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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따뜻한 색, 블루 1편

Stories: Fashion and Color Blue


Stories: Fashion and Color Blue

가장 따뜻한 색,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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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바다로부터 파랑을 배운다. 모든 걸 삼킬 듯 매섭다가도 맥없이 부서지는 파도짓, 썰물에 맨몸을 드러낸 해변이 어느새 푸르게 차 오르는 풍경. 이 익숙한 바다의 하루 속에서 우리는 파랑의 파란만장한 면모를 마주한다.


냉정과 열정을 한 몸에 품은 색, 파랑에 대한 이야기.




파랑에겐 죄가 없다


고대 로마인은 파랑을 죽음의 색으로 여겼다. 당연했다. 의학적 지식이 전무했던 평민들이 가장 처음 목격했을 죽음의 광경은 퍼렇게 변한 입술과 몸에 번진 푸른 멍들 뿐이었을 테니. 때문에 그들은 파란색에 감히 이름조차 붙일 수 없었다. 그건 색이 아니었다. 그저 죽음을 가리키는 신호에 불과했을 뿐. 그래서인지 그들은 전투에 나갈 때도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해 온몸에 파란 칠을 했다고 전해진다. 실재하지 않는 파란 갑옷이 그들에게 안전 대신 용기를 준 것이다.

2.jpg 영화 브레이브 하트의 한 장면 ⓒdailyrecord.co.uk, 전쟁의 신 마르스를 그린 폼페이 벽화 ⓒworldhistory.org



한동안 매도되었던 파랑의 진가를 알아봐 준 이는 바로 예술가들. 이 역시 당연했다. 시대의 편견을 뒤집는 데엔 예술만 한 게 없으니까. 11세기에서 12세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시절 성화 속에서 파랑의 독보적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를 보면 된다. 그들은 대부분 파란 계열의 옷을 착용하고 있는데, 이유는 마리아(Maria)가 바다의 별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이름도 바다, 즉 마린(Marine)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3.jpg 사소페라토,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 ⓒtheparisreview.org, 프라 안젤리코, 성모자 ⓒthemarianroom.com



마리아 경배가 본격화된 중세 전성기엔 파랑의 인기는 최고였다. 게다가 고귀하고 성스러운 이미지까지 더해져, 왕족 외의 사람들은 함부로 청색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색의 재료도 남달랐다. 당시 가장 비싼 안료인 울트라마린(Ultra Marine)을 사용해야 했기에 몸값도 가장 높았다. 이후 18세기 초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가 도입되며 희소성이 극적으로 해소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랑의 지위는 여전히 건재하다.

4.jpg 영국 왕실에서도 블루는 인기 컬러. ⓒharpersbazaar.com





죽음의 색에서 신성의 색으로. 파랑이 걸어온 반전의 역사가 결정적인 순간을 맞은 건 18세기에 들어서다. 낭만주의 운동과 미국 혁명, 프랑스혁명과 같은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며 자유와 꿈, 진보를 상징하는 색으로 굳건히 자리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젠 모든 이가 선호하는 무적의 컬러로 거듭난 파랑에게, 수고했다 파랑아!

5.jpg 앙투안 장 그로, 프랑스 제1공화국의 알레고리 ⓒwikimedia.org




내 이름은 파랑


한편 이러한 파랑과 한바탕 전쟁을 치렀던 화가가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프랑스의 화가 이브 클라인(Yves Klein). 그는 1960년, 직접 만든 파란색으로 특허를 내고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International Klein Blue)’라 명명했을 정도로 파랑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모든 기능적 정당화로부터 해방된, 파랑 그 자체.” 그는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클라인 블루에 이러한 찬사를 덧붙였다.

6.jpg ⓒitsnicethat.com




이후 클라인은 이 블루를 사용해 200점이 넘는 그림을 제작했다. 거의 집착에 가까운 작업들의 연속은 오로지 하나의 질문만을 위한 것이었다. 색채에서 주관적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 심오한 질문의 해결을 위해 그는 고유의 색을 개발했고, 형이상학적인 오브제와 결합시키는 방식으로써 답을 찾았다.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고? 그렇다면 클라인의 작품을 직접 찾아가길 권장한다. 모든지 실물이 중요한 법. 캔버스에서 쏟아져 나오는 푸른빛의 아우라가 상상이상이다.

