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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정 Oct 15. 2021

프랑스에서 살았던 곳들 (1)

 파리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지역은 보그르넬이었다. 파리 15구와 16구 경계선 중 하나인 백조의 섬(Île aux cygnes) 근처에 있고 파리 최대 규모라고 불리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는 동네.


 파리 도심부에서는 보기 힘든 고층 아파트가 모여있다. 그러다 보니 미래적인 분위기의 사진이나 영상을 찍으러 많이 오는 모양이다. 살면서 화보를 찍는 모습이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는 걸 종종 보았다. 에펠 타워와 가깝고 유명 호텔 체인도 입주해 있어 관광객이 제법 찾아온다. 백조의 섬 끝에 자리한 자유의 여신상은 센 강을 누비는 유람선의 기점이기도 하다. 또한 파리에서 치안이 좋은 편에 속해서 인지 한식당과 한인 식료품점도 여러 곳 있다. 18세기 철학가나 문학가가 방문하지는 않은, 유서 깊지는 않지만 주거 지역답게 거주민을 만족시킬만한 훌륭한 요리를 내놓는 프랑스식 레스토랑이 있어 단골처럼 드나들기도 했다. 그곳 요리는 대부분 맛이 좋아 거의 다 맛보았다.


 나는 센 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고층 아파트에서 살았다. 내 방은 벽 한 면 전체가 유리창이었고 앞에 있는 건물이 낮아서 해가 질 때면 하늘이 바꾸는 색채의 향연은 마법에 가까웠다. 계절에 따라 태양이 각도와 색과 질감을 바꾼다는 사실도 그 집에 살면서 실감했다. 노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사랑에 빠진 것처럼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을 나만 보고 있다는 사실에 처연해지기도 했다. 가끔 그 노을이 그립다.


 학교가 그 근처에 있었던 덕분에 보그르넬에는 함께 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 가까이 많이 살았다. 거대한 규모의 학교 기숙사에서 산다면 이런 느낌일까. 수업이 끝나면 각자 집에 모여서 학교에서 만든 디저트를 함께 먹고 마트에서 식재료를 사 와 저녁 식사까지 같이 만들어 먹곤 했다. 약속을 하지 않아도 길이나 마트에서 친구와 마주치는 일은 즐거웠다. 제과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지에 대해, 파리에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던 시간들. 사소하지만 따뜻한 기억들. 추석에는 모여서 함께 전을 부치고 할로윈 파티를 위해 호박을 조각해 양초를 꽂기도 하고 공들여 꾸민 우리 집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신년 모임을 가졌다. 보고 싶은 내 친구들.





 두 번째 집은 한 달 조금 넘게 살았던 마레 지구 생 폴 성당 앞 에어비앤비. 지어진 지 100년에 살짝 못 미치는 젊은 집이었다. 프랑스에서 100년 정도 된 건물이면 한창때… 이니까. 프랑스식 2층(한국식으로는 3층)이었고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계단 경사가 급해서 올라갈 때마다 허벅지가 단단해지는 듯했다. 운동하는 것 같아서 뿌듯!


 마레는 먼 과거엔 늪이었고 그 이후에 귀족 거주지였다가 21세기 초반 파리에서 가장 트렌디한 거리이기도 했던 이곳은 현재는 고급 상점이 즐비한 럭셔리한 거리로 탈바꿈했다. 예전에 쇼핑을 하거나 와인 한 잔 하러 종종 오던 곳이어서 반가웠다. 한국에도 지점을 낸 얀 쿠브르의 가게도 근처였고. 다만 평소라면 저녁이면 사람으로 가득 차 있을 식당과 술집이 내가 이곳에 살던 당시에 프랑스에서 시행 중이었던 오후 7시 이후 통행금지와 실내 취식 금지로 인해 그런 모습은 볼 수 없어 아쉬웠다.


 하지만 아쉬운 점만큼이나 특별한 경험이기도 했다. 저녁 7시 이후에는 모든 가게가 문을 닫고 허가증 없이-실제로 검사를 잘하지는 않았지만- 돌아다니다 적발되면 벌금이 비쌌기 때문에 그 시간 전후로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보니 어둑어둑한 파리의 밤을 집에서 온전히 보내야 할 때가 많았다.


 머물던 숙소는 로마에 사는 이탈리아 아주머니 집이었고 오래된 프랑스와 이탈리아 가요 CD와 플레이어가 있었다. 에디트 피아프, 샤를 트레네, 이브 몽땅 같은 옛 샹송과 질리올라 친케티, 메모 레미지, 루치아노 파바로티 같은 옛 칸초네를 내킬 때마다 꺼내 들었다. 개나리처럼 진하게 노란 식탁보와 레몬처럼 밝은 노랑 접시, 망고 속살처럼 은은하고 연하게 노란 벽지까지, 이탈리아 분위기를 담뿍 담은 파리의 옛 건물에서 통금에 갇혀 오래된 노래를 듣다 보니 1970년대로 여행을 온 듯했다.



 거실과 부엌에 거리가 보이는 내 키보다 큰 창문이 있었다. 낮이면 햇살이 은은하게 들어왔고 그 옅은 빛은 노란 방을 더욱 노오란 방으로 보이게 했다. 창문을 열면 밖으로 좁은 골목길과 그 끝에 있는 생 폴 성당이 보였다.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성당은 상황에 따라 외관을 바꾸는 사설탐정처럼 외양을 바꾸는 듯했다. 맑은 새벽녘에는 짙은 회색이 섞인 보랏빛으로, 해가 내리쬐는 정오엔 갓 거품을 낸 샹티이 크림 같은 색으로, 눈 오는 날엔 겨울 동안 몸집을 한껏 부풀린 양털 같은 모습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계속해서 변하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을 테지만,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관계로 포기했다.


 요즘도 마레에 갈 때면 가끔 그 집 앞을 지나간다. 그 커다란 창문 너머에 있을 노란 거실과 찬장에 쌓여 있을 오래된 CD를 떠올린다. 맑은 날 오후엔 그곳에 내리쬘 옅은 햇볕도, 그리고 창문으로 보이는 생 폴 성당의 모습도, 아마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 한 켠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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