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에 체류한 시간은 약 2년. 살았다기엔 짧고 여행했다기엔 긴 시간이다. 그 사이 다양한 장소에서 다채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만난 셰프와 친구, 인턴과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동료, 저녁 모임에서 만난 사람, 친구의 부모님이나 애인 등등.
사실 하나의 문화를 정의하기는 사랑의 단어를 정의하는 것처럼 불가능에 가깝다. 한국인도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 프랑스인도 사람마다 성격이 천차만별이다. 성격에 따라서 대화의 방식도 다르지만 방문하는 나라마다 일종의 경향성은 존재했다. 문화나 언어 특성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한국어는 나이에 따른 호칭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엔 나이를 묻는 일이 잦은 반면에 영어나 유럽어에는 나이에 따라 호칭이 달라지지 않기에 나이를 묻는 일이 적었다. 이러한 언어 습관이 대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프랑스인은 대체로 주관이 뚜렷하다. 그리고 자기 생각을 밝히는 데 거리낌이 없다. 어학원에서 점심식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나는 아무거나 괜찮아.”라는 표현이 궁금했다. 선생님께 물어보니 한참을 고민한다. 한 3분 정도 미간을 찌푸려 가며 최선을 다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 그런 표현은 없다. 문자 그대로 번역해 말할 수는 있지만 어색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님 스스로는 단 한 번도 먹고 싶은 게 없던 적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 프랑스인도 그럴 거라고 했다. 실제로 내가 만난 프랑스인도 거의 매 순간 하고 싶은 거, 매 순간 먹고 싶은 음식 등 자기 취향이 뚜렷했다.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요리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은 말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자기 선택을 옹호한다. 이걸 선택한 이유는 이러저러해서야. 모든 선택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늘 소설 주인공 같은 삶을 사는구나 싶었다. 주인공이 하는 일에는 이유가 있다. 체호프가 말한 것처럼 총이 등장했으면 발사되어야 한다. 그들의 삶에선 의견을 꺼내면 이유가 발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번은 친구네 가족 식사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프랑스 저녁식사답게 세 시간 가까이 이어진 식사 동안 대화가 끊이질 않았다. 코로나 백신에 대한 생각, 파리 도시 계획, 요리하는 방식 그리고 요리와 잘 어울리는 와인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했다. 100분 토론이라도 하는 것처럼 각 주제에 대해 자기주장을 강하게 펼쳤다.
백신을 맞으면 정부가 팔에 전자칩을 주입해 국민을 추적할 수 있다고 한 친구가 주장하자 다른 친구는 그게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반박했다. 한동안 입씨름이 이어졌다. 그러다 백신을 맞으면 팔에 전자기장이 생겨 자석이 붙는다는 소문이 있다는 말이 나왔다. 모임에 있는 친구 중 대부분이 백신을 맞았기에 한 친구가 실험을 해보겠다고 자처했다. 다른 친구가 냉장고에서 자석을 떼어왔다. 실험대상이 된 친구가 팔을 걷었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이었지만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두운 방에서 촛불이 일렁이는 가운데 팔을 걷은 친구를 보니 무슨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생겼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팔에 자석을 댄 순간, 자석이 철썩하고 붙는 게 아닌가. 정적. 전자칩을 주장하던 친구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모두가 경악한 순간, 팔을 걷은 친구가 땀이 나서 그런 거라고 팔에 붙은 자석을 쉽게 떼어냈다. 이어지는 폭소. 그리고 자연스럽게 주제는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이어진 주제는 프랑스의 세금 체계에 대한 토론. 이번엔 집주인 아들의 여자 친구와 집주인 아내가 맞붙었다. 간접세와 직접세가 일반 시민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싸우는 모습이 생경했다. 나이 차이도 나이 차이지만 초대받은 집에서 남자 친구의 어머니를 상대로 당당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모습이 신기했다. 두 사람은 팔과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10분가량 토론을 이어가다가 결국 여자 친구가 사 온 멜론을 잘라 맛있게 먹는 걸로 합의를 봤다. 그리고 대화는 멜론이 먹기에 적당히 익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 교환으로 이어졌다.
그날 저녁 모임은 피아니스트 친구가 드뷔시와 쇼팽, 그리고 자작곡까지 20분가량 연주를 하고 박수갈채를 받는 행복한 결말로 끝났다.
이처럼 프랑스인의 토론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적처럼 싸우다가도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으면서 끝나는 경우가 많다.
평소에 나는 상대방이 내놓은 의견에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고심 끝에 용기를 내서 입 밖으로 꺼낸 주장에 다른 의견을 꺼내면 혹시나 상처를 줄 수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는 특히나 다른 의견을 제시하기가 어색했다. 하지만 프랑스인은 자기가 생각하는 방식과 태도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로를 더욱 잘 알게 되고 깊이 이해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들이 즐겨하는 놀이인 셈이다.
여전히 나는 사람과 대화하면서 때로는 내 의견을 고스란히 드러내지 않기도 한다. 상대를 기만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누군가는 타인의 의견보다 공감과 이해가 필요하다.
또 다른 누군가에겐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조언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에게는 보다 직설적으로 의견을 말해주는 편이 좋을 것이다.
대화 방식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각자 의견에 따라 다르다. 내 화법도, 프랑스인의 화법도 다른 형태로 표현된 배려이다. 같은 마음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양상이 흥미롭다. 우리는 모두 서로 상대방과 소통하기 위해서, 한걸음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화 문화를 발전시켰을 테니까. 이러한 마음은 인류 전체가 동일하게 느끼겠지.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대화에도 정답이 없다. 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속에서 우리는 은유적으로 춤을 춘다. 상대방 발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보다 아름답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소통, 우리는 대화를 하며 우리만의 춤을 만들어 나간다. 인류가 타인과의 대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무궁무진한 형태로 만들어지는 대화는 아름답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