7.jpg IKB 79 ⓒtate.org.uk, 푸른 비너스 ⓒartsy.net




파랑을 향한 클라인의 한결같은 마음은 가끔 우스운 기록도 남겼다. 1958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 텅 빔Le Vide은 어떤 작품도 없는, 말 그대로 텅 빈 전시였다. 대신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에게 파란 칵테일을 제공하였다고 하는데... 어리둥절한 관객들은 음료만 마신 채 돌아갔고, 맙소사. 화장실에 도착해서야 전시에 진정한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칵테일에 담긴 파란 색소 때문에 푸른색 소변을 보게 되었던 것. 그의 남다른 파랑 사랑. 이쯤 되면 애정을 넘어선 집착이다.

8.jpg 전시 텅 빔Le Vide의 초대장 ⓒada-invitations.de
9.jpg 전시 전경 ⓒsocks-studio.com




공교롭게도 파랑이 돋보이는 명작엔 처연한 사연이 담긴 작품이 많다. 색이 주는 다층적인 매력 때문일까. 고흐(Vincent van Gogh)의 별이 빛나는 밤(The Starry Night)은 그가 정신병원에 갇혀 그린 것이며, 모네(Claude Monet)의 워털루 다리(Waterloo Bridge) 시리즈는 런던의 지독한 미세먼지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다. 이미 충분히 아름답지만, 마냥 아름답게만 볼 수 없는 냉랭한 현실이 숨겨져 있는 그림들이다.

10.jpg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1.jpg 클로드 모네, 워털루 다리, 가려진 태양 ⓒwsj.com





묘사를 거부하는 추상 작품에 자주 쓰이는 색도 파랑이다. 꽃의 화가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색면화의 선구자인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의 화폭 속에선 형상에 구애받지 않는 파랑의 생생한 역동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2.jpg 조지아 오키프, Abstraction Blue ⓒmoma.org
13.jpg 바넷 뉴먼, 원먼트Ⅵ(OnementⅥ) ⓒlatimes.com




냉정과 열정사이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영화를 선택하는가? 왓챠피디아 기준 상위 3%에 해당하는 본인은 감독, OST, 마지막으로 제목에 ‘블루’가 들어간 작품을 선호한다. 앞선 두 조건은 영화의 스타일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 치자, 하지만 블루는 대체 왜? 이런 의문을 품을 당신을 위해 여기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14.jpg ⓒcriterion.com





그 첫 번째 주인공은 장 자끄 베넥스(Jean Jaques Beineix)의 1988년작, 베티 블루 37.2(Betty Blue). 강렬한 푸른빛이 인상적인 포스터처럼 내용 역시 강렬하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막장 중에 막장 스토리긴 하지만, 탁월한 미장센과 연출 덕에 묘하게 설득되는 게 킬링 포인트. 후반부로 갈수록 상식 밖의 내용들이 등장하니 멘탈 상태가 괜찮을 때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15.jpg ⓒindiewire.com




프랑스가 낳은 명배우 레아 세이두(Lea Seydoux)의 파란 머리가 인상적인 가장 따뜻한 색, 블루(Blue Is the Warmest Color)도 빼놓을 순 없다. 2013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을 만큼 당시 이슈가 되었던 작품. 만남과 교류, 권태와 이별까지 한 치 앞도 예측 불가한 사랑의 형태가 한 편의 영화에 전부 담겨있다. 뻔한 로맨스 영화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이는 수작.

16.jpg ⓒimdb.com




라이언 고슬링의 충격적인 비주얼이 측은한 영화, 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은 파랑에 담긴 우울함을 한껏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영원할 것만 같던 청춘의 사랑도 냉혹한 현실 앞에선 가차 없이 무너지는 탑과 같으니. MSG 한 톨 없는 진짜배기 러브 스토리가 궁금하다면 이 영화가 딱이다. 눈먼 사랑에 길을 잃은 가여운 영혼들에게 조심스레 추천한다.


이 세 작품엔 ‘블루’ 말고도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치열하다 못해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아냈다는 것. 아마 이 영화들을 한 번에 몰아서 봤다간, 엄청난 현타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불꽃에서 가장 뜨거운 부분은 푸른빛이다.’ 이 사실을 절대 잊지 마시라.

17.jpg 베티 블루의 한 장면 ⓒimdb.com



2편에서 계속.




Published by jentestore 젠테스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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