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ies: Messy Clothes
Stories: Messy Clothes
바쁜 현대인에게 허하는 자유
1분 1초가 소중한 현대인들이여, 여기 희소식이 있다. 아침에 식사는커녕 옷도 제대로 챙기기 힘들었다면, 지금 런웨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목하자.
주름은 늘 천덕꾸러기였다. 옷에도, 피부에도. 생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녀석이건만, 왜 이렇게 미워했을까.
자고로 깔끔하게 옷을 다려 입는 건 자기 관리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말이다. 최근 런웨이에서 흥미로웠던 건 다림질 따위 코웃음 치는 주름 가득한 옷들의 대거 등장이었다. 아침의 5분은 새벽 1시간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아 침잠 많은 에디터는 이 등장(!)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미처 다리지 못한, 아니 않은 옷들에 대해 “원래 이런 옷이다”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니.
왜 옷을 꼭 다려야 해? 이 질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관념에 물음표를 던지는 데 있다. 그간 자연스러운 생활감에서 생기는 주름이 없애야만 하는 기피 대상이었다면 디자이너들은 ‘의도적으로’ 주름 잡힌 옷을 런웨이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 대표 주자로 PRADA가 있다. 처음 런웨이에 선 모델들의 모습을 보고선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래의 트렁크 속 박스에서 막 꺼낸 듯 주름 잡힌 셔츠와 가디건, 팬츠를 보시라.
그도 그럴 것이, 스타일링 일도 겸하는 에디터에게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옷을 스팀으로 다리고 또 다리는 일이다. 주름 하나 없이 멀끔한 옷이야말로 일 잘하는 스타일리스트의 기본 덕목이라고 믿어왔는데, 더군다나 전 세계 패션 러버들의 눈이 쏠리는 무대에서 대놓고 주름진 옷이라니!
그러면 왜 디자이너들은 옷에서 주름을 보여준 걸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23 SS PRADA 쇼 노트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공동 디자이너 라프 시몬스(Raf Simons)는 컬렉션을 장식한 주름이 “삶이라는 작품이 보여주는 ‘오류의 몸짓’”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다림질을 하지 않는 게 엉성한 게 아니라,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한다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
쇼에 등장한 주름을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라, 쇼 자체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발상의 전환을 보여준 셈. 구겨진 옷에서 미학을 발견한 미우치아 프라다 여사의 손길은 MIU MIU에서도 포착됐다. 의도적으로 주름을 패턴으로 만든 우아한 금빛 드레스와 체크무늬 탑의 팔 부분을 고의로 접고 팬츠에 구겨서 넣은 모습. 이쯤 되면 ‘완벽하지 않음’이 트렌드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BOTTEGA VENETA의 2025 SS에서도 미움받던 과거를 뒤로하고 ‘주름’이 쇼 전면에 나섰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마티유 블라지(Matthieu Blazy)는 이번 컬렉션에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고스란히 담았다고 한다. 부모님 옷장을 열어보며 옷을 입어보던 순간의 호기심과 설렘을 말이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소심한 직장인이 보여주는 반항이 있다면, 다리지 않은 주름진 옷이 아닐까? 슈트, 트렌치코트, 재킷 같은 완벽하게 다려져야 할 의류를 되려 구겨지게 표현해 자연스러운 색다름과 해방감을 안겨준다.
PETER DO 특유의 깨끗하고 정교한 테일러링과 주름이 만났을 때.
구겨지다 못해 뭉개진 주름의 텍스처를 재킷에 구현해 낸 Acne Studios와 엄마한테 옷 좀 다리라고 등짝 스매싱 맞을 법한 트렌치코트의 FERRAGAMO. 놀라운 건 두 룩 모두 가죽이라는 사실!
스커트 위에 툭 걸친 오버사이즈 셔츠. 옷에 잡힌 자연스러운 주름이 편안한 느낌과 동시에 세련된 인상을 주는 THE ROW의 룩.
여기 예술혼을 더 한 디자이너가 있었다. 바로 ‘주름지고, 찢어져도 괜찮아’를 몸소 보여준 ABRA. 잔뜩 주름진 핑크빛 오프 숄더 드레스와 구겨진 패션 잡지를 그대로 찢어 입은 듯한 룩으로 과감한 창의성을 보여줬다. 덜 완벽해 보이는 옷이 보여주는 새로움이란 이런 것.
구겨져도 해져도 괜찮다. 그 자체로 멋이 되어 줄 테니까. 고의로 낡고 때가 탄 디테일을 더해 자연스럽고 편한 멋을 더한 그런지(Grunge) 룩의 상징인 체크 셔츠. 각기 다른 소재로 자연스럽게 주름을 보여준 스타일링이 돋보이는 Acne Studios와 R13.
ANN DEMEULEMEESTER는 레이스 원피스를 찢어진 티셔츠에 레이어드해 우아한 그런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줬다.
이제 누가 “너 옷이 왜 그래?”라고 묻는다면 이제 “원래 이런 옷이야”라고 답해보자. 진정한 자기 관리는 범생이처럼 각선 반듯한 옷으로만 드러나지 않는 법이니. 도처에 불확실성이 도사리는 삶의 본질이야말로 우리네 삶의 매력이니까. 그러니 주름지고, 해지고, 찢어진 옷들을 옆에 두고 미처 완벽함이 닿지 못할 여유로움 한구석 정도는 남겨두도록 하자. 불완전함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는 진실이라고 라프 시몬스가 말했듯.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