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공항 입국심사원과 영상통화한 썰.
나와 애들이 탄 비행기는 10여 시간을 날아 헬싱키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한국과 스웨덴 직항 노선이 없어서 스웨덴을 가려면 유럽 어느 나라에서 한번 갈아타야 하는데, 그동안 쭉 네덜란드에서 환승을 하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헬싱키를 경유하게 되었다. 헬싱키에 점점 가까워지면서 나의 마음도 조금씩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분명히 입국심사대에서 '입국 목적'을 물어볼 텐데 그 이유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좀 난감했기 때문이다. 무비자 입국의 가장 흔한 이유는 여행 아니면 단기 출장인데, 여행이라고 말하자니 이미 여권에 내가 올해 6월까지 스웨덴에 살다가 간 흔적이 남아있어서 그렇게 말하기엔 무리가 있고, 단기 출장은 양쪽에 애 하나씩 매달고 온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이유였다. 결국 '잡 인터뷰'라고 말하기로 결정하고, 예상되는 질문 시나리오를 머릿속에서 수십 번 돌려보기 시작했다. 같은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들은 입국 심사대를 쭉쭉 시원하게 빠져나갔고, 드디어 우리 순서가 되었다. 가슴팍에 총(?)이 달려있는, 방판 조끼를 입은 체격 좋은 심사관이 우리를 맞이했다.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Good morning" 인사를 건네고 여권을 건넸다.
심사관: 너, 스웨덴에서 살았었네? 그런데 지금 왜 다시 가는 거야?
무지개: (그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끙) 응, 나 잡 인터뷰 있거든.
심사관: (갸우뚱하며) 애들 데리고? 너 싱글 패런츠야?
무지개: 우리 애들도 스웨덴에 살았어서 이번에 데려가서 친구들도 만나게 하고 그러려고.
그리고 남편은 한국에 있어.
심사관: (심각해진 표정) 그럼 니 남편이 네가 애들 데리고 국경 넘는 거 허락한 거야?
무지개: 당연하지!
심사관: 그럼 니 남편이 네가 애들 데리고 스웨덴 가는 걸 동의했다는 증거를 보여줘
무지개: 엥?!!!!(하늘이 노래짐) 증거??? 이건 내가 스웨덴에 살러 가는 게 아니라 잡 인터뷰를 위해 잠깐
방문하는 거라니까! 그런데 왜 남편 동의서가 필요한데?
심사관: 네가 잡 인터뷰를 보고 잘돼서 잡을 갖게 되면, 애들도 너랑 스웨덴에 남게 되는 거 아냐?
그럴 경우를 위해 남편 동의가 있어야지.
무지개: 오노노, 내가 만약 잡을 구하게 되면 Working permit을 준비해야 되고, 그걸 준비하려면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해. 그때 남편 동의서가 들어가는 거야. 지금은 단순 visiting이야.
심사관: 됐고, 나는 니 남편 동의서를 봐야겠어. 증거를 내나 봐
내 인생에서 이렇게 식은땀이 절로 나기는 처음이었다. 옆에서 심사대를 쭉쭉 통과하는 사람들과 달리, 우리는 옴짝달싹 심사관에 잡혀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옆에서 듣고 있던 아이들도 덩달아 불안해기는 마찬가지. 남편 동의서를 요구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법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나의 입국은 전혀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비자법 상, 내가 취직을 하게 되면 Working permit을 신청해야 하는데 이걸 신청하게 되면 신청인은 반드시 타 국가로 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비자를 신청하는 절차 중에 내가 아이를 데리고 혼자 스웨덴에 머물 계획이면, 배우자의 동의서를 넣어야 한다. 따라서 비자 신청 프로세스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입국심사원이 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으나, 당시에는 정말 하늘이 노래져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한국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과 함께 스쳐 지나가듯 '그럼 우리 남편이랑 영상통화라도 할래?'라고 물어보았다.
무지개: 남편 동의서는 없어. 어떡하지? 그런데 네가 정 필요하다고 한다면 내 남편이랑
Face talk이라도 할래? (이렇게 물어보면서도 정말 이렇게까지 할까?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난 거의 농담 식으로 건넸다.)
심사관: 뭐, 그런 던가.
무지개: (뭐뭐뭐라고? 진짜 영상통화를 하겠다고?!!!) 아, 그래? 잠깐만. 나 핸드폰 좀 키고.
급하게 가방에서 핸드폰을 켜고 와이파이를 잡는데 그 순간이 정말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얼굴에는 식은땀이 나고 옆에서 사람들은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영상통화를 시도한다 해도 한국은 그 시간이 오후였기 때문에 남편은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고, 만약 그가 회의 중이었다면 못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정말 다행히! 남편이 한 번에 받았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남편에게 설명도 못하고 바로 심사관에게 폰을 넘겼다. 지금 생각해도 남편이 이 영상통화를 받았을 때 얼마나 당황했었을지 웃음이 난다.
무지개: 와! 연결됐어!! 받아봐
심사관: (본인도 이 상황이 좀 웃기는지 피식 웃으며 대뜸) 후 아유?
남 편: (엥? 얘는 뭐야 하는 느낌) 아이엠 알렉스. 후 아유?
무지개: (여보, 그런 자세 아니야. 제발 공손하게 해ㅜㅜ)
심사관: 흠. 지금 니 와이프가 애들 데리고 국경 넘으려고 하는데, 알고 있어?
남 편: (바로 상황 알아차림) 예스
심사관: 얼마나 머물 건지 알고 있어?
무지개: (앗, 이건 남편이랑 말이 틀리면 어쩌지?)
남 편: 어바웃 쓰리 먼스
심사관: 오케이.
와, 정말 다행히도 남편이 눈치껏 상황파악하고 간결하고 깨끗하게 답변해 줘서 통과가 되었다. 만약 나였더라면 '음, 글쎄. 와이프가 잡을 잡을 때까지?'라고 애매모호하게 말했을 텐데... 이럴 때 남편에게 한 수 배운다.
그렇게 진땀 나는 입국심사를 마치고 들어가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옆에서 아이들도 긴장을 많이 했는지 너무나 무서웠다고. 근데 우리 삼 개월 후에 한국 가야 하냐고 묻는다. 본인들은 스웨덴에 계속 있고 싶은데 왜 한국 가야 되냐고...'엄마가 스웨덴에서 취직 꼭 하도록 노력할게'라고 한껏 부푼 목소리로 말하지만, 내가 망하면 우리 애들도 힘들어지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내 어깨가 많이 무거워졌다. 솔직히 아이들에게 희망을 말했지만 그간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남의 나라에서 취직을 한다는 건 정말 여러 변수가 포함되는 일이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내 나라에서 취직을 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또한 나에게 외국에서 취직을 한다는 것은 비자를 얻기 위해 아무 일이나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나의 커리어를 확장하는 것이었기에 '비자만 지원해 주면 아무거나 다 할게요'가 돼서는 안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스웨덴으로 돌아온 나는, 꼭 생존하리라는 각오를 가슴에 품고 기존에 안 해본 모든 시도를 해볼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