 아는 그 유명한 씬, 줄리엣(클리어 데인즈)과 로미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첫 만남을 떠올려보라. Des'ree의 I'm Kissing You가 잔잔히 깔리며, 열대어가 가득한 수조를 사이에 두고, 상기된 표정 뒤에 설레는 마음을 숨긴 채, 수줍게 눈을 맞추며 서로를 응시하던 그 순간을. 이 단 한 씬 만으로도 영화는 할 일을 다 했다.



©vogue.com, ©nylon.com



하나 놀라운 점은 작품에 등장한 대부분의 의상이 외부 디자이너의 협력 없이 오직 의상팀의 안목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그 중 몇몇은 럭셔리 브랜드의 창고 속 재고들을 가져다가 전혀 다른 분위기의 의상들로 탈바꿈시킨 것으로, 일부러 촌스럽게 보이기 위해 과도하게 염색하거나 빈티지한 느낌을 자아내기 위해 흙을 뿌리는 등 재치 있는 시도를 더했다고 한다. 요즘 각광받는 업사이클링 패션의 원조격인 셈이다.

그러나 영화의 클라이막스, 로미오와 줄리엣의 웨딩 씬에 등장했던 다크 그레이 슈트는 특별히 PRADA의 힘을 빌렸다. 멕시코와 몬트리올, 이탈리아 등 각지에서 온 실력자들로 팀을 꾸려 최고의 룩을 완성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후문. 아무래도 결혼식은 특별하니까.



PRADA의 맞춤 슈트를 착용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vogue.com




다 아는 내용인데 굳이 또 봐야할 필요가 있는가. 대답은 무조건 예스다. 설레는 봄날, 날씨 탓에 들뜬 맘과 패션에 대한 영감까지 단번에 채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작품이니까. 사랑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현실의 한가운데에서 뜨거운 순애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pinterest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My Blueberry Nights, 2008)


©cine-feuilles.ch



왕가위의 영화는 영원히 늙지 않는다. 중경삼림과 아비정전, 화양연화로 이어지는 그의 주옥같은 필모그래피만 봐도 그렇다. 시대가 변해도 청춘 시네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으니.

그러나 과연 이 영화도 그럴까? 이쯤에서 왕가위의 할리우드 데뷔작,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슬며시 꺼내본다. 우선 배우들부터 예사롭지 않다. 유명 재즈 싱어인 노라 존스(Norah Jones)와 주드 로(Jude Law), 게다가 탑스타인 나탈리 포트만(Natalie Portman)이 조연으로 출연한다.



©rakuten.tv



하지만 그에 비해 평단의 별점은 매우 박하다. 메타 크리틱의 스코어는 51%, 로튼 토마토 지수는 46%다. 물론 높을수록 유의미하다. 국내 평단의 의견도 그리 다르지 않다. 김혜리 평론가는 별 두 개 반을 날리며 감독이 뭘 입증하려고 한 건지 궁금하다고 덧붙였고, 이동진 평론가 역시 별 두 개 반으로 그의 추천작 범주에도 못 미치는 데다 ‘왕가위의 영어숙제’라는 참혹한 한줄평으로 선을 그었다. 특히 이동진의 최애 영화가 같은 감독의 화양연화라는 점을 염두하면, 정말 애지간히 별로였나 보다 싶다.

내용도 거창할 게 없다. 한 남녀가 카페 주인과 손님으로 만나 우연히 얽히지만, 결국 그 둘은 서로의 마음을 인지하지 못한 채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꾸준히 상대를 그리워하다 마침내 다시 만나게 된다는 어찌 보면 뻔하디 뻔한 스토리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도무지 미워할 수가 없다. 물론 감독의 연출적 한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점에선 평론가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그 특유의 감성. 그 죽일 놈의 감성이 머리 속에 찰싹 붙어 떠날 생각을 않기 때문이다.



색감을 중시하는 감독의 성향을 그대로 반영한 화려한 패션들©pinterest, ©slantmagazine.com, ©screenmusings.org



이 영화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장면들을 마치 카페 쇼케이스에 진열된 달콤한 디저트들처럼 차곡차곡 전시한다. 다 알면서도 끝내 빠져들게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남녀의 본능적인 끌림과 썸 단계에서 터져 나오는 미묘한 텐션, 그리고 그 사이에 오고 가는 오글거리는 대화들과 엇갈리다 마주치는 시선까지. 마치 블루베리 파이처럼 달콤하디 달콤한.



©screenmusings.org




그런 건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거라고 말하던 사람들도 결국엔 다 무릎 꿇게 만드는 게 사랑의 힘이다. 곧 다가올 따스한 봄날, 이 글을 읽는 모두에게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사랑이 찾아오길 바라며.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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