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
<비전공자가 말하는 미술의 이해 3>에서 말했듯, 교양 수업으로 들었던 미술의 이해 필기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 중인데 르네상스 미술부터는 남아있는 소스가 별로 없다...(과거의 나닝겐 머선일..)
따라서 현암사의 ≪미술의 이해≫를 읽으며 정리하겠다.
고흐는 네덜란드의 후기 인상주의 화가지만, 바로크 시대 영역에 그의 이름을 작성해둔 건 서서히 고흐스러운 스타일이 발전된 시기라는 의미다. 바로크 시대는 인상주의가 태동하기 전 밑거름이 된 시기이다.
하지만 빛과 색 보다 형을 통한 고정된 이상화를 예술의 가치라 여겼던 고전주의자들은 바로크 시대를 '암흑의 시대'라고 불렀다. 바로크라는 단어의 의미도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이다. 의미 없이 눈에 보이는 빛과 색을 화폭에 남기는 행위를 예술로 인정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시대에는 역동적이고 표현주의적인 미술은 반항이었다.
우선 항상 그렇듯, 건축물에 남아있는 회화를 먼저 살펴보자. 안드레아 포초는 <신의 불 같은 사랑을 전파하는 예수회>라는 제목으로 산 아냐치오 교회의 천장화를 그렸다. 특이한 점은 천장화에 "원주와 아치를 비롯한 건축 구조물"을 그렸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착각을 불러일으키도록 말이다.
이러한 방식을 투사도 기법이라 말하며 이는 바로크 시대의 환상주의적 회화에 속한다. 모든 시대는 직전 시대에 반항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계승되는 부분이 있다. 반항과 계승이 예술에 발전을 가져오는 것이다. 투사도 기법도 보이는 대로, 즉 리얼하게 표현하는 르네상스의 회화 방식으로부터 계승되었다.
또한, 바로크 시대에는 언제나 신의 성스러움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빛과 색을 중시하던 중세 미술의 특징이었다.
다음은 중세 비잔틴 목판화인데, 이 또한 이집트의 미라 초상화의 영향을 받은 이콘화로 목판위에 그리스도, 마리아 그리고 여러 성인을 재현했다. 영향과 영향의 끝없는 되물림이다.
바로크 시대에는 풍경화와 정물화, 그리고 장르화가 발전했다. 예술 의지와 예술가의 지위는 두말할 것 없이 올랐으며 미술가를 위한 교육 기관인 아카데미도 등장한다.
다음은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풍경화 화가 클로드 로랭의 작품들이다. 신화의 장면을 현실감 있게 표현하기도 했는데, 빛과 색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슬슬 인상주의의 냄새가 난다...
빛과 색의 표현이 거침없어지자, 붓터치가 점차 꿈틀꿈틀 살아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그림 속에 요소가 꽉 들어차거나 색이 온전히 칠해지지 않았으나 감상자가 눈에 담을 때 작품이 완성된다. 이와 같은 작품에 대한 창작자의 태도나 감상자의 시야 및 관점은 형식적으로도, 내용적으로도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바로크 시대부터 작품의 해석까지도 감상자의 몫이 된 것이다. 도식화하고 이상화하여 기호를 작성하듯 인물을 그리던 고대와 고전주의 회화 기준에서는 완전히 반하는 방향이다.
다음은 2014년 프랑스의 어느 다락방에서 발견된 카라바조의 작품이다(추정). 이때 카라바조는 특유의 명암법으로 등장 인물을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게 표현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소실점에 중요 인물을 배치했다면, 바로크 시대에는 빛의 흐름으로 등장 인물을 강조했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자연적 채광은 고려하지 않기에 연극적인 특성이 보인다.
바로크 시대 하면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빼놓을 수 없겠다. 천장화에서 투사도 기법으로 착시를 선보였다면, 여기에서는 거울이다. 벨라스케스는 거울에 반사되는 왕과 왕비를 그린 걸까? 아니면 스스로 거울을 보면서 감상자가 그림으로 보는 장면을 그린 걸까? 부모인 왕과 왕비보다 어린 왕권 후계자를 더 강조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자화상이라는 측면에 무게를 더 둔 것일까?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북부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 얀 반 에이크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 다음은 최초의 유화 작품인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다.
참고로, 르네상스 시대는 고전주의적인 방식에 잠식된 시기였기에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비슷한 듯 다르다. 위 그림에도 도식이 매우 많다. 남자의 손 모양은 맹세를, 여자의 손 위치는 순종과 겸손을, 그리폰 테리어 강아지는 충성을, 벽에 걸린 수정 묵주와 거울은 신성함과 순결을 의미한다. 벽에는 라틴어로 'Johannes de Eyck fuit hip 1434(얀 반 에이크 여기에 있었다. 1434년)이라고 적혀있어 거울에 비친 화가 자신이 결혼식의 증인임을 알 수 있다.
아그놀피니의 머리 위에 켜 있는 하나의 초는 신의 통찰력과 지혜, 결혼의 맹세를 의미하는데 이후에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아그놀피니의 아내가 사망한 이후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것이다. 결혼이나 약혼의 증명을 위한 그림이 아닌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한 초상이라는 주장이 현재 가장 강력하다. 샹들리에의 초도 아그놀피니의 머리 위에만 켜 있고, 거울을 두르고 있는 원형 장식에도 아내의 편에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그림이 그려져있다. 도상이란 정말 신기하다. 그리고 북방 르네상스 작품에 큰 매력을 느꼈다.
오늘도 내일의 나를 위해 총총